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7 | [문화저널]
거창한 구호가 무색한 생색내기 전주, 문화도시 만들기·전성옥
전성옥
(2004-02-12 15:14:25)
오월의 마지막날. 화창한 봄날 오후에 전주 도심 복판의 객사에서 요란스런 문화행사가 열렸다. 전주시의회가 주최한 '희망 21세기 전주 문화도시 만들기'였다. 시간에 맞춰 국회의원이 도착하고 시장과 시의회의장, 의원 등 이 지역 정가와 관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인물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객사 밖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승객들은 의아한 눈초리로 울타리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일부는 여유가 있는지 객사 안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행사 진행은 유명한 중앙방송사 MC가 맡았으며 전주지역 공고, 예술고, 농고생들의 관악, 시나으ㅟ 합주, 풍물이 식전행사로 펼쳐졌다. 본 행사 때는 주최측이 ‘세계적’이라고 내세우는 건축가와 성악가의 강연과 공연이 베풀어지고 사물놀이와 판소리 한 대목도 선보여 관객들의 흥을 돋웠다. 식후에는 시장이 베푼 리셉션도 있었다. 주최측으로 봐서는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만한 행사였다.
그러나 이 행사를 바라보는 이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눈초리는 그리 곱지만은 않다. ‘문화행사’를 빌미로 한 정치인들의 생색내기용 ‘정치행사’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 행사의 개최 목적도 아리송했을 뿐 아니라 행사비용 대부분의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됐다는 점에서 그냥 덮어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문화재 보호를 명목으로 힘없는 문화예술인들의 행사에는 그렇게 완고했던 객사 문이 ‘끗발있는’정치인들에게 쉽게 열렸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크게 분개하기도 했다. 이번 행사를 좀더 들춰보자. 우선 ‘주제의식’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희망에 찬 21세기를 앞두고 전주를 ‘예향’에 걸맞는 문화도시로 가꾸어 보자”는 취지일게다. 주최 측의 설명도 그렇다. “전주지역 문화단체, 전주시, 시의회, 정당관계자,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주의 자화상을 돌이켜보는 한편 명실상부한 문화도시로서의 전주의 위상을 정립해 보고자”했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라면 행사내용도 그에 걸맞아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했다. 21세기를 들먹이며 문화도시로 만들자는 거창한 구호가 무색할 정도였다. 최소한 전주시의 21세기 지향점이 ‘문화도시’라는 점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자리 정도는 돼야하는데 행사내용은 그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구태여 찾아본다면 건축가 김석철씨의 전주시 건축문화에 대한 제언과 토론일텐데 강연자와 시민사이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방적인 행사기획으로 질의·응답 시간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자리했을 뿐이다.
이날 열렸던 예술공연도 마찬가지다. 주최측은 “관악과 국악, 판소리, 농악놀이에 재즈댄스, 에어로빅 등 동서양 문화가 어울리는 다채로운 공연을 펼치겠다”고 했다. 그래서 풍성한 볼거리라도 제공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했지만 정작 실제무대는 공연 참석자들이 기량을 맘껏 펼쳐 보이지 못한채 어설프게 엮어진 행사진행 순서에 따라 시간메꿈만 했을 뿐이다.
여하튼 전주의 문화에 대해서 잠깐이나마 돌이켜볼 수 있었던 이 행사의 나름대로의 의미를 과소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행사비용이 시민들의 혈세로 충당됐다면 문제는 다르다.
행사 개최 엿새를 앞두고 공식적인 주최자인 시의회 관계자들이 시청출입기자단(필자포함)에게 행사목적과 내용을 설명하는 자리가 있었다. 비용은 1천만원인데 의장과 부의장이 내기로 했다는 얘기였다. 시의원들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문화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이 지역 지방신문들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 행사내용을 소개했다. ‘문화도시 건설을 진두지휘’한 모 시의원이 사진과 함께 상자(BOX)기사도 실었다.
그런데 이틀쯤 뒤에 같은 지방지의 서울분실에서 정동영의원(국민회의 대변인)의 사진과 함께 또 다른 홍보기사가 실렸다. 기사내용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주최는 전주시의회로 간판이 걸렸지만 실질적인 준비는 정의원이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 21세기 전주의 경쟁력은 문화에 있다는 주장을 펴온 정의원이 이를 실천하기 위해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지방지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정의원은 이번 행사로 ‘전주를 문화도시로 만들자는 선거공약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어 기쁘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정의원이 산파역을 해낸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겸손하게도 공식 주최자는 시의회의 이름을 빌렸다. 예산은 1천만원 가운데 의장이 1백만원, 부의장이 50만원을 내고 나머지 8백50만원은 시의회의 예산이었다. 딱히 이를 나쁘게 볼 일은 아니지만 “특정정당의 지구당위원장이 선거공약을 지키기 위해 시의회 예산을 전용했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시의회가 금년 예산을 수립하면서 지구당 위원장이 주도한 행사에 쓰겠다고 사업비를 확보해 놓은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평소 기자선배로서나 깔끔한 정치인으로서나 정의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던 필자로서는 홍보에만 급급했던 이번 행사를 지켜보면서 정의원이 ‘문화에 대한 안목’에 실망감을 금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주최측은 이 같은 행사를 계속하겠다고 했는데 주제의식이 없는 일관성 행사를 되풀이한다고 해서 과연 ‘전주의 문화도시 만들기’에 도움에 될지 의심스럽다.
(이 글의 원고마감일 하루 전에 필자는 정동영의원을 만나 비교적 긴 시간 이 행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정의원의 이 행사의 지적사항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행사를 면밀히 검토하고 앞으로는 되도록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를 만나 폭넓은 의견을 나누겠다고 했다. ‘문화도시 만들기’는 자신의 신념임을 누누히 강조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