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7 | [세대횡단 문화읽기]
신라계 영향을 받은 흔적이 짙다·천득염
천득염(2004-02-12 15:23:53)
이 탑은 탑신부의 양식이 인근에 있는 미륵사지석탑과 매우 유사한 까닭에 건립연대가 백제시대 혹은 신라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되어 왔었다. 그러나 1965년도의 해체를 통하여 밝혀진 탑신부나 기단의 양식 그리고 그 내부에서 금판 금강경(金板 金剛經)이나 금제사리함(金製 舍利函), 특히 이 탑 지하심초(地下心礎)에서 수습된 청동여래입상(靑銅如來入像)의 양식 등을 토대로 하여 이 탑의 건립연대가 종전보다 훨씬 내려와 고려초 약 10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다만, 탑의 양식으로 보아 최근 백제시대 작품이라는 추정이 제기 되고 있으며, 필자는 견훤과 결부시켜 통일신라 말기이든지 아니면 내부 유물 등에 고려초로 추정하였다. 특히 최근에 이 탑 주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결과가 이 탑의 건립연대와 결부되어 주목되고 있다.
탑의 현황
이 석탑은 금마에서 전주쪽으로 약 2km쯤 가면 궁들(王宮 )이라고 하는 소구릉(小丘陵)위에 있다. 종전에는 탑기단부가 토단(土壇)으로 둘러 쌓여져 그 부분이 불명하였으나 1965년 11월의 해체조사결과로 석조방형기단(石造方形基壇)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단 중앙부에는 적석찰주(積石擦柱)를 축조하였으며, 기단 네모서리(4 )에는 부등변 8각 고주형(高柱形)초석을 놓아 각각 제 1층 탑신의 4우주석(隅柱石)을 받게 하고 이 8각우주석(角隅柱石)사이에는 장대석을 여러 단으로 쌓아 올렸다.
지대석 위에 높직한 각형(角形)1단의 받침을 놓고 양우주(兩隅柱)와 2탱주가 있는 3간의 기단 중석을 만들었다. 갑석(甲石)은 부록(副綠)이 있으며 갑석윗면은 약간 경사졌고 고·각형(孤·角形)2단의 탑신받침이 모각되었다.
1층 탑신은 총 8개석으로 1면에 2간으로 4우주 이외에 중앙에 탱주1개를 두었는데 그 탱주가 양판벽의 일부를 함께 단일석으로 조각, 결구하여 기둥과 변면석을 별개의 돌로하였던 백제시대의 석탑과는 다른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석탑의 조립기술의 발전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의장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다소 의문을 제기 할 수 있겠다.
옥개받침은 각형 3단으로 미륵사지석탑과 유사하고, 옥개석은 우(平 )하고 네모서리에서 반전을 보였으며 평박( )도 뚜렷하여 정림사지석탑과 유사하다. 옥개석과 옥개받침은 별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옥개받침은 1층부터 5층까지 전자형(田字形)짜임으로 통일되고 옥개석은 3층까지는 위자형(圍字形)으로 조립되고 4, 5층은 전자형으로 짜여있다. 옥개석 위에 있는 1단의 탑신받침은 옥개석과 단일석으로 조각하고 있어 건립의 편리함을 도모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나 탑신폭의 체감의 적어 다소 두툼한 맛을 주며, 2층 이상의 탑신높이 역시 거의 체감되지 않아 경쾌한 맛이 적다. 특히 기단부의 형식이 전형적인 백제계 석탑의 기단과 다른 모습이어서 이 탑의 건립연대와 형성배경을 짐작케 해 주고 있다. 즉 이 탑의 기단은 9세기 후반 문경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석탑의 기단모습과 너무 흡사하여 이 탑이 산라계 석탑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느끼게 한다. 갑석(甲石)위 낙수면(落水面)의 경사, 부록(副綠), 1층 탑신괴임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