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 유산을 찾음은 타임머신을 타고 멋있게 순간을 날아 과거와의 신비한 만남을 갖는 것이라할까. 그냥 그렇게 존재해 왔던 것들이, 찾아 보듬고 의미를 부여하면 더욱 빛을 발하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문화 저널의 문화 유산을 찾는 기행에 솔깃한 마음이 빈번했지만 이제껏 난 아쉬움만 키워 왔다. 일상생활만으로도 버거워 하면서. 그러나 몽촌 토성, 풍납동 토성, 석촌동 고분으로 이어지는 일정은 명색이 역사교사인 나에게는 강한 의무감으로 다가왔다. 백제 초기의 존재를 확인할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 아내의 ‘우리 것 찾아보기 기행’에 기꺼이 응해 온 남편과 이제는 앞가림이 가능한 초등학교 3학년생과 일곱 살 바기 유치원생, 두 딸을 대동, 떠나자! 무조건. 5월24일 토요일 2시. 빠듯한 시간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이루어지는 학교 특별활동을 이번에는 유적지 답사 대신 비디오 관람으로 하고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2시를 조금 비껴 문화저널사에 도착했다. 옹기장이 이현배를 찾는 구수함도, 섬진강변 들꽃 여행의 여유로움도, 쪽빛을 향한 상큼함도 없으련만, 국사책, 역사 부도를 챙겨 온 여고생, 인생 여정 뒤 끝에 이제 여유를 찾은 노부부, 백제 기행 단골손님인 듯한 순창의 판소리(?) 선생님… 모두들 특별한 뜻이 있는 듯하다. 버스 전용 차선을 달리니 토요일이었지만 서울에 이르는데는 아무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올림픽 대로를 통해 서울을 빠져나가는 시간은 아이들의 귀여운 재재거림과 맑게 개인 하늘에도 불구하고 짜증이 더해지고 마음이 급해졌다. 둘 때 딸아이가 멀미가 나는지 머리가 아프고 답답하다 칭얼거린다. 겨우 서울을 빠져나와 파주 통일 동산에 이르면서 아이가 급기야 일을 내고 만다. 서울의 교통 체증을 토해 내듯. 수습을 하고 아이를 업고 가파르고 긴 층계를 올라가니 이미 주변은 어둠이 깔리고 가까이 보이는 북한땅도 땅거미에 밀려 있다. 결국 오두산성에 대한 윤교수님의 설명은 놓치고, 서둘러 점찍듯 기념 촬영을 한 뒤 금촌의 백운장 여관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늦은 밤 아이 둘을 데리고 강연장(?)에 들어서니 우리 일행 대부분이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니 자유 분방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6~7인용 여관방에 30여명이 모이고 그나마 침대가 자리 잡아 콩나물 시루 형상이나, 더한 불편이라도 감수할 듯 모두들 진지해 보였다. 슬라이드 상영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한국 토지 공사 문화재 조사팀장 심광주 선생님의 강연이 시작되었다. ‘한강 유역의 백제 문화’란 주제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백제인의 첫 근거지인 위례성에 집중돼 있었다. 삼국 시대 역사의 소용돌이가 거세던 한강 유역, 그래서 백제 초기 도읍지의 가닥 잡기가 어렵다 하는데, 그 위례성에 대해서는 기록도, 의견도 분분하다. “정약용은 온조의 도읍지는 동소문 밖의 한양동이고 그 후 천도지가 광주의 고읍인 춘궁리라 했다. 이로써 하북 위례성, 하남 위례성이 거론되어 왔는데 하남 위례성의 위치로는 몽촌 토성, 풍납 토성, 춘궁리 일대 등이 거론된다.” 우리가 내일 실체를 확인할 그곳들이다. 심선생님의 시공을 초월한 열강에도 불구하고 엄습해 오는 졸음을 어찌하랴. 귀신 중에 잠귀신이 있다면 이보다 더 집요한 귀신이 있을까? 잠시 자리를 정리한 후 이어진 도립 국악원 이항윤씨의 대금 연주는 우리 모두를 어느 아득한 산사로 옮겨 놓았다. 향내 그윽한, 부드러운 바람결에 잎새들 속삭이는 그 곳에서 우리 모두는 행복하였다. 지난 밤 열과 두통으로 몸살을 앓았던 딸아이가 급기야 새벽에 금촌 의료원 응급실을 다녀왔다. 오늘의 일정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아이가 웬만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동행할 준비를 서둘렀다. 지난 밤 우리 가족의 수선으로 잠을 설쳤을 민지네 가족은 일사분란. 준비 끝! 7시 45분 출발. 행주산성을 잠시 들른 후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밝고 아련한 아침 햇살을 뚫고 달리는 서울 거리는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조금은 이른 시간에 올림픽 공원에 도착했다. 거대한 체육관이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한켠에 몽촌 토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곳은 하남 위례성의 주도로 가장 유력시되는데 8천~1만 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면적이다. 쪄서 다진 점토를 쌓고 꼬쟁이로 다진 이른바 ‘판축공법’의 백제 토성은 산에 쌓여진 석성이 형태 없이 부서진 것에 비해 아주 견고하다. 작은 야산이 잇대어진 이 토성에서는 방어용 목책과 해자, 3~4C경의 수혈 주거지가 발견되고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아직은 왕도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한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발굴은 물 건너 간 것 아니냐는 아쉬움을 잔뜩 실은 질문에 심광주 선생님은 “그렇다. 현재로서는 원상태 보존이 최상이요, 발굴은 곧 파괴이기도 하다.”는 조금은 궁색한 답변을 한다. 몽촌 토성에서 가까운 석촌동은 적석총으로 인한 이름이라 한다. 미지의 세계로 향한 설렘과 기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몇 기의 돌무지 무덤들. 백제 건국 설화를 사실로 뒷받침하듯 고구려 초기 무덤 양식과 닮은꼴이다. 규모면에서 만주 집안의 장군총과 비견되는 3호분은 축조 시기로 보아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된다. 처음 학술조사를 한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석촌동에 석총 66기, 토총 23기가 있었다는데, 사실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이만큼 무지하고 무자비한 파괴가 있을까. 그러나 이제 옛날의 상처는 잊은 듯 초연한 모습은 여유와 넉넉함 그 자체였다. 중국과 일본으로 종횡무진했던 근초고왕도 위엄을 접어 둔 채 백제의 후예들을 조용히 맞이했다. 버스로 몇 분을 달려 우리는 좁은 골목을 형성된 시장통 몇 블록을 지나게 되었다. 계속된 강행군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아이들이 군침 돋구는 먹거리 통을 지나면서 심통을 낸다. 하지만 갈길이 바쁜 우리에게 아이들 투정 받침은 금물. 어찌하랴!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가자! 풍납통 토성을 향해. ‘문화 유산 파괴하는 아파트 재개발 반대!’ 프랑 카드 길게 늘어뜨려진 아파트 바로 인접하여 우리를 맞이한 것은 아파트 재개발로 땅이 파헤쳐진 건설 현장이었다. 고층 아파트 건설로 4m 아래로 파내려 가다 백제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 동안 백제 유적 보존이냐 서민들의 삶의 터전 보장이냐, 이에 더하여 기존 아파트 주민의 이해 관계가 엇갈려 갈등이 많았다 한다. “가봐야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 위험하다, 미리 연락이 없었다.”는 이유로 현장 접근은 저지 당하고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작은 언덕처럼 솟은 토성 쪽에 이르니 주변 지역 사람들이 이곳을 텃밭인 양 가꾸어 파며 솔이며 무심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여기 저기 널린 개똥을 겨우 피해 토성에 오르니 한서의 실체를 규명해 줄 백제의 보물창고는 실존의 생활 터전에 묻혀 모습을 드러낼 여지가 없었다. 그 동네 입구에서 자칭 쓰레기 방류를 막고 관리를 하고 있다는 아저씨 왈, “뭣하러들 왔샀소, 뭐 볼게 있다고. 아, 신문 기자며, 방송국에서 오면 뭣해, 뭣이 해결되나. 문제는 돈이야. 정부가 한 일은 몇 가구 이주시킨 일이지.” 최근 문화재 관리국이 청으로 승격된다는 보도를 접하며 달라질 문화 정책의 모습을 기대한다. 다음 행성지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특별한 학생들은 유물 발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기와며 토기 조각을 찾아 들고 의미를 부여하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왠 일일까. 우리의 다리품을 덜기 위해 차를 인도하러 가신 윤교수님은 함흥차사. 토성 밑에 죽 늘어서 있던 우리의 목은 한없이 길어만 가고 1시간이 지나고 또 30분이 지나는 동안 때를 넘긴 우리는 보통 보다 2배나 큰 뻥튀기로 그리도 달게 요기를 했다. 넉넉하게 생기신 어느 분의 베푸심으로. 드디어 버스 출현. 지순 지선의 표상처럼 보이는 우리의 윤덕향 교수님, 애를 태운 듯 잔뜩 상기되어 미안해하시는 모습에 누구 하나 탓하는 이 없이 우리는 암사동 선사 유적지로 향했다. 때는 이미 2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 조상의 숨결을 음미하려는 한결된 마음에 웬만한 불편은 저만치로 접어 두고 있다. 주최측의 매끄럽지 못한 진행에 대한 사과도 사족이리라.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은 이 곳은 조용히 포용된 과거가 아니라 어설프게 치장돼 오히려 어색한 만남처럼 느껴졌다. 늦어진 일정으로 서둘러 간 곳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이성 산성이다. 올림픽에 즈음하여 발굴된 이 곳은 ‘춘궁리’나 ‘궁촌 초등학교’ 등의 명칭에서 보이듯 궁성이 있었던 곳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대학 시절 직접 발굴 작업을 했다는 심광주 선생님은 감회가 새로운 듯 상기된 표정으로 지친 우리 일행에게 조금만 더 올라가 보자며 힘을 불어넣어 준다. 땀을 뿌리며 10여분을 오르니 천여년의 세월 속에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9개의 초석이 몇 겹으로 이어진 건물이었다. 궁궐터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지만 왕궁의 실증적인 흔적은 보이지 않고 중국 천단지가 9배수인 예로 이곳도 신앙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한다. 종일토록 찾아 헤맨 하남 위례성의 확증적 실체는 몽촌 토성, 풍납리 토성, 이성 산성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를 다 풀지 못한 답답함에 어지러운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딸아이는 노란 애기똥풀 꽃이 물감처럼 그림이 그려진다며 신이 났다. 무심함 아이야! 훗날 엄마따라 무심결에 다닌 오늘의 발자취를 문득 돌이키며, 백제를 다시 찾는 너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아이 손을 꼭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