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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문화칼럼]
문화와 상업주의·백낙천
백낙천(2004-02-12 15:23:06)
전주- 내 중·고등학교 시절 6년을 보낸 추억 속의 그곳. 생각만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리운 얼굴들과 산과 냇물, 집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곳. 그러나… 정말 그러나다. 벌써 한세대가 지난 30여년만에 다시 와본 전주는 자라던 시절,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해온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첫사랑의 여인을 중년에 다시 만나게 될 때의 실망감과 낭패감이 이런 것일까. 전주를 문화의 도시라고들 한다. 심지어 ‘으뜸가는 문화도시’ 라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문화’라는 말에는 옛것, 전통적인 그 무엇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주가 과연 문화도시로서 내세울 그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본다.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이 있을까? 이런 것들은 외지 사람들도 전주 고유의 음식 내지는 문화의 일부로 접어줄 것이다. 거기에 풍남문, 경기전, 전주객사와 같은 오래된 건축물이 전주의 문화재로서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옥보존지구? 그러나 그 정도의 문화유적이야 웬만한 도시에도 많이 있을 것이고 어쩌면 그런 도시들이 보존과 보호에 노력을 더 열심히 할지도 모른다. 듣기로는 한옥보존지구도 머지않아 전주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 전주의 자랑거리는 또 하나가 없어질 전망이다. 이렇게 사라지는 옛것들 대신 늘어나는 고층아파트 단지. 서쪽을 향해 뻗어나가는 시가지 여기저기에 흉물처럼 버티고 늘어선 아파트군. 서울은 물론 군 소재지에만 가도 들어서있는 고층아파트들을 전주에서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문화도시라는 이름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하긴, 우리는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면서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 위해 너무 많은 옛것을 없애고 부숴버렸다. 전주도 그런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것은 문화도시라는 이름 속에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우리의 옛문화를 돌아보기 의해 외국의 예를 들어보자.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은 말할 것 없고 오스트리아의 문화유적 보존노력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건축물(그 가운데는 일반 가정집도 들어있다)을 하나라도 손상하지 않고 유지, 보존하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 입구에는 시에서 자그마한 팻말을 붙여놓아 그 오랜 풍상을 견뎌온 역사에 경의를 표하게 하고 있고 그런 정성들이 산맥 속의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를 큰 흡인력을 갖도록 만든 힘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편함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해나가는 슬기로움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워낙 역사라고 내세울 것도 없는 짧은 세월을 살아온 그들인지라 그들의 하루하루를 역사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수도 워싱턴 시의 모든 건물은 국회의사당보다 높이(14층정도)보다 더 우뚝 솟아오르지 못하도록 규제하므로써 세계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다. 새로운 건물을 세울 경우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시 건축심의위원회의 엄격한 규제 아래 건물의 외관은 물론 심지어 색깔까지도 주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지난 95년 워싱턴에 세워진 한국전 참전기념조형물의 설계과정에서 여러차례 뜯어고치느라 시일이 상당히 경과된 원인은 바로 그 심의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래된 건물을 꼭 재개발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건물의 내부구조나 뒷면은 손을 댈 수 있도록 하되 전면은 보수나 개축을 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대비되는 선진외국의 이러한 노력은 머지 않아 반만년 역사라는 우리의 자랑이 한낱 허구에 지나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전주와 전북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은 정말 결코 부질없는 걱정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이 고장이 문화 도시의 면모와 체통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남아있는 몇 안되는 유적과 문화재를 더욱 소중히 가꾸고 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그것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역사교육을 해 줄 수 있고 그를 통해 교훈을 줄 수 있으며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그런 노력은 후손으로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우리 고장이 자랑할 수 있는 ‘소리’의 명성과 맥을 잇는 일에 더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예로부터 전북을 소리의 고장이라고 한다. 전주대사습놀이가 말해주듯이 한국 문화의 큰 줄기의 하나가 판소리이고 그 본고장이 전북이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만 돼도 그 동안 일제와 해방 이후 시행돼온 학교교육의 잘못된 결과로 흘러간 팝송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우리의 판소리는 오히려 귀에 설은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듣고 즐길 기회가 없었던 데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요즘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자라는 젊은 세대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을까? 얼마 전 남원에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였다고 해서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으리으리한 국립국악원을 세우고 현대적인 공연장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판소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국악대학을 유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문제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사실 문화의 보급과 유지,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는 소수 전문가보다는 미숙하지만 배우겠다는 많은 젊은이가 더 소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아울러 옛것에 오늘날을 가미하는 시도도 부단히 있어야 될 것이다. 문화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는 그 생명력을 잃고 잊혀져가기 마련이다. 우리가 비빔밥만 내세워 자랑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새로운 전통음식들이 복원되고 그 이름으로 개발됐는가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이 그런 노력 없이는 우리가 가진 값진 문화유산마저도 잃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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