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사람과사람]
누가 그를 ‘깝깝하다’ 하는가·원도연
원도연
(2004-02-12 16:00:59)
솔직히 말해서 그는 좀 ‘깝깝한’ 사람이다. 몇차례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면서 사실 나는 내 인내심을 테스트 받는 기분이었다. 우선 그는 생김새부터가 이렇다할 특징이 없다. 거기에 일단 말을 한 번 시작하면 그는 상당한 장광설에다 시종일관 억양의 변화조차 없고, 게다가 80년대 학번답게 결론은 늘 계몽적이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불편해하기도 하고 껄끄러워 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선뜻 ‘그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서 늘 매고 다니는 큼직한 가방 속에는 카메라와 녹음기 그리고 VTR 따위가 들어있어 환경이 훼손되는 현장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늘 기록으로 남겨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어낸다. 길거리를 걸어다니면서는 담배꽁초나 휴지 따위를 무심코버리는 사람들을 훈계하면서 염치없게 만들고, 틈만 나면 그것들을 줍고 다닌다. 그런 그에게 길거리의 고통경찰도 어김없이 걸려든다. 그의 단속에 걸린 거리의 경찰은 염치없는 웃음으로 자리를 모면하지만 그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답사여행이나 캠프를 가서는 캠프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김없이 쓰레기들과 씨름하고, 그 때문에 출발시간을 지체하기 일쑤여서 일행들의 눈총을 받지만 누구도 화를 내지 못한다. 어쩌다 길거리에서 얻어마신 음료수캔은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사무실의 분리수거함으로 어김없이 분리된다.
그는 등산길에서조차 산길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산에 오르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 한참을 쉬고 앉아 있으면 쓰레기를 짊어지고 나타나는 그에게 도대체 뭐라고 할 것인가? 나 역시 그를 동행 취재하면서 길거리에서 한 대 피워문 담배꽁초를 30분 이상 들고 다니면서 그의 위력을 새삼 실감해야 했다.
그이 공식직함은 전북환경운동연합 정책실 차장. 순창 태생의 올해 나이 서른 두 살로 이제 노총각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아직껏 연애사건 한번 기록해보지 못한 보증할 수 있는 숫총각이다. 전북환경운동연합에 들어온지 이제 만 3년. 그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로서는 조금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내가 여기서 특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시민운동단체의 활동가로서 그의 살아온 궤적이 너무나 평범하고 일반적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의 살아온 이력은 꽤 우왕좌왕했던 것 같지만 지금 그의 삶과 생각들에 비추어 볼 때 사실은 그만큼 변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유지해온 사람도 흔치 않다.
그는 흔히 말하는 80년대의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괴짜도 아니었다. 스스로가 고백하듯이 그의 고등학교 , 대학교 또 대학원 시절까지 그는 거의 평범함의 연속이었다. 동암고를 졸업하고 점수에 맞춰 전북대학교의 기계공학과에 진학한 것과 2학년 시절부터 과학기술원을 목표로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면서 그는 그저 열심히 공부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80년대는 범상치않은 느낌으로 전해져왔다. 그가 사회를 인식하고 어렴풋하게나마 저항의 의미를 깨달았던 계기도 밋밋하기 짝이 없다. 그는 대학 2학년때 전북대 김의수 교수의 철학강의를 들으면서 비로소 그가 살고 있는 나라와 사회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면서 그는 조금씩 변화했다. 그 시절에 시위현장이나 이런저런 동아리의 선배들이 아닌 학교의 정규강의를 통해서 사회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참 그다운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어쨋든 그는 그때부터 소극적이나마 사회참여를 시작하게 된다. 거리를 지나다 시위현장을 만나면 그 대열에 합류하기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성의있게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는 이른바 폭력적인 시위에는 스스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보내던 그에게 마침내 그의 인생이 바뀌는 계기가 주어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계기는 좌절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3년여를 공들여왔던 과기원으로의 대학원 시험에 떨어지고 그는 다시 전주에 눌러 앉아 본교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것도 그 즈음이었고 그곳에서도 그는 썩 훌륭한 대학원 생활을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런저런 사정에 떠밀리면서 자신이 원했던 전공분야를 선택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연구자로서의 비전에 상당한 상처를 남겼다. 자시의 공부에 이렇다할 충족감을 얻지 못한채로 석사과정을 마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남들보다 한학기 늦게 석사논문을 마쳤지만 그 시기의 공부가 연구자로서의 길로 그를 이끌지는 못했다. 또 대학원 시절 그에게도 주어졌던 여러차례의 병역특례 기회를 거듭 양보(?)했던 그는 석사논문을 마치자마자 늦은 나이로 군에 정상적으로 입대해야 했다. 논문을 쓰는 과정이나 군대에 가는 일에 있어서도 어쩌면 그의 결벽증 비슷한 성격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어쨌든 대학에 몸담았던 그의 젊은 시절은 군에 입대하면서 이제 한 획을 그었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그는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대학시절 어깨너머로 견문했던 80년대 학번의 운명적인 숙제들은 오히려 대학원시절에 접어들면서 좀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아직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공학도로서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고민 속에서 그는 이른바 과학기술자운동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고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과 자료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조금씩은 특별한 인생을 준비해가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인생을 직접적으로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91년 무렵 전주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샛길청년회와의 만남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어느 날 선배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잇는 샛길청년회의 소식지를 접하고 나서 그는 곧바로 샛길청년회를 찾아갔다. 샛길청년회에 나가면서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성실함과 끈기에 있어서는 한몫하던 그는 그 모임에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그곳에는 그는 자신이 할 수 잇는 일을 두 가지로 선택했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환경문제가 그것이었다. 그 자신 공학도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알게 모르게 준비해왔던 선택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순수한 선택이 그의 청년기를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서울의 공해추방운동연합(지금의 환경운동연합)을 다니기도 하고 그 분야의 자료들을 공부해가면서 환경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들을 키워나갔다. 또 하나 그의 생활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황토현문화연구회(황문연)와의 만남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샛길청년회에서 만났던 황문연의 신정일 회장은 지금까지도 그가 가장 믿고 따르는 선배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는 황문연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열성적인 회원이 되었다.
그런 그의 생각과 생활은 군대시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군대에서도 이런저런 잡지들을 구독하고 자료를 받아보면서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황문연과의 인연 역시 계속되었다. 군대 생활중에도 휴가를 미리 황문연의 행사기간에 맞추어 참여하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고, 그곳에서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에 새롭게 눈뜨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서 군대생활까지가 모색과 수련의 기간이었다고 한다면 군대를 제대한 이후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좀더 구체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군대를 제대한 다음 그가 첫 번째 했던 일은 신문에 난 서울의 환경운동연합 간사공채에 응시한 것이었다. 그대 그는 삼년 정도는 서울의 환경운동연합에서 일을 배우고 자신이 할 일들을 정리한 후에 전주에 내려와서 일을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차 필기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그만 면접에서 또 한번의 낙방을 겪는다.
그다지 즐거운 기억이 아니었을텐데도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겪었던 낙방의 기억들은 전혀 그를 주눅들게 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보통의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성공에 대한 집념이나 애달음과는 다른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 번번히 실패를 맛보았는지도 모른다.
서울행이 좌절된 지 얼마 후 그는 전북에 만들어진 환경운동연합이 간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자원하여 그곳에 뛰어들면서 비로소 환경운동의 현장에 안착했다. 그리고 3년 동안 그는 누가 뭐래도 전북이 자랑할만한 환경지기로 열심히 뛰어왔다. 환경문제가 있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고 그가 종합하고 정리한 자료들이 환경운동연합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확실히 보통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에게도 환경운동연합은 최상의 직장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대학시절부터 운동판에 끼어들어서 이런저런 경험을 쌓아온 이력도 없이 시민운동에 뛰어든 그가 사실 남모르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리 없다. 그는 때때로 턱없이 원칙적이고 강직하기만 해서 사람들을 당황시키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세월들 속에서도 그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대개 재기발람함을 덕목으로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일선 실무자 생활을 일이년쯤 겪으면 나타나는 일반적인 증상들, 예컨대 손이 빨라지고 눈치가 늘면서 반쯤은 유연함을 가장한 노회한 활동가가 되는 등등의 변화가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시민단체라는 곳이 대개 계급적(?)기반은 제공되지 않으면서 사회적 위상은 높은 곳이어서 세상살이의 눈만 높아지기 십상이지만 그런점에서 그는 아직도 덜 큰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거울인 셈이다. 스스로의 행동을 그 거울에 비추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정색한 얼굴로 우리에게 면박을 줄 때 우리는 그저 머쓱해하지만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그제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의 삶은 그렇게 운명 운운할만큼 커다랗거나 거창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원칙을 몸으로 지키고 실천하는 환경지기로서 충분히 성공스토리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