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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 | [세대횡단 문화읽기]
애국가 제정운동과 악대강화
문화저널(2004-02-12 15:36:06)
1894년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비록 좌절되었을지라도 음악사적으로는 봉건적 음악사회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민족음악사회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분수령의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음악·춤 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족쇄였던 천민으로서의 신분제를 철폐시켰다는 것이 비록 형식일지라도 한국음악 역사상 처음 있는 커다란 변화였다. 또 음악·춤 예술인들이 국내외적으로 변화되는 사회에 대응하려는 새로운 홀로서기의 계기가 모두 갑오농민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예술인들은 1894년 독립협회 운동에 협조하거나 1898년 만민공동회 운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고, 그것은 곧 독립과 민권운동을 신장시키는 줄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줄기에서 애국가 제정운동이 전개되고, 이후 근대적인 사설 예술단체를 조직하면서 한국 음악사회를 주도할 뿐만 아니라 외래음악조차 수용시켜 나갔다. 그러나 정부는 내각제 이념의 도입이나 과거제도 폐지, 근대적인 각종 학교설립, 각종 신문발행 인가, 중앙집권적 조세제도 수립, 지주제를 강화한 토지제도 등 광무개혁에서 보듯 국왕의 전제권력하에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였다. 왕권 강화는 대한제국이 선포되는 1897년에 서양식 군제개편에서 악대(군악대, 곡호대 등)가 강화되는 점에서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서양음악은 새음악으로, 전통음악은 낡은 음악’이 국민들에게 심어지고, 그로써 전통문화가 근대화의 걸림돌로 매도되고 서양음악이 힘의 원천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애국가 부르기 운동과 애국가 제정운동 애국가 제정운동은 먼저 독립운동과 민권운동을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전개한 독립협회에 광범위한 계층들이 참여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곧 ‘애국가’는 <애국가>, <독립가>, <애국독립가>, <자주독립가>, <자주독립 애국하는 노래>뿐만 아니라 <독립문가>, <동심가>, <애민가>, <성몽가>, <성절송축가>, <대군주 폐하 탄신 경축가> 등도 모두 애국가로 불려졌다. 학생, 주사, 기사, 군인, 예수교인, 유생들이 때마침 1896년에 간행한 독립신문에 가사를 만들어 게재하고 각종 집회가 있을 때마다 노래를 불러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애국가들은 독립신문으로만 대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갑오개혁으로 인가된 많은 학교의 학도들과 무관학교 학도에 의해서도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애국가 부르기 운동’의 역사성은 독립과 민권운동을 내용으로 삼고 민요나 서양식 찬미가에 얹히는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로서, 여러 계층들이 노래를 운동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 있다. 민요의 노가바는 한국인들의 오랜 전통으로서 가사만 주어지면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거나 즉흥적으로 창작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전의 노래운동과 달랐던 점은 그 내용이 독립과 민권을 축으로 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을 전 계층으로 반영시킨 점이다. 독립문 정초식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원생들이 <조선가>와 <독립가>와 <진보가>를 불렀으며 다른 학원생들도 이 <애국가>란 이름으로 불렀다. 수만명이 모일 때에도 <애국가>를 불렀으며 (독립신문 1898년 8월 24일자),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린 민중대회에서도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및 관립공립소학교 학도들이 <애국가>·<경축가>·<독립가>·<찬미가>·<군가> 등을 불렀다. 수만은 집회때마다 노래는 살아있었고 그 의식적 운동은 독립과 민권사상을 빛내는 요체이었다. 학도들이 불렀던 대부분의 노래는 서양의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나 다른 서양식 ‘찬미가’를 ‘노가바’한 것들이었다. 즉, 미국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의 학원생들에게 찬미가가 점차 자연스러웠듯이 서양음악(양악)이 노가바를 통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또 서양식 군제개편을 단행한 군대에서도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내용으로 한 ‘군가’가 서양식·일본식으로 일반화되고 있었다. 물론 전통음악과 양악은 이 시기에 혼재되어 가고 있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도 취고수나 세악수들의 취타와 같은 전통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장례원 협률과(장악원 후신)가 <여민락>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을 주도했던 학도들의 애국가와 서양식 악대인 정부의 ‘친위대’와 ‘곡호대’의 서양식 행진음악과 무관학교 학도들의 ‘군가’는 서양식 음악이었다. 말할 나위없이 한국전통음악이 군대나 학교에 체계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노래들의 가사와 의미가 중요하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양악이 자리잡을 수가 있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움켜잡았다. 양식이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자각운동은 20세기 전반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우리 생각에는 조선정부 학교에서들 국기를 학교 마당 앞에 하나씩 세워 매일 학도들이 그 국기 앞에 모여 경례하고 애국가 하나를 지어 각 학교에서 이 노래를 아침마다 다른 공부하기 전에 여럿이 부르게 하고… 이런 노래는 학부(學部)에서 위원을 정하여 하나를 율(律)에 맞게 만들어 외국사람을 청하여 몇날 동안 교원들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 후 그 교원들이 자기 학교들에 돌아가 학도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학문상에 대단히 유조한 일이요… 학부제공들은 이 일을 생각하여 각 학교에서 매일 학도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주선하여 주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바라노라. (1896년 9월 22일자) 이처럼 이 시기는 오늘날의 교육부랄 수 있는 학부에 ‘국가(國歌)제정위원회’를 설치하여 ‘율에 맞춰 작곡’하고 이를 위해서 외국음악인을 초빙하여 각급 학교 교언들을 먼저 가르쳤다. 이들이 돌아가 ‘조선백성들이 나라사랑’하는 실제적 방법으로써 국가제정을 촉구하고, 애국가 부르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으며, 마침내 정부로 하여금 ‘국가제정’을 이끌어냈다. 1902년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애국가’를 제정·공포하였다. 1860년대의 노래운동이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애국가 부르기 운동과 애국가 제정운동으로 이어졌고 이 역사적 전통은 1904년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그리고 일제하 항일노래운동으로 전개되어 해방과 함께 노래운동의 정점을 이루었으며 80년대 또다시 찬연히 빛나는 산맥을 이루었다. 정부의 악대강화와 애국가 제정 1897년 10월 ‘대한제국’ 성립을 선포하고 개혁을 단행한 정부조치중 가장 돋보인 부분이 서양식 군제개편이었다. 서울 방비와 국왕을 호위·강화하는 친위대나 시위대 등과 지방의 진위대 설치가 그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곡호수나 세악수가 대취타 등의 행진음악을 전래적으로 편성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서양식 나팔과 서양식 북이 편성되어 서양음악이 울려퍼지는 ‘군악대와 곡호대’가 편제된 것이다. ‘군악대’와 ‘곡호대’는 그 이름부터 차별성이 있었다. 오직 국왕의 왕실 악대만이 붙혀질 수 있는 이름이 ‘군악대’였다. 다른 군대에 ‘군악대’라는 이름을 함부로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당시는 아주 뚜렷하게 구분하였다. 또 ‘군악대’는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 요즈음의 학교악대와 같은 편성으로 이루어졌지만, ‘곡호대’는 서양식 나팔과 북으로 이루어졌음을 주목해야겠다. 1881년부터 개화당에서 이은돌을 일본군악대에 유학을 보내 서양음악가인 다그롱으로부터 코오넷과 트럼펫, 그리고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오게 하여 한국악대를 발전시키려 했던 꿈은 왕권을 강화시킴으로써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대내외에 천명하려는 정부의 군대확장정책과 맞물려 이처럼 악대의 발전을 가져왔다. 정부는 1901년 2월에 군악대와 전국의 곡호대를 훈련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악대지도자(당시 용어로 군악교사)를 초빙하였다.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ekert, 1862~1916)가 그 사람이다. 그는 시위연대 군악대 ‘군악교사’로 초빙되었다. 군악교사는 조선시대 과거급제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위용을 상징하는 빛나는 위치였으므로 조선시대 과거급제한 당상관이 맡았다. 장악원 ‘제조’와 같았지만 대한제국의 시대적 상황으로 ‘제조’보다 높은 자리였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독일 드레스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프러시아 군악대 악장 겸 군악교사로 근무한데 이어 1897년 일본 해군군악대 교사로 들어온 이래 일본 국가(國歌)인 <키미 가요>(軍力代)를 편곡·초연한 바 있거니와, 1899년 임기 만료되어 독일로 귀국, 프러시아 왕실악장으로 근무하고 잇다가 1901년 또 다시 대한제국의 군악교사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에케르트 군악교사 초빙으로 악대 제2증강기에 돌입하여, 처음으로 악대보강과 악대훈련을 외국 전문음악인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또 백우용이나 정사인 같은 악대지도자들을 양성하였을 뿐 아니라 드디어 1902년 8월 15일 <대한제국 국가>를 한국아악풍의 노래와 악대곡으로 작곡, 처음으로 공식화하였으며 수많은 악대원들이 1907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해체되었을 때 학교 창가교사로 진출하게 하여 애국계몽기의 노래운동을 주도케한 공헌을 하였다. <대한제국 국가>는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금지곡이 되었지만 비밀스럽게 불리워진 애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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