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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 | [문화비평]
한국사회의 ‘장애’를 질타하는 이성재 의원
문화저널(2004-02-12 15:34:52)
“여름방학을 맞아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어제는 너무나 기막힌 장면을 목격했다. 어느 시각장애인 한 분이 백화점에 들어오려고 하다가 문 앞에서 장난치는 꼬마들 때문에 다칠 뻔했다. 그런데도 아이의 엄마는 사과 한 마디 하지않고 아이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갑자기 백화점 경비가 오더니 그분에게 다짜고짜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사과까지 하고 나갔다.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백화점에 들어오는 손님이 정상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아는 한분은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천시받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민을 갔다. 정말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일보 97년 7월 15일자에 실린 한 독자투고 내용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에도 놀랄 분이 별로 없을 게다. 그게 바로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정직한 수준이니까 말이다 드러내놓고 그 지경이니 속으로야 오죽할까? 그런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으로 김현철씨를 빼놓을 순 없겠다. 지금 구속돼 재판을 받는 사람의 칩를 다시 거론하는 게 가슴이 아프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훈으로 삼자는 대국적인 관점에서 이해를 구하고 싶다. 김씨는 이른바 메디슨 의혹사건과 관련하여 박경식씨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야당에서 폭로를 한다고 하는데 미친 새끼들 뭐 할 게 있다고.” “왜 그 야당에 이성재인가 절룩절룩하는 놈이 하나 있는 모양이죠. 그놈한테 그것이 들어갔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파보라고 그랬다고요.” 바로 그 문제의 ‘미친 새끼’이자 ‘절룩절룩하는 놈’은 다름아닌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성재 의원이다. 결코 김현철씨만을 탁할 일이 아니다. 김씨의 수준이 바로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우리 모두 그 점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그런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쓰는 이성재 의원의 활동에 주목해보자. 그러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새로운 결의를 다져보자. 이의원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사람ㄷ르은 우리 사회가, 아니 야당이 국회의 직능 대표의 한 부문으로 장애인을 인정해 그를 전국구의원으로 공천했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건 ‘기본’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건 이성재 의원이 우리 사회 절대다수 비장애인들의 정신적 장애에 도전해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1957년생인 이의원은 경신고와 경희대 법대를 거쳐 8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87년 장애인권익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인권투쟁에 나섰고 그 활도이 국민회의 야당의 주목을 받아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그 동안 그가 관여해서 입안한 법률로는 90년 장애인 고용 촉진 등에 관한 법, 91년 장애인 복지법(개정), 94년 특수교육진흥법(개정), 97년 장애인 노인 임산부를 위한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 등이 있으며 현재 사회복지상버법과 장애인을 위한 기본법 등을 추진중이다. 이의원의 탁월한 입법활동은 자신의 장애인으로서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또 바로 그 점이 비장애인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만 하더라도 이의원은 법 심사시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들면서 동료의원들에게 호소했다고 하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자. “다리가 불편했던 나는 중학생때 난간이 설치돼 잇지 않은 2층 탁구장에 올라가다 뒤로 넘어졌다. 땅으로 떨어지며 벽에 뒤통수를 부딪쳐 피를 흘렸다. 가파를 육교를 내려오다 앞으로 고꾸라진 적도 있다. 내 어깨뼈는 여지없이 부서졌다. 편의시설 설치여부가 신체의 위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비장애인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장애인 쪽에서 편의시설이 없는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때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자면 이제 장애인 복지는 일반인이 아닌 장애인의 ‘눈높이’에서 입안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본인의 이런 주장, 아니 본인의 옛날 이야기 한마디로 동료의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이의원은 동료의원들 또는 관련 공무원들에게 논리적인 설득이 먹히지 않을 때마다 “당신도 나처럼 40년 동안 목발 짚고 다녀봐라”하고 감성에 호소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호소가 더 잘 먹혀든다고 한다. 이건 우리 사회가 저지르고 있는 장애인 탄압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것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양심이 무디어져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이의원은 국회에 들어가서도 국회 사람들의 무디어진 양심을 회복시키는 데에 적잖은 공헌을 했다. 『말』지 96년 11월호는 이의원의 그런 활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이의원, 이의원과 마찬가지로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이동석 비서관이 지나다닐 때마다 장애인이 국회에 나타났다는 것이 꽤나 생소하다는 시선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의원이 국회안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국회내의 시각도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 ‘계단이 장애인들에게 정말 불편하겠어요.’라며 말을 건네오는 국회의원도 있고 이의원이 추진하고 있는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법’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사람, 각종 장애인 복지현안으로 종종 공청회가 열리는 국회 소회의실에 얼구을 내미는 국회의원 등이 하나둘 늘어났다. 장애인 동료의원이 겪는 불편함을 목격하면서 전혀 딴 세상 일처럼 여겼던 장애인 복지에 대한 관심이 국회안에서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 이의원이 국회에 입성하고 나서 ‘욕쟁이’ 국회위원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국회본회의 도중 어디선가 ‘이 병신같은 놈아!’라는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대번에 이의원의 눈초리가 그 ‘욕쟁이’의 얼굴을 행했고 이의원이 그 ‘욕쟁이’를 혼쭐내고 있는 동안 의사당 안은 무거운 적막감에 휩싸였다. 그 이후부터 사소한 논란에도 험구가 난무하던 본회장이 한결 ‘점잖아졌음’은 물론이다.” 이의원의 그런 활약을 지켜보면서 장애인 차별을 척결할 수 있는 한가지 비법을 떠올리게 된다 그간 우리의 장애인 차별척결운동은 힘없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힘있는 사람들에게 애원을 하는 그런 게 아니었을까? 만약 국회에 이의원과 같은 장애의원들이 여러명 진출한다면 장애인 복지는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장애인이 차별받는 이유도 그들에게 권력이든 금력이든 힘이 없기 때문 아닐까? 이의원의 생각도 그러하다. “장애인들은 장애 때문에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어서 차별을 받는거죠. 장애인은 곧 무능력자라는 사회적 인식이 왜 만들어졌습니까? 장애 자녀를 일반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려고 하면 부모들이 결사반대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처럼 정규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취업도 안되죠. 팔이나 다리 하나 없는 장애인들을 무슨 괴물보듯 하니…결국 이 사회구조가 장애인을 무능력자로 만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 이의원의 말처럼 장애라는 것은 그 자체가 극복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극복해야할 대상은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 일반의 시각이며 그런 잘못된 시각에 따라 형성된 우리 사회의 장애인 차별구조일 것이다. 자애인 차별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분노만 삭일 게 아니라 일단 이의원에게 힘을 몰아주자. 그리고 다음 총선에서 적어도 10명이 넘는 장애인을 국회에 진출시키자. 그건 비단 장애인만을 위한 게 아니다. 모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것이다. 장애인 차별, 여성차별, 특정지역 차별 등 모든 차별은 한 통속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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