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세대횡단 문화읽기]
고려땅에 세워진 첫 번째 백제계석탑·천득염
천득염
(2004-02-12 16:00:23)
충남 서천군 비인리에 있는 비인오층석탑은 보물 224호로 지정되어 잇다. 현재 3층까지 완존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추정되는 탑재(塔材)가 있으며 다시 그 위에 노반석이 있다. 현재 높이 6.2미터에 이른다. 그 건립연대는 고래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 중에서 제일 앞선 탑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11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탑의 건립년대를 11세기 초로 추정하고 싶다. 우선 10세기 말이나 11세기 초에 세워져 건립년대가 명문으로 발견되어 절대년대가 밝혀진 석탑과 비교해 본 결과와 고려초의 정치사회적 시대상과 연계시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 탑은 백제시대의 석탑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석탑중에서도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충실하게 모방하고 있다. 석탑의 구조는 일반석탑의 모습에 따라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을 받치고 있는 지대석은 여러개의 장대석으로 결구하여 2단을 이루고 있으나 현재는 6매로 구성된 상층의 기단하대만 보이고 그 밑은 매몰되어 보이지 않는다.
단층기단은 4매석으로 구성도니 저석 위에 놓여 있는데 네모서리에 방형의 돌기둥을 1개씩 세우고 그 사이에 면석을 별석으로 끼워넣었으며 기단중석은 전체 8매석으로 조립하였다. 이들 네모서리의 네모기둥에는 약간의 민흘림이 있어 전체의 형태가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위에 갑석은 4매의 판석을 결구한 것인데 하면에는 부연이 없고 윗면에도 괴임대나 몰딩 등의 조식이 없이 직접 갑석이 탑신부를 떠받치고 있다.
각층의 탑신 위에는 옥개받침이라고 할 수 있는 높직한 2단의 부재가 놓여 있는데 1층의 경우 하단은 4매석으로 각형판석받침을 만들고 상단도 역시 4매판석으로 되었으나 각진 부분을 말각하여 경사를 둔 모양의 부재를 얹어 이른바 각형받침과 사릉형받침의 형식을 지닌 정림사지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이 옥개받침의 구조형식 역시 상층부로 올라가면서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상륜부는 완전치 않고 노반과 복발을 단일석에 함께 마련하였는데 이 방법 또한 정림사지석탑과 같다. 그러나 3층 옥개석 위에 있는 석재들은 4층의 탑신인지, 노반인지 판단키 어려우며 특히 5층 옥개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도 옥개석인지 방형보개(方形寶蓋)인지 판단키 어렵다. 이 탑의 층수에 관하여는 최근에 3층이라는 주장이 있어 앞으로 논란거리가 될 것이다.
비인오층석탑의 축조형식을 보면 이 탑의 기단은 단층기단으로 지대석 위에 저석을 놓고 그 위에 사우주와 1면1간의 판벽으로 짜인 중석을 구성하였으며 전자형으로 짜인 갑석을 덮었다. 이러한 형식은 정림사지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 하겠으나 이는 결구방법상의 유사함이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 탑의 탑신부 역시 정림사지석탑의 탑신부의 구성형식을 충실히 모방하였으나 현재 상층부가 완전치 않고 일부 결실되거나 후세에 변형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이 탑은 건립위치나 구성형식에 있어서 흔히들 가장 충실히 백제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기단의 협소함과 2층 이상 탑신들의 지나친 감축, 탑신에 대하여 옥개석이 상대적으로 큰점, 시각적인 안정감은 있으나 미적 감흥을 일으키는 비례감의 상실, 정림사지석탑으로 이루어진 규범을 지키려고 애를 썼으나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간략화 되어가는 경향, 옥개받침이나 탑신괴임의 타부재에 대한 상대적인 과대함 등에서 이 탑이 갖는 조형의 장적 가치는 다소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옥개석이 주는 부드러운 곡선이나 날렵한 반전, 경쾌한 분위기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 중 빼어난 수작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 탑의 건립연대를 필자는 백제계 석탑 중 가장 빠른 고려 초반기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탑과 가장 유사한 것은 계룡산 남매탑 중 5층탑으로 거의 모든 부분이 일치한다. 다만 이들 탑중에서 어느 것이 선행하느냐가 미해결의 문제로 남는다.
또한 이 탑은 일제시대 이래로 현재까지 5층석탑으로 불려왔는데 최근에 3층이라는 주장(홍재선, 「백제계석탑의 연구」)이 있고 필자도 그 의견에 찬동한다. 필자가 최상층까지 올라가보고 확인실측한 바에 의하면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3층으로 추정된다.
첫째, 옥개석의 체감비가 백제계석탑 중 어느 탑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즉 1층 옥개석 폭에 대한 5층 옥개석 폭의 비가 32%정도로 정림사지석탑 55%, 왕궁리 석탑 65% 등에 비하면 너무나 체감율이 급격하다. 따라서 현재 5층 옥개석으로 지칭되고 잇는 옥개석은 후대에 변화된 것이거나 타부재를 첨가한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 1, 2, 3층 옥개석에는 풍경구멍이 있으나 맨위의 옥개석에는 풍경구멍이 없다. 맨위에 있는 석재가 동일석탑의 옥개서이라면 당연히 풍경구멍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방형석재는 오히려 방형보개이든지 아니면 타석탑의 옥개석일 것이다.
셋째, 3층 옥개석 최정상면이 45센티미터이고 최상층 옥개석 최정상면이 18센티미터로 그 차이가 너무 심하고 그 상부에 노반석을 비롯한 상윤부를 얹어 놓을 여유가 없다.
넷째, 3층 탑신의 폭과 4층 탑신의 폭이 모두 60센티미터 내외로 거의 일치한다. 이들 두 부재가 각기 동일한 석탑의 상하층을 이루는 탑신석이라면 당연히 크기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최상층에 있는 탑신형 부재가 본 석탑의 부재라면 탑신괴임과 옥개받침들이 있어야 할텐데 이들이 없고 오히려 탑신의 최상부에 옥개받침 모양과 같은 모습이 붙어 있어서 더욱 의심스럽다.
여섯째, 기단과 3층까지는 모두 같은 석재이나 3층 옥개석 위 부분에 있는 석재는 아래층에 비하여 검은 점이 많은 석재로 서로 다르다. 동일한 석재의 부재들은 대부분 석질이 서로 같다.
따라서 상기한 몇 가지 논거로 보아 본 석탑은 후대에 타석재를 최상층부에 얹어 원래의 모습을 잃었으며 그 까닭에 5층으로 불려왔다고 생각된다. 특히 3층 옥개석 위에다 최상부에 있는 노반 및 복발이 단일석으로 조각되어 있는 부재를 얹으면 그 비례가 적당하게 되므로 3층 옥개석과 최정상의 복발 노반석 사이의 부재들은 타석탑의 부재일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