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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문화칼럼]
기업과 문화의 밀월 ·안홍엽
안홍엽 (2004-02-12 15:40:52)
유동근의 와이셔츠 칼라가 패션가 화제로 등장하고 최명길의 날카로운 콧날이 퍼스트 fp이드 후보자들의 보기가 되고 있는 오늘날 세상은 꽤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유동근과 최명길, 그들은 본래 연극인이었고 연극학교의 아카데미 코스를 거쳐 서울예전에서 연극수업을 한 정통파들이다. 6.25동란을 통하여 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본 미국의 한 문화재단이 먼 앞날 한국인의 정신적 복원을 위하여 계획한 것이 바로 62년의 남산 드라마센터이다. 450석의 객석을 마련하고 연극학교 창설을 추진했던 故 유치진씨의 업적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맥을 이어 유동근, 최명길 등이 오늘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록펠러재단의 한국문화지원 계획은 이렇게 그 씨앗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록펠러, 그는 누구인가? 미국에서 억만장자라는 용어가 록펠러로부터 비롯되다시피 했고 부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물질적·정신적 지도력을 겸비한 미국의 자존심이다. 미국의 최고 문화공간으로서 세계적인 음악교육의 본산 줄리아드 음악학교가 잇는 링컨센터, 500년 뒤의 미국문화를 위하여 190년대 록펠러 재단이 세운 문화시설이다. 문화를 통하여 기업의 생명력을 가지려 했던 그 발상에 대하여 끝없는 경의와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천억원을 들여 미술관 건립을 서두르고 서울의 한복판에 아트홀을 운영하고 잇는 삼성문화재단, 전북에는 한푼의 산업투자는 하지 않았지만 70억원을 들여 예술회관을 만들어주는 성의를 보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성의를 보면서 희비를 엇갈리게 하는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는 것도 그 진의를 알 길이 없다. 물질적 풍요가 곧 정신적 풍요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 가야할 방법도 해답이 보일 듯 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록펠러같은 분을 함께하지 못하고 있을까? 오늘날의 기업현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극적으로 급진적으로, 근본적으로 혁신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절박한 현실 앞에 기업들은 살벌한 분위기를 스스럼없이 연출하고 있다. 평생직장개념은 해묵은 경제사전에서나 찾게 되었고 몸값을 올리기 위하여 직장을 그만두고 MBA수학차 미국행을 단행하는가 하면 영어와 컴퓨터 선수가 되기 위해 밤을 지세우는 젊은이가 늘어나고 있다. 세계화의 열풍에 휘말려 토익점수가 낮으면 승진대상에서도 제외되고 근무 부서의 선택에서도 불이익을 받게 되니 그렇게 할 수 밖에는 없다. 서글픈 현실이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위기일까? 아니면 기업문화의 쇠락일까? 어쨌든 정신적인 황폐화 현상이고 기업과 문화의 배타적 갈등의 촉진이다. 록펠러도 이러한 비극적 상황을 예견하면서 500년 뒤의 미국문화를 설계해 두었을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무엇에 쫓기듯 바쁜 모습으로 변했다. “꽃꺽어 수 놓고 한잔 한잔 또 한잔”이라던가. “나 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어떠하리” 등 여유와 자족은 간 곳이 없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는 철야작업 현장을 국왕까지 구경을 나왔었고 도로에 차들을 보면 뒤에서 적군이 추격이라도 하는지 전쟁터를 방불케한다. 이런일 저런일 덕분에 국민소득이 만달러를 넘었고 소련사람, 중국사람들 앞에서 으시댈 수 있을 만큼 잘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죽으려면 마음이 변한다고 은근과 끈기, 여유와 낭만, 그러한 본래 우리의 미덕들을 찾아서 오래토록 우리를 지키고 나가는데도 바쁜 마음이 배려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몇가지 경우를 생각하면서 중대한 갈등을 느끼게 된다. 급진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기업현실과 은근과 끈기를 바탕으로 정신적인 여유를 구체화해야 되는 문화의 속성과를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기업과 문화의 밀월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영원히 풀지 못하는 함수 관계인가? 이 시대에 우리는 록펠러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기업문화를 생각하게 된다. 모든 조직마다에는 그 특유의 문화가 있기 마련인 것처럼 기업도 기업마다 그 특유의 문화가 있다. 기업문화는 그 형태나 내용은 다를지라도 반드시 하나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중심되는 정신, 곧 혼이 있어야 한다. 요즘 소설 혼불이 대단한 화제거리가 되고 있지만 혼불이 나가면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고 한다. 창조주가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그대로 놓아두었어도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대로 두었으면 그것은 그냥 흙이었을 뿐이고 그 속에 혼을 불어 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가정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사현장에 붙어있는 “혼을 담은 시공”, 하찮은 공사에도 혼을 담지 않으면 성수대교가 되고 무너진 아파트가 되기 마련일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표현이 나올 수 있다. 적절한 예화라고 생각되지만 교회를 짓기 위하여 돌을 다듬고 있는 세 사람의 석공이야기는 유명하다. 한사람은 “돌을 깎을 뿐”이라고, 한사람은“하느님의 집을 짓기 위해서”라고, 한사람은“예술품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이렇게 각각 표현이 다른 것처럼 형태는 같을 수 없지만 혼이 빠지고 기본이 망각된 기업문화는 있을 수 없다. 기업이 문화에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록펠러가 한국에 드라마센터를 세웠던 뜻으로, 일본이 미래의 어린이 문화를 위하여 광고를 만드는 것처럼 미래에 거는 희망과 의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이 문화에 투자하는 것을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한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기업현실로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매출의 일정한 비율을 의무적으로 문화사업에 투자하도록 제도화하는 대신 그 부분에 대해서는 투자이상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업현실이 어렵더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기업과 문화의 밀월은 가능하리라고 본다. 이러한 풍토가 조성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문화사업에 투자를 강요하는 이른바 문화매체나 문화단체의 입장에도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학적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기업과 문화의 함수관계는 문화적인 토양으로 풀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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