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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7 | [사람과사람]
누울 자리보고 두 다리 뻗는 터줏대감·송영상
송영상 (2004-02-12 15:29:13)
매사에 적극적인 옹고집 성품 한마디로 말해서 알다가도 모를 분이 탁광 선배이다. 어찌나 기지가 넘치는 분인지 그 양반 앞에서 함부로 나불대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언제 어디서나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라면 뛰어난 유머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걸직한 입담을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누울 자리보고 두 다리 뻗는 분이다. 나하고는 10여년 나이 차이가 있는 데도 평소 형님으로 호칭하도록 그 분 스스로 마음 편하게 해주는데도 역시 조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며칠이 되도록 만나 뵙지 못하거나 전화가 없을때면 ‘그 양반 잘 계시나 몰라, 어디 편찮으시지는 않는가’하고 안후가 걱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뵙는 자리에서는 상관할 일이 본명 아닌데도 이런 저런 일들을 간섭(?)하시는 그야말로 다혈질이며 한 번 말을 끄집어낸 일에는 뿌리를 뽑아야 속이 시원하다는 성품이다. 고집 또한 태산을 무너뜨릴 옹고집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탁선배를 뵙게 되면 속알머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야 도무지 눈꼽만큼도 찾을 길 없었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 떠올라 몹시 당황한다. 탁선배를 비아냥 거리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매사가 적극적이라서 일단 시작한 일은 밥이 되든 죽이되든 유달리 남다른 집념을 갖고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탁선배가 부러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든 노인 양반이라고 해서 어물쩡하게 넘어가려 한다든지 적당히 입에 붙은 마로 속이려고 덤벼들었다가는 다시는 행세하지 못할 정도록 곤죽이 되기 마련이다. 나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탁광선배를 가리켜 노익장이라고 한다. 우선 무슨일이든 가리지 않고 현장을 봐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분이며 그 연세에 일단 펜을 들었다 하면 밤이라도 꼬박 새워가며 원고를 써서 마감날짜에 꼭 맞춰주는 분이라서 제 아무리 편하게 대해 주신다해도 역시 조심스럽다. 10여년 넘게 날짜 맞춰준 원고 청탁 오늘날은 내가 「노령」편집인으로 일을 꾸려가고 있지만 종합지「노령」의 초창기에 현재 전북대학교 총장인 장명수 박사 밑에서 편집장 노릇을 할 때의 일이다. 편집회의 때마다 장박사께서 한국영화 초창기를 이끈 탁광 선배가 생존해 계실 때 그 분의 영화제작 애환을 정리해야지 언제 하려고 꾸물대느냐는 질책을 수없이 받았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80년이 다 저물어가는 12월호에야「전북영화 이면사」연재를 시작했다. ‘구술을 받아 정리해야 될까 아니면 대충 메모해주는 이야기를 정리해야 될까'하는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차에 1회분 원고를 받고서 기절초풍할 만큼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해도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탁선배의 글솜씨를 못미더워 했기 때문에 직접 들고 오신 원고를 마지못해 받아 한쪽에 던져 놓고서 재정리할 마으으로 이런저런 화제를 끄립어냈다. 그런데도 열변을 토하듯 다음 호의 내용을 입심 좋게 늘어 놓는다. 한동안 탁선배의 이야기를 듣다가 슬그머니 원고를 펼쳐보았을 때 그야말로 깜짝놀랐다는 말 이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원고지 한칸 한칸을 한석봉 빰칠 유려한 필치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정확한 맞춤법이며 띄어쓰기, 뿐만 아니라 필요한 한자는 묶음표로 엮어낸 원고를 보고 난 뒤에야 사람 잘못 봤다는 생각에 몸둘 바를 몰라했던 일이 생각난다. 오히려 내가 쓰는 문장은 앞 뒤 없는 잔소리요 군더더기 투성이며 맞춤법이 엉망이라서 민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10여년이 넘게 한 번도 재촉하는 일 없이 매호 연재를 한 「전북영화 이면서」는 몇 년 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서둘러 출판해 드려야 당연한 일이었는데 일부는 문예진흥기금을 지원 받았다 하더라도 태부족인 출판비용을 자부담으로 출판하였다. 70고령의 현역 영화인협회 회장 한때 탁광 선배를 따라다니며 영화 이야기에 심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한다. 그러다가 영화라고 하면 극장에 가야만 감상하는 영화 팬에 지나지 않는 내가 어찌하여 영화인협회 부회장이란 감투까지 쓰게 되었다. TV·PD의 직업이 영화에 가깝다고하여 탁선배가 밀어준 것인가. 영화와는 ‘간에 천리’인 내가 영화인협회 부회장 감투를 지금도 쓰고 있으니 웃겨도 한참 웃기는 일이다. 탁선배가 영화인협회 전북지회와 전주시지부장을 싹쓸이하고 있음에도 누구 한사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영화계의 원로이며 우리 고장 전주에서 감히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영화의 산 증인이다. 산 증인에 대한 이야기를 아는대로 한가지만 말하고자 한다. 50년대 들어서면서 한때 전주가 한국의 헐리우드로 명성을 날렸다. 그때나 오늘날이나 방화 사상 명화로 손꼽히는 「피아골」제작에 나선 분이 탁광선배이다. 그 이전에도「아리랑」필름통을 들고 경무대에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사회를 열고 격찬을 받은 탁선배이다. 많은 제작비를 들여 어렵사리 제작한 영화 「아리랑」의 검열이 늦어지자 묘책으로 경무대에 필름통을 들고 들어간 용기(?)는 적극적인 성격을 한마디로 드러낸 쾌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뿐만아니다. 이제는 사라져간 별이지만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중의 우상이었던 전택이, 노경이 부부를 비롯해서 허장강, 김희갑, 박노식, 이집길, 황해, 이예춘, 김진규, 송해 등을 스타로 탄생시킨 몇 분의 영화인 가운데 한 분이라는 점에서 우리 고장의 보배임에 틀림없는 분이다. 지금도 X세대처럼 청바지를 즐겨입고 날 듯이 뛰어 다니는 분이라서 겉늙은 내 나이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후배에게 베풀어준 아름다운 추억 꼭 10년전 일이다. 현재 한화그룹 기획실에 다니는 내 아이가 원광대학에 시험보러 간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눈길이 수북하여 전주-익산간을 주행하기란 극히 어려운 모험인데도 폐차 직전의 포니 바퀴에 체인을 감지 않고 새벽 5시의 눈발길을 천천히 달려 입실 직전인 8시 50분에야 원광대학 정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는 아무 소리 없이 늦었다는 표정으로 입시를 포기한 모양이었는데 시간 맞춰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없이 줄달음쳐 달려갔다. 전주로 돌아오는 길에 커피 한 잔 나누면서 하는 탁광선배 왈 ‘이 사람아! 등골이 오싹해서 혼났네’하며 한숨을 내쉬는 탁선배의 얼굴에서 후배에게 안겨준 아름다운 또 하나의 추억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감사할 뿐이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탁선배의 「전북영화 이면사」에 축간사를 얹었던 이을 어줍잖은 일로 생각하지 안고 항상 고마운 마음을 쏟아 부었다고나 할까. 앞으로 올겨울 무지 구천동에서 개최될 한국영화의 큰 잔치인 대종상시상에 앞서 영화와는 거리가 멀어진 폐허나 다름없는 전북영화계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까 적이 염려스러운 차에 「이 사람의 세상살이」코너에 내가 이 고장 영화의 산 증인인 탁광 선배를 말하여 송구스럽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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