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8 | [문화저널]
신데렐라는 없다·김선남
김선남
(2004-02-12 15:46:01)
신데렐라 열풍 속에서
얼마 전 막내린 주말극 <신데렐라>의 열풍이 만만치 않았다. 그 열풍 또한 흥미진진하였다. 이 드라마는 몇 주 동안의 시청률에서도 단연코 1위였다.
이 드라마는 최근에 벌어지는 정치판의 용들의 한판 승부와 맞물려 뜨겁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어떤 여자가 신분 상승의 티켓을 거머쥘 것인가로 사람들은 흥분했었다.
아무튼 현실에서든 허구의 세계에서든, 성공 혹은 신분 상승에 대한 에피소드가 최고의 관심거리임은 분명하다.
<신데렐라>는 재미있었다. 아무리 방송위원회나 여성단체에서, 또 도덕군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입을 모아 “비윤리적이고 선정적이어서 안방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비난했지만, 이 드라마의 여운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왜 우리 상식을 벗어난 드라마가 그같은 열풍을 몰고 왔는가? ‘신데렐라 열풍’에 묻혀 있는 우리 시대의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벗겨보자.
드라마 <신데렐라>속의 신데렐라
분명히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우리 사회의 상식 지수를 훨씬 뛰어넘는 등장 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로 진행되었다. 이런 특이한 구도는 여성을 철저히 성역할 고정관념 속에 묶어두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여성상이었다. 즉 사악하고 이기적이며 변덕스런 교활한 여자 對 얌전하고 유순한 현모양처형의 여자.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여성상은 선과 악의 이항대립 개념으로 강화되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이중적 삶을 사는 통속적인 관계로 엮어졌다. 반면 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남성들은 사회적 파워를 구비한 존재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들은 이성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또한 완벽하게 여성을 보호하는 젠틀맨이었다.
그 동안의 전통적인 드라마가 그랬듯이, 이 드라마 역시 ‘어떤 여성이 남성의 품에 안기게 되는가? 또 어떤 유형의 여성이 행복하게 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면서 그 해답으로, ‘남성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보다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을 선택한다’, ‘자아실현에 치중하는 여성보다는 가정 지향적인 여성이 궁극적인 행복을 거머쥔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전문직 여성의 ‘무가치성’을 교묘히 포장하였다. 예컨대 이것은 “여성이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해도 현모양처보다는 행복할 수 없다”는 논리를 통해서 여성의 사회적 열망을 삭이게 하였다.
여주인공 혜진(황신혜 분)은 왜 수년간 쌓아온 재능과 능력을 재벌2세와의 결혼과 바꾸려 했는가? 왜 자아실현에 대한 특별한 의지도 노력도 없는 혜원(이승연 분)이 남성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결국 이 구도를 통해서 우리는 이 드라마에서 아직도 여전히 남성은 가부장적 지서 속에 편입된 여성을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드라마 속의 서준석(김승호 분)은 혜진에게 “나는 당신의 무한한 성공욕구를 감당할 만한 힘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여성다움이 여성의 우선적인 조건임을 내세웠다.
이렇듯 <신데렐라>는 뒤틀린 여성상을 마음껏 찬양하였다. 이런 류의 드라마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엄청난 해를 끼침은 분명하다.
‘한번 귀족은 영원한 귀족’인 사회
솔직히 말해서, 필자도 언제나 신데렐라를 꿈꾼다. 어느 날 갑자기 백마탄 왕자품에 안기는 인생을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이러한 인생을 거부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물론 신데렐라는 한마디로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여성상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누가 신데렐라가 되는가가 아니다. 문제는 바로 왜 신데렐라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누가 신데렐라를 만드는가이다. 좀더 확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정말 우리 사회에서는 신데렐라의 탄생이 가능한가이다.
우리 현실을 보자. 여성의 성공이나 신분상승의 기회는 얼마나 열려져 잇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성공이나 신분상승을 위한 여성을 노력은 어느 만큼 수용되는가?
이것의 대답은 아주 회의적이다. 실제로 이 사회에서 성공(신분상승)할 수 있는 여성의 기회란 거의 제한되어 있으며, 또 그것을 위한 여성의 노력에 대한 평가 역시 최악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신데렐라가 있다’란 말이 허구이며, 또 이 말에 깔려 있는 성차별 이데올로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날마다 텔레비전은 신분상승할 수 있다고 떠들어낸다. 텔레비전은 은연중에 ‘보통사람도 열심히 노려하면 성공(신분상승)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까?’라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종국에는 신분상승의 불가능함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한다.
엄밀히 말하면, 신데렐라는 하나의 허위의식인 셈이다. 즉 지배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하나의 보수적인 틀일 뿐이다. 좀더 여성학적으로 살피자. 신데렐라의 허위의식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한, 여성들은 자신의 무한한 창의성과 의욕의 개발보다는 타인의 의존으로부터 얻는 안정감과 만족감에 인생을 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성 스스로 ‘성공한 삶’보다는 ‘여자로서의 행복한 삶’에 비중을 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상의 신데렐라 기제가 바로 여성억압 기제인 셈이다.
다시 생각해 보자.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평범한 교육과 사회적 매너, 지위를 얻은 여성들이 어떻게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겠는가?
드라마 <신데렐라>에서 혜진이나 혜원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왜? 애당초 우리 사회는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실제로 드라마의 최종회에서 그들은 제주도로,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행복이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흥미거리는, 바로 여성의 신분상승(신데렐라를 꿈꾸든 지간에)이 불가능함이 원인을 개인적 차원으로 돌렸다는 데 있다.
드라마 <신데렐라>를 보자. 우리 사회에서 보통사람(특히 여성)의 성공이란 없음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신데렐라가 될 수 있다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여 노력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보통 집안의 출신인 혜진은 신데렐라라는 허위의식 속에서 성공을 위해 매진한다. 그러나 그녀는 사악하고 비윤리적인 행동과 성격을 가져 결국 버림받는다. 여기에서 드라마가 보통 사람의 신분상승(성공)의 불가능의 원인을 사회 구조의 틀이 아니라 바로 개개인의 왜곡된 성격에 부과하고 있음을 주목하자.
그러면서 드라마는 시종일관 ‘마음이 착하고 현모양처형이어야 사랑받고 행복할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은 결국 불행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강화할 뿐이다.
결국 ‘신데렐라의 가능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에는 신분상승의 기회’가 없음을 교묘히 은폐하는 하나의 기제일 뿐이다.
어쨌든 드라마 <신데렐라>는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서 신데렐라라는 허위의식을 깊이 수용하고, 나아가서 여성의 자립심이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내방치고 이 사회(남성지배적인)가 원하는 여성으로 거듭날지 모른다. 분명 이것은 여성들에게는 상당한 해악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왜? 이것은 우리의 성차별 현실을 충분히 드러내고 의제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드라마 속의 혜진의 ‘몰락’과, 영국에서 벌어진 다이애나의 ‘귀족탈퇴’가 서로 무관치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데렐라 만들기’에 신경써야 한다. 왜? 언젠가 이 신데렐라들이 고착된 이 사회구조를 무너뜨릴 마지막 희망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