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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세대횡단 문화읽기]
외국 수입품의 살인기계 소리
문화저널(2004-02-12 15:12:34)
관군의 서양음악상황 1894년 한반도 온 산하에 울려퍼진 소리는 수천 수백년간 발전시켜온 민족의 소리이자, 해방의 소리였다. 농민들이 쳐내는 ‘둥둥두리둥~’의 북소리며, ‘갠지갠지갠지갠지~’ 등의 꽹과리 소리에 맞춰 모든 사람들이 가슴 터지게 불렀던 민요가락 하나하나에 천지간 민족의 혼이 배여 있었다. 신청집단의 찬소리며, 삼현육각 반주의 소리판과 춤판, 그리고 온갖 놀이판에서 그 소리와 몸짓 하나하나는 해방을 그리는 민중들의 거룩함이 있었다. 그래서, 한의 소리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소리가 민족음악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농민군과 대립했던 관군과 일본군의 음악이 양악중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양악을 ‘외국 수입품의 살인기계 소리’로 알았다. 기세등등하게 울려 퍼지는 외세의 나팔소리에 비로소 풍물장단과 민요가락이 민족의 자존을 지켜 세우는 소리로 부각되었다. 양고(洋鼓)·나팔에 양총(洋銃)을 메고 총을 탕탕 쏘면서 호기등등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1천명의 경병(京兵)은 일제히 신식 서양총을 가졌으며 기타 수입 분의 대포를 선두에 내세우고 양고·나팔소리에 의기양양하게 나아가니 군용이 당당하고 위의품품(威儀稟稟)하여 향곡거민(鄕曲居民)의 안목으로 과연 외국 수입품의 살인기계를 바라보고 아니 놀랄 수 없었다(오지면『동학사』127쪽과 131쪽, 밑줄필자) 부대명 출전인원 악대명 악대원 이름 악대원계 출전 장위영 850 곡호대 십장: 유봉길·박대봉 병정: 유한경·김기중·안석이·남청룡·이홍록·최수진·이인태·강정복·함천일·신원단·김동식·김창학·정학남 화병 1명 포함 계15명 「각진장졸성책」 『동학난기록』 하권,638쪽 통위영 357 곡호병 병정:송점산·김우성·김용근·김덕문 계4명 위의 책,641쪽 교도소 328 곡호수 병정:임민수·양원태·강용근·한인호 계4명 위의 책,648쪽 경리청 820 취고수 · 계38명 <표1>농민전쟁에 출전한 중앙군 악대 상황(1894) 이 기록은 정부관군이나 일본군이 이미 신식의 서양식 군제편성을 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서양식 북인 양고, 나팔 등 서양음악이 갑오농민전쟁 시기에는 무기류와 함께 외국 수입품의 문화로 보았다. 이것은 민족문화 대 외세문화간 전선이 뚜렷하게 형성될 정도로 국권위기와 더불어 민족 생존여부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2차 농민전쟁을 일으킨 농민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동원된 관군은 거의 서양식 악대였다. 지방병영과 보부상인들로 조직한 보부상군 이외에, 경리청, 장위영, 통위영, 교도서 등 중앙군이 그러했다. 관군들은 곡호대나 곡호병 또는 곡호수 등 서양문화가 이 나라의 근대화를 가져오는 힘의 문화로 믿고 직제편제를 서두르고 있었다. 서양식 북과 나팔로 편성한 악대를 당시 곡호대, 곡호병, 곡호수 등으로 불렀고, 10명 이상을 ‘대’, 4명 정도를 ‘병 또는 수’라고 하였다.(표 참고) ‘곡호대’ 명칭은 갑오농민전쟁이 끝난 직후인 1895년에 왕권 수호부대랄 수 있는 시위대의 ‘군악대’와 차별성을 갖는 이름으로 시위대, 군악대 이외의 중앙군부대와 모든 지방부대의 악대이름으로 유지되었다. 이처럼 정부가 수천 수백년간 역사적으로 발전시켜온 취고수나 세악수들로 편성한 고취악을 민족악대로서 발전시키지 않고 근대화를 빌미로 일본을 통한 서양식 문화로 문화를 전환시키고 있었다. 근대화의 큰 걸림돌이 ‘전통문화’라고 인식하면서 민족문화를 스스로 해체시키고 있었다. 일본군의 음악상황 한편, 출전한 일본군들은 서양식 ‘군악대’로 행진하면서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일본군들은 서양식과 일본식으로 만들어진 군악대 행진과 군가(軍歌)를 부르며 농민군 진압과 청일전쟁을 누비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일본측에서도 밝히고 있다. 한국의 동학당 난을 계기로 27년(1894-필자) 일본과 청국사이에 선전이 포고되었다. 일본병력은 보병 14여단이 처음으로 군악대 2대를 대동하였으며, 총인원이 60,922명이었다.(야마구치 쓰네미쓰 편지. 『육군군악대사』동경 삼청출판부, 1973, 92쪽 밑줄은 필자) 서양식 목관, 금관, 타악기로 편성된 일본군 군악대는 모두 두 대가 움직였다. 제1군으로서 제5사단과 제3사단, 그리고 제2군으로서 제1사단과 제6사단 등 모두 네 개의 사단이 한반도에 출전하고 있었는데, 1군에 오오사카(大 ) 제4사단 군악대가 ‘제1임시 군악대’로 배치되어 있었으며, 제2군에 ‘군악학사’ 25명이 편성되어 제2임시군악대가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압록강 전투부터 구련성 입성이나 안동현 각지의 일본군 병사들 위문과 선무연주를 하였고, 여순 전투나 전입대 전투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일본 군악대는 「나팔의 음향」「전투가」「해전」「압록강」 등 일본식 군가를 한반도 전역에서 부르며 행진하였다. 일본의 군가도 이 때부터 발전하였으며, 조선군관들에게 군가의 필요성을 느끼게하여 한국군가가 일본영향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그림참조) 그림은 성환전투 직후 일본군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울 남산의 왜성대에서 일본 w1임시 군악대가 연주하는 장면이다. 그림 우측으로 조선정부 대표자와 오오시마 토시마사( ) 제5혼성여단장과 오오토리 케이수케( ) 조선주차공사 등이 보인다. 이처럼 농민전쟁에 출전한 조선관군이나 일본군은 서양음악을 연주하는 악대들이었다. 전쟁에 참여한 민중들은 관군과 일본의 소리를 ‘외국 수입품의 악기소리’로 들으면서, 외세문화에 대한 풍물소리와 민요가락으로 민족문화를 내세우며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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