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7 | [문화저널]
영화적 자의식과 웃음·홍성희
홍성희(2004-02-12 15:26:57)
영화에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 속 이야기의 구조는 희극적 혹은, 비극적 혹은, 그 둘다일 수 있다. 물오른 연두에서 아쿠아 블루의 낭만성으로 옮아가는 초여름을 겨냥한 헐리우드의 선택은 코미디와 로맨스이다. 엄격히 말해서 헐리우드의 선택이라기 보다는 여름 영화 시장을 공략하는 수입 배급업체의 계획된 우연성의 얼굴이며, 이벤트성 유통 기한의 책략이다. 극장은 그리 들뜨지 않았다. 코미디 재담의 대가 우디 앨런 역시 헐리우드의 마이너리티이다.
영화관은 관객들의 피종주국이다. 영화 관객은 떠나고, 극장은 남는다. 덩그러니 밤을 보내는 극장을, 영화의 잔영을 사색하는 사람은 분명 마이너에 속한다. 그는 밤에 깨어있는 자이며, 자칫 신경쇠약 진전의 깡마르고 왜소한 사내, 뉴요커 앨런이다. 그가 이번엔 왜 또 엉뚱하게 뮤지컬인가?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1996산), 제목 자체에서 우디 앨런의 메타 담화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라디오 방송에 관한 영화, 영화에 관한 영화, 연극에 관한 영화, 잊네 또 뮤지컬이 영화 속 이야기를 가로지른다.
우디앨런의 매체에 대한 작가주의적 태도와 더불어 희극의 변형과 확장을 확인할 수 잇는 대표적인 예를 최근작에도 살펴볼 수 있다. 연극에 관한 영화 <브로드웨이를 쏴라>가 아이러니와 풍자의 코미디라면, 이번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이다. 로맨스의 희극을 주재하는 수호신은 사랑이다. 로맨스의 극적 플롯의 본질적인 요소는 모험, 결국 사람의 모험이 될 것이다. 로맨스는 욕구 충족의 꿈이며, 어린이같은 감수성과 노스탤지어, 시공간적 상상의 피스톤을 통해 연속적이고 과정적인 형식으로 진행된다. 한 가족 구성원 개개의 사랑 이야기가 극의 모티브를 이룬다. 변호사 아버지 밥(알렌 앤더)과 그의 아내이자 조(우디 앨런)의 전처인 스테피(골디 혼), 파리의 조와 뉴욕의 스테피를 오가는 딸 디제이가 자신을 포함한 각각의 러브 스토리의 나레이터로서, 전면에 나서진 않으면서 사운드를 통해 메타드라마로서 자기지시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이중 역할이다. 솜사탕과 같은 가공할 상상과 우연이 펼쳐지며, 뮤지컬의 노래와 춤은 그러한 삶 자체를 유희적인 것으로 채색하는 가운데, 극중 리얼리티를 극화시키는 사랑의 세레나데와 극적 의미 전달의 코러스 라인이라는 이중 역할을 아이러니하게 이끈다. 세느 강변의 휘황한 야경과 스테피와 조의 마술적인 곡예와도 같은 춤과 노래는 영화만의 환상이지만 전 작품에 비해 다소 평범하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희극적 아이러니의 놀이적 요소로서 고전 뮤지컬 영화 장르를 새로이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지만, 코미디는 여전히 재담의 지기(위트)로 흐른다.
<브로드웨이를 쏴라>(1994)의 웃음의 층위는 사뭇 지적의식 작용을 유발한다. 영화적 현실은 연극 한 편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서의 연극 속과 밖의 에피소드와 후일담을 토대로 한다. 역시 우리앨런에게 강박적일 수 밖에 없는 도시 뉴욕을 배경으로, 재즈와 뮤지컬, 갱스터들이 판을치는 1920년대를 차용했다. 출연진들의 재담과 성격 연기가 이루어내는 효과는 연극 밖에서 연극의 맛을 톡톡히 보게 한다. 영화 전편에 주옥같은 재즈 보컬이 수렁한 밤거리를 타고 흐르며, 실내와 옥외를 넘나드는 편집도 산뜻한 리듬감을 더한다. 신예의 재능있는 희곡 작가 데이빗은 공연 제작비 지원을 조건으로, 마피아계 두목의 여자이며 쇼걸출신의 재능없는 올리브에게 배역을 맡긴다. 한편 퇴락한 스타 헬렌은 과거 르네상스적인 정신에 사로잡혀 젊은 예술혼 데이빗을 유혹하고, 올리브의 경호원이자 노름꾼, 살인 전문가인 치치는 시종 공연 연습을 지켜보던 중 우발적으로 창작에 개입하게 되고, 이에 당혹한 데이빗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성에 대한 혼란에 빠져 든다. 치치의 작가적 개입이 거세지면서, 급기야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는 보스의 여자 올리브의 형편ㅇ버슨 연기를 참을 수 없어 그녀를 총살하고, 마피아계 보스는 애인의 죽음을 추적하던 중 무대 뒤에 치치를 몇발의 총으로 저격시키고, 이것이 극중 효과음으로 적중하다는 평단의 웃지못할 소식이 전해진다. 예술과 인생의 문제, 허구와 리얼리티의 문제, 작가와 작품의 문제는 영화를 통한 묻고 답하기, 되묻기를 거치면서 장르간의 결합과 해체로 영화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 상대적인 소자본과 작가로서의 감독 중심 영화로 제작된 작품을 통해 우디 앨런은 가장 대중적인 방식으로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해 누누히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디 앨런을 포함하여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와 마틴 스콜세지의 <뉴욕, 뉴욕>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영화적 재현에 대한 문제제기는 영화의 허구적 본성과 구성 자체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메타드라마, 메타 필름으로 진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메타드라마는 자의식적인 예수의 형태로 극적 환상을 파괴하는 양상을 띤다. 허구적 인물에 대해 갖는 이중의 시선은 연극의 허구성, 리얼리티의 허구성을 동시에 탐구하게 하다. 극중극 형식은 극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며, 이중성을 통해 허구적 본성에 관심을 둔다. 즉, 삶 전체의 두께를 지각하는 방식으로 조율된 메타 장치는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라는 밀란 쿤데라 식의 역설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웃음으로 환기되는 인생은 인생 자체와 많이 닮아 있는 것이다. 배역 연기에서 드러나는 정체성의 탐구는 자율적인 자기 정체성이 아닌 소외된 자기 분열의 징후를 드러내고, 상호텍스트성은 극담화의 층위를 구분짓는다. 그러면서도 연거푸되는 웃음은 자못 진지할 수 있다.
최신작 우디 앨런의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는 로맨스와 코미디의 어정쩡한 화해, 혹은 유아기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여준 데 반해, 유럽의 사랑학은 보다 정교하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학 개론을 빌면, ‘난 널 사랑해’는 충동적이며 예측불허적인 것으로, 어떠한 언술 행위라기 보다는 발화에 가깝고, 그것의 심급은 차라리 음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래와 마찬가지로 ‘난-널-사랑해’라는 발화 안에는 욕망이 억제되지도 않는 바로 그곳에서, 그것은 다만 즐겨질 뿐이다. 불란서의 젊은 영화 작가 알렉상드르 자르댕은 <팡팡>(뱅상 페레. 소피 마르소)이라는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우디 앨런이 사랑으로 다하지 못한 웃음의 미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사랑의 숱한 유희와 쾌락을 거치고 사랑의 장년기를 맞았다고 여기는 20대 초반의 청년은, 갓 숙녀가 되어가는 팡팡을 만나, 사랑의 진정한 쾌감을 얻기 위해 상호간에 애써 절제하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자 하며, 결과로 남는 행위의 초라함보다는 상상의 영원성을 지속시키자 한다. 그 황홀함의 상상만으로 불가능한 현재를 영원한 미래로 기약하려는 로맨티스트의 웃음은 웬지 우수어리기조차 하다.
코미디적 장르의 전통이 강한 프랑스의 경우, 희극의 제양상에서 저점 더 분화될수록 희극의 사회적 단위는 작아지고, 심지어 개인에게 국한되기 조차 하며, 흭극성의 본질적인 축제정신과 반대되는 경향을 보인다. 오히려 더 로캔스적인 갚은 사색의 세계로 옮아가며, 축제적이기 보다는 명상적인 분위기가 짙다. 즉, 순수 희극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종교성마저 띠게 된다. 자끄 반 도마엘 감독의 <토토의 천국>(프랑스, 독일, 벨기에 합작)은 보다 더 심각한 극적인 전개를 다룬다. 존재의 뒤바뀜, 탄생의 조작이라는 신화를 다루는 것이다. 어린 토마는 병원 신생아실에서의 방화 사건으로 이웃집 소년과 뒤바뀐 현실을 살게 된 생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힘없는 토마에게 가공인물인 탐정 토토는 동일시의 대상의 도어 불만스런 현실을 대체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연인인 누나의 방화와 자살 이후에도 생의 최후까지 살아남의 사랑의 환상을 추구한다. 일상 생활에 속해 있으면서도 은둔적 생활 감각이 스며들어 있는 고로, 노스탤지어에의 집요한 추구가 있다. 여기서의 희극은 동시에 비극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장르의 희극의 관객은 영화적 명상과 정념에 기댈 때만이 쾌의 전율을 느낄 수 있다.
가령,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에서 드러난 세계는 희극성의 본질적인 축제적인 성향이 짙다. 여기서의 웃음은 ‘가치 또는 체제 전복적인 힘’으로서 다양한 문화의 축제를 통해 드러난다. 가령, 우리의 경우 탈춤과 그 해학, 축제 정신이 이와 유사 기능을 할 것이다. 돈키호테적인 희극은 희극의 사춘기이며, 특히 그 종결부에 자의식의 해방과 한바탕 질펀한 춤의 해탈을 필요로 한다.
세계 영화사에서 코미디 영화는 가장 초기부터 생겨난 장르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에 반해, 한국 영화는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서서히 웃음의 조짐을 보인다. 결코 웃음 자체가 용인되지 않은 아리랑의 시절이 있었고, 웃음의 정치학을 이용하는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급기야 코미디물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기형적인 것은 오락인지, 세태 풍자인지 구분이 잘 가지가 않고, 웃어줘야 할 부분에 웃음이 나지 않고, 웃기지 않는 헛점에서 실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블랙코미디의 기지를 보여 준 이장호의 <바보선언>(1993)을 효시로 하여,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의 반어적인 코미디, 거의 코미디적인 체제 전복에 도전한 김용태의 <미지왕>등의 사례를 보여 주었다. 이후 드문 가능성들을 기반으로, 초월적인 인생 철학을 바탕으로 한 동양의 무구무진한 웃음의 보고를 건드릴 해학과 진정한 유머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기대하게 된다.
음악과 극영화의 성공적인 결합을 보여 주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는 먼저 가고, 느끼는 자 살리에리가 살아 남는다. 영화는 인생의 우주적인 천재성을 모방한다. 모방된 천재의 해독은 결코 천재가 아닌 다수의 관객에게 넘겨진다. 베르그송의 표현대로 웃음은 언제나 집단의 웃음이다. 결국, 희극의 해결과 완성은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