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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서평]
아비 상실과 세상 껴안기·김승종
김승종 (2004-02-12 15:24:51)
1997년 4월 22일, 한국 문단은 한 젊은 작가를 잃었다. 죽기 40일 전에야 위암 판정을 받은 작가 김소진은 그야말로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설사 그가 유망한 작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33년 5개월 간 지속된 그의 삶은 참으로 섬광과 같은 것이었다. 김소진은 1991년, 「경향신문」신춘문예공모에 당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 약 7년간 창작활동르 전개하였다. 그는『열린사회와 그 적들』,『고아떤 뻥덕어멈』,『자전거도둑』,『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등 4권의 단편소설집과 1권의 연작소설집 『장석조네 사람들』, 그리고 1권의 장편소설 『양파』을 남기고 요절하였다. 활동 기간에 비하면 결코 적지 않은 작품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각기 독립된 작품들이라기보다는 서로 의지하고 합류하는 가운데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고 잇다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같은 모티브, 혹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권 상실과 실향민 의식 그의 작품 중 상당수는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품에 서술된 내용이 실제 작가의 삶과 일치하는가 여부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위와 같은 형식을 고집스레 추구했느냐 하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 회상된 과거는 그리 밝거나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어둡고 지저분한가 하면 악취가 진동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그들의 유년기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적빈의 중심부에는 ‘고향을 상실하고 건강마저 잃은 아버지’ 혹은, ‘무능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가 위태롭게 서 있다. 작품 속의 아버지들은 전혀 가장으로서의 자격과 위엄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장 구실이란 곧 안정된 수입과 번듯한 직업에 바탕을 두게 마련이다. 안정된 수입과 번듯한 직업이 있어야만 비로소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눅들지 않고 사랑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성장하기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할 경우, 아이들은 상처받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의 자리」의 아들은 아버지가 중학교 등록금을 색주가에서 날리자 약국에서 빼돌린 항생제를 불법으로 판매하며, 「원색생물도감」의 아들은 용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춘화를 판매하는 일을 하고, 「벌레는 단 과육 속에 깃들인다」의 딸은 300원짜리 브래지어를 사기 위하여 도장파는 할아버지 요구대로 그 앞에서 팬티 끈을 내린다. 그런가하면 「자전거 도둑」의 아들은 무능한 아버지와 자신을 모욕한 도매상점 주인에게 잔인한 일격을 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이와 같은 소년·소녀들이 겪은 정신적 상처는 결국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형적 상흔’이 되고 만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적극적으로 살지 못하거나 시대적 모순에 당당히 맞서며 살기보다는 늘 한풀 꺾인 상태에서 주눅들어 살아간다. 곧 그들 역시 무능한 가장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김소진이 아버지의 부권 상실 현상을 집요하게 형상화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한국근대서는 한 마디로 ‘부권상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근대 체제를 출범시키는 대가로 주권을 희생시켰으며, 식민지하에서의 우리 민족의 삶이란 곧 ‘아비 없는 자식의 삶’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에도 우리 민족은 단 한번도 정통성 있는 정권의 통치를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은 무너지고 미풍양속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경제 발전, 혹은 산업화의 논리 속에 판치는 것은 오로지 ‘나와 내 가족만 잘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적자생존의 논리 뿐이었던 것이다. 부드럽고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 껴안기 김소진의 문학은 그러나 비정한 적자생존의 논리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의 문학은 고통과 치욕 속에 절망하는 문학이기보다는 ‘늦봄이면 꽃을 피우고야 말 갈매나무’처럼 절망과 고통을 넘어서는 ‘희망의 문학’이다. 김소진이 절망과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은 특이하다. 그는 그것들을 잊어버리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극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기억들을 샅샅히 들추어내고 그것을 집요하게 반추하는 가운데 그것돠 친숙해지고 나아가 그것들을 능숙하게 길들이기까지 한다. 그의 문학 세계는 그의 학벌(서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대단히 촌스럽고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다. 곧 그의 작품들은 음식물, 정액, 똥 등이 쏟아내는 이야기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유작이며 미완성작으로 남게된 「내 마음의 세렌게티」에서 작가는 명예퇴직을 강요당하며 연수를 받고 있는 이의 미리 쓴느 유언을 통해서 “일평생 똥이 가득 머물다 간 집이었던 내 몸뚱어리는 스스로가 똥이 되려 합니다. 거름이 되려 합니다. 끝내 다시 태어나려는 기억도 잊으려 합니다.”고 외치고 있다. 또한 「눈 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의 주인공은 재개발로 헐리게 된 산동네 폐가에서 똥을 누며 “이 동네가 포크레인의 날카로운 삽질에 깍여가면 내 허약한 기억도 송두리째 퍼내어질 것”을 한탄하고, 「신풍근 배커리 史」의 주인공 찐빵집 할아버지는 한총련 사태로 연세대 건물 안에 갇혀 굶주리고 있는 손자에게 먹이려던 찐빵을 전경에게 나누어준다. 그 할아버지의 평소 지론은 “혼찌검을 내더라도 먹여가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故김소진의 명복을 빌며 김소진은 이제 바람과 물과 흙과 더불어 하나가 되었다. 그의 문학은 바야흐로 난만하게 개화할 것을 준비하는 꽃봉오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채 피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름다우 봉오리는 봉오리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순수한 우리말이 참으로 풍부하고 정확하게 사용되어 있으며, 서술과 묘사, 회상과 진행, 표준어와 방언 등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경제 발전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 소시민의 삶이 퐁속적인 차원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의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은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토록 어둡고 힘들게 만들었던 산동네에서의 생활뿐만 아니라, 무능한 아버지와 폭력적인 정권마저 따뜻한 시선으로 거두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잘나봤자 먹고 배설하는 가운데 종족을 번식해 가면서 살되 짐승과는 달리 나누고 베풀며 사는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그의 확고한 민중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시대’의 역사 읽기·임혜영 역사를 바로 세워보겠다는 집권자의 의지 때문일까? 요즘은 역사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역사를 간추리거나 몇 장면으로 나누는 것도 흔한일이 - 과연 역사를 간추리고 몇 장면으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차치하고 - 되어 버렸다. 그중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책이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다. “고려의 역사는 삼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단순한 징검다리가 아니다. 고려사는 고려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격동이 오백 년을 역동적으로 헤쳐나간 그 강인함의 원류를 이해하는 것만이 오늘의 우리를 올바로서게 하는 디딤돌이다.” 저자의 말대로 고려를 삼국과 조선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아닌 독자적인 시대로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삼국이 있었기에 고려가 있고 나아가 조선이 있기 위해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이제 고려의 색깔을 찾아주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 고려시대에 정종(定宗,靖宗)이 들어있다는 것, 광종이 중국인과 손을 잡고 개혁을 해야했던 이유, 공민왕이 개혁주의자에서 정신질환자로 변모되는 과정 등등 고려역사의 편린이나마 알아야 하겠다. “조선의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속에 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조선시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현재 우리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그 영향 아래 살고 있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 독자들은 이 책을 펼쳐들 것이다. 이 책이 제목만으로는 왕조실록을 간단하게 요약·정리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실록의 대강만이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서 찾은 이 책은 그러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왕조사는 단순히 왕족들을 위한 역사가 아니다. 왕이라는 존재는 글자 그대로 하늘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중재자이자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표명사일뿐, 절대권력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조사가 왕을 중심으로 서술되었다고 해서 왕실의 이야기를 정리해놓은 종묘사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저자 자신도 밝혔듯이 왕조사는 단순히 왕족들을 위한 역사가 아니다. 또한 왕조실록은 단순히 왕 개인에 대한 기록도 아니다. 비록 지방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조선 왕조 전반- 정치, 경제, 사회, 문호, 예술 등 -에 걸친 기록이다. 그 자체가 조선의 역사인 것이다. (고려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을 모범으로 한 점으로 보아 고려왕조실록 역시 그 자체가 고려의 역사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광과 권력을 향해 모여들었던 정치가들을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마치 조선왕조실록은 정치에 관련된 기사만이 전부인 것 같은 오해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 더군다나 왕 개인사나 가족사, 특히 왕의 후비들에 대한 서술이 너무 많다. 마치 왕들은 정사보다는 왕권을 사사로운 여성편력에 이용한 것처럼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태·정·태·세·문·단·세 하며 무작정 외었던 일을 기억한다. 너무 정치사 위주의 역사교육이라는 불만도 많았다. 그래서 이제 이 책을 통해 단순히 왕의 가족사나 몇몇 정치가들에 대한 반복되는 서술보다는 조선 왕조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도움받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역사가 반드시 역사가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우려하는 것은 간추리고 요약하여 가볍게 쓰여진 역사가 일반 독자들에게 전부인 양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의 객관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사론을 펴는 것으로 흥미위주의 책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지않나 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사대적 예절을 강조한 것은 고려의 현실을 감안한 실리적 선택이었다고 하다거나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등. 사족이지만 각 왕대 말미에 세계 약사를 덧붙이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인도의 무굴제국이나 프랑스의 부르고뉴파, 오를레앙파를 기억해낼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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