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7 | [문화저널]
내 마음속의 그녀·손영미
손영미
(2004-02-12 15:25:42)
어렸을 때부터 만화, 영화, 동화, 소설 등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을 보아온 내게는 기억에 남는 여성이 아주 많다. 바느질을 하다가 실수로 손가락을 찔려 흰 눈발에 빨간 피를 똑똑 흘린 백설공주의 엄마로부터, 귀신이 출몰할 것 같은 남원 동헌 옥방에 앉아 “쑥대머리”를 부르는 춘향이, 심약한 애인을 조종해 남편을 살해하고 새 삶을 찾아 달아나는 단편 “밤의 암흑”의 주인공 플로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전통과 애정없는 결혼의 굴레를 벗어나는 인도 영화 <파이어>의 두 동서(同壻),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인 <여자만의 나라>에서, 나뭇가지 사이를 휙휙 날아다니며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여인국을 건설하는 씩씩한 처녀들까지, 내 머리 속에는 동서양 여러 시대의 다양한 여성들이 거대한 미술관의 그림들처럼 도열해 있다. 그래서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생각나면 난 화집(畵集)을 펼치듯 기억의 문을 열고 그녀와 마주 앉는다.
그런데 내가 비교적 자주 찾아가지만 한 번도 마주 앉아 본적은 없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항상 생각에 잠긴 얼굴로 보스톤 근교 한 대학 도시의 보도(步道)를 바삐 걷고 있고, 여간해서는 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처럼, 뭔가에 몰두한 표정이다. 그래서 난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지만 그 음성을 듣거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누구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허구의 여성 중의 하나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작년 9월, <뉴욕커>라는 잡지에 실린 비비언 고닉의「거리에서」라는 수필에서였다. 고닉은 이 수필에서,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것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그런 얼굴, 나이 들어 입술선은 흐려져 있지만, 턱은 도전적이고, 대담한 립스틱에, 유명하진 않지만 많은 것을 아는, 그런 인생을 받아들인 듯한 눈을 지닌”여자, “도시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얼굴”을 지닌 이“보석같은”중년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3년 전에 유행했던 망토와, 살 때는 비싼 돈을 준 가죽 부츠, 그리고 그녀의 감각을 보여주는 옥(玉)박힌 은브로우치로 치장하고, 어느 날 아침 한 대학 도시를 활보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나는 이 묘사를 읽으면서, 한 마디로 한 번쯤 얘기해 보고 싶은, 그러나 아무리 얘기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식과 경험, 생각과 느낌으로 똘똘 뭉친, 늙었지만 영원히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뒤 어려운 일이 닥치거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시원한 답이 안 나올 때는 가끔, 내 주변에 그런 여성이 있다면 언제고 찾아가 내 마음을 털어놓고, 그 정신에 깃든 용기와 지혜, 넉넉한 품성 때문에 그녀에게 내 얘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내가 느끼는 당혹감과 무력감이 치유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했다. 물론 내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여성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남편, 아이, 시댁, 일, 건강, 부당한 사회 구조 등의 엄청난 무게, 시간과 중력의 수레바퀴에 짓눌려, 젊었을 때의 활기나 희망, 통통 튀는 정신의 탄력을 서서히 상실한 채, 아침의 거리를 활보하기는커녕, 동트는 아침하늘을 쳐다볼 여유를 갖지 못한채 세월의 오솔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어갈 뿐이다.
여성 해방을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여성들이 처한 사회, 경제, 문화, 정치적 문제들, 다시 말하면 그 여성 아닌 다른 사람들이 행할 대담한 결정이나 변화, 혁신을 거론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룩한 여성 해방의 성과를 측정할 때도 전통적인 가치 기준인 취업률, 참정권, 경제력, 가사 및 육아 분담, 가정 내에서의 결정권 확대 등을 중심으로 평가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분야에서 대표적인 저서인 패트리셔 애버딘과 존 나이스비트 부부의 『여성 메가트렌드』(1992)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 해방의 주체이자 그 주무대가 되어야 할 여성 자신의 변화는 별로 거론되지 않고, 그들을 압박해 온 사회라든가 제도, 관습, 경제·문화적 여건들만이 열띤 토론과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형편을 고려할 때 이는 어쩌면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귀결일지 모른다. 엄연히 이성과 감성을 지닌 여성들이 남성 중심, 남근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그 현실적 발현체들에 짓눌려, 18세기말의 여성해방론자인 울스톤크레프트의 말마따나 ‘번식용 가축’에 불과한 삶을 산 경우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그간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아,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양의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더 적은 임금을 받는다든가, 교수가 되어도 공식적인 산후 휴가를 받지 못한다든가, 남성보다 뛰어난 전문직 여성이면서도 직장일과 집안일 둘다를 완벽하게 해 내는 수퍼 워먼이 되어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와 압력 때문에 만성 피로와 자괴감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여성이 수두룩한가 하면, 몸은 20세기 말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그대로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원시적 남성들도 적지 않은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게라도 나는, 진정한 여성 해방은 우리 여성들의 정신에서 시작되고 완결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항상 살아 있는 정신을 가진 여성, 가정과 사회, 세계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성숙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여성, 청춘의 꿈과 현실 속의 가능성을 양날개 삼아 부단히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여성이라면, 째째하고 치사한 성차별, 시대 착오적이고 소아병적인 성희롱, 부당하고 불법적인 갖가지 형태의 여권 유린이 뭐 그리 대수랴. 그런 여성이 인구의 대다수를 이루는 멋진 사회라면 그런 반(反)시대적 형태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고닉이 그린 보스톤 근교의 멋쟁이를 어떤 남자가 무시할 수 있으며, 어떤 제도가 압박할 수 있으랴? 그건 마치 수로부인이나 관음보살에게 커피 한 잔 타 오라든가 유치한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것과 비슷한 꼴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해방된 여성이라면, 그리고 자기 자신 및 세계와 자유롭고 창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이라면, 기저귀를 빨든, 우주선을 몰든, 아주 잘 해 낼 것이고, 남자와 결혼하든 레스비언이 되든 최고로 멋진 연인이 될 것이며, 가난한 독신으로 살아가더라도 화려한 유부녀 못지 않은 생활, 아니 더 충실하고 행복한 삶을 가꾸어 갈 것이다. 그런 여성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울 때 페미니즘이나 여성 해방은 기억조차 희미한 과거지사, 너무도 미개하고 한심한 시대의 일이라 역사책에서나 거론되는 인류 발달사의 한 에피소드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성 해방 운동이 전혀 필요없는 사회, 남녀 개개인이 진정으로 풍요롭고 세련된 정신의 삶을 영위할 공동체인 것이다.
해방은 물론 쌍방의 문제다. 그 수단이 의식화든, 계몽이든, 폭력 혁명이든 간에, 해방이 성사되려면 피압박자의 각성과 압제자의 결단 및 변화가 필요하다. 이 양자가 깍지 낀 손처럼 서로를 물고 있다면 해방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는 너무 오래 끼고 있어 시퍼렇게 질린 두 손을 풀고, 그 힘을 모아 그 동안 방치했던 지구를 가꾸고, 형편없이 황폐해진 영혼의 양식을 마련하고, 모두가 어울려 살 아름다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해방이 없이는 남성도, 여성도 행복할 수 없고, 해방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그 어떤 미덕, 지식, 아름다움도 흉칙하게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할 해방의 주체는 역시 여성일 수 밖에 없다. 여성 각자가 눈부시게 빛나는 정신과 성숙한 인격, 풍요로운 영혼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동안 우리를 묶고 있던 편견과 불의, 폭력과 착취의 사슬은 머지 않아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녹슬기 시작한 이 남녀 차별의 쇠사슬, 이제 툭 끊어질 만도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