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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서평]
삶과 영화 꿈꾸기, 자유롭게 글쓰기 - 이정하의 『영화와 글쓰기』·김병직
김병직(2004-02-12 16:03:01)
1980년 대학에 입학. 그해 5월의 광주민중항쟁. 퇴행과 반동의 시절.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망상의 세계로 깊이 침잠 84년에 다시 입학했으나 곧바로 다시 그만둠. 영화일 시작. ‘항상 뭔가를 했지만 늘상 남는게 없었고, 전체를 생각했으나 부분도 못 건졌다. 그러나 행복했다’ 89년 결혼. 80년대가 끝나면서 활발했던 영화운동은 좌초 양상. ‘게도 구럭도, 덫도 노루도 다 잃었다. 모두 족제비 같은 놈들이 챙겨가고 말았다’ 1990년대 들어와 영화저널, 한겨레신문 등에서 저널리즘 영화비평 시작. 대종상 사무국에서 일하며 영화진흥법 시안 작성. 공청회 준비 진행. ‘코미디 같은 대종상’의 개혁 문제로 고심. 대종상백서 제작. 대종상 심사 과정이 기가 막혀 백서에 금수회의록이라는 부제를 붙이려다 말았음. 스크린쿼터 감시단 사무국장. 다큐멘터리<한국영화 씻김>제작에 참여. 몇권의 번역서와 책을 펴냄. 1996년 1월, 직업적인 평론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글을 쓰는 중. 앞에 간략하게 정리한 내용은 아직도 영화평론가로 더 친숙한 이름인 이정하의 영화적 실천의 이력이다. 그가 최근에 쓴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제목은 『영화와 글쓰기』.‘영화에 대한 글과 영화 아닌 것에 대한 글’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영화와 글쓰기』는 얼핏 그 동안 썼던 영화평들을 모은 책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논문과 ‘잡글’ 형태의 글 대부분이 본격적인 영화평론 형식의 글과는 다른 맥락에서 쓰여진 것들이다. 지은이의 말을 빌리자면 ‘평론집을 내려고 옛글들을 읽어보니 어깨죽지가 아파 못견딜 지경’ 이라 방향을 바꿔 한 해 동안 ‘소꿉놀이, 공작놀이, 흙장난 하듯 쓴 글’ 들을 모아 펴내게 되었다고 한다. 글 곳곳에서 한국영화를 대하는 지은이의 애정과 일관된 관점을 느낄 수 있고, 지은이의 필력이 워낙 단단한 바가 있어서 책은 한달음에 읽힌다 그 중 먼저 눈길이 가는 대목은 아무래도 1부 절필유감이다. 밥벌이 - 라면집이나 회국수집 또는 택시기사 같은 - 에 대한 궁리, 박정희와 할머니에 관한 생각, 그리고 직업적인 영화평을 그만두게 된 진짜 이유와 심경 등이 나타나 있다. 이정하 영화평의 고정 독자가 꽤 많았던 탓에 갑작스런 절필선언은 그의 글읽기를 즐기던 이들에겐 커다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지은이의 영화평 쓰기가 중단된 계기는 알려진 것처럼 이현승 감독의 영화에 대한 글이 불러일으킨 파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사건과 관계없이 자신의 이름에서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떼어버리려고 결심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건없이 투신했던 분야에서 밥벌이의 방도를 얻었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라고 그는 책에 적었다. 지은이의 심경을 다는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가 겪었을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잔잔하게 가슴에 전달되었다. 지은이는 <문화저널>과 사뭇 각별한 관계를 가져 왔다. 95년에 <문화저널>이 마련한「영화사강좌」에 강사의 한사람으로 참여한 바가 있고, 그뒤로도 몇차례 그의 영화평과 영화에 대한 생각을 <문화저널>의 지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2부 ‘영화에 대한 생각들’ 의 절반 가량은 올해 초 <문화저널>에 연재했던 글이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른바 ‘도시영화’의 개념과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몇몇 감독과 작품을 그 기준에 따라 살펴본 것이다. 영화가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지은이의 안목은 날카롭다. 훔쳐보기(관음주의)와 관객(욕망)의 대리만족, 영화에서의 음란성이라는 문제, 그것의 배후에 작용하는 가부장제와 파시즘의 억압성 따위를 살핀 지은이의 결론은 이렇다. 대상화된 스크린의 존재방식을 전복할 것. 수동적이고 관음적인 위치로 전락한 관객을 주체적인 입장으로 바꿀 것. 스크린과 관객을 대면시키고 서로 접촉하게 만들 것. 아직 잡종문화적인 생명력이 왕성한 이땅에서 오히려 영화만들기가 행복할 수도 있다는 언급이나 인간에 대한 대안이 스며나오는 ‘도시영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주장도 한국영화의 활로 모색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3부는 장선우론이다. 데뷔작인 <서울 예수>부터 광주항쟁의 상처를 다룬 <꽃잎>까지 모두 8편의 작품을 분석하는 가운데, 장선우 영화의 방법과 미학의 특징을 밝히고 있는 글이다. 주류 질서에서 이탈한 10대와 행려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찍어 완성한 신작<나쁜 영화>로 영화계 안팎에서 뜨거운 논쟁의 불씨를 지핀 장선우 감독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준다. ‘신명의 카메라론’과 ‘열려진 영화론’같은 개념, 전통 민중예술 양식이 장선우 영화에 끼친 영향 등을 밝힌 부분은 <나쁜 영화>처럼 파격적이고 요령부득인 작품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정하의 다음 영화적 실천은 무엇일까? 책을 읽고나서 떠오른 생각이다. 그에게도 마땅한 답변이 마련되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꿈꾸기’와 ‘자유롭게 글쓰기’만은 계속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영화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그의 영화적 실천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의 꿈꾸기의 내공이 더욱 깊어지고, 4부의 ‘노파1’ 같은 글이 시나리오로 잘 다듬어져 한 편의 좋은 영화로 완성되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어본다. 지은이가 들으면 웃을지 모르겠으나 영화는 본래 인간의 꿈꾸기가 빚어낸 산물이지 않은가? 용감한 보수주의자의 목소리 - 이문열의 『선택』·이은숙 『선택』만큼 발간되기 전부터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던 작품도 드물 것이다. 그 이유는 주지하다시피 이책의 반페미니즘적인 측면 때문이다.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강력했던 덕분인지 서점가의 관계자들이 이문열씨의 책 중에 가장 재미없는 책이라고 판단해 판매부진을 예견했음에도(동아일보 5.8)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있다. 책의 출간 초기에 전여옥씨의 ‘여성독자에 대한 정신적 성폭행’ (조선일보 4.24)이라는 분노서린 비판에 이어 같은 입장의 비판이 줄을 이었으나, 작자는 여전히 책의 말미에 언급한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 만을 비판했을 뿐이라는 논지를 일관되게 주장하며, 반페미니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5.1, 5.8, 일요신문 6.8) 지금까지 진행된 비평 중 가장 적극적인 비평은 이번 여름에 창간된 계간지 ‘이프’의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 란에 게재된 유숙렬씨의 글과, 같은 잡지에 ‘선택’ 과 같은 문체로 김신명숙씨가 남편이 죽은 뒤 순절한 이름 없는 여인의 목소리를 빌어 쓴 ‘한 조선조 여인의 일갈’이 있다. 두 편의 비평 역시 “페미니즘에 무지하면서도 무차별하게 공격의 칼날을 휘둘렀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며 오만하다”고 분모하고, “페미니즘에서도 ‘지지하고 성실한 것’은 너같은 남자들이나 제시할 수 있고, 여자들의 주장은 다만 ‘저속하고 천박한 것’이라는 가당찮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우려하며 작품의 반페미니즘적 경향을 강력하게 질타하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중견작가 중 한사람인 이문열씨는 그 동안 ‘순수문학’과 ‘보수주의’를 표방해왔다. 이 작품은 그 동안의 이러한 경향으로 보면 예외적인 ‘참여문학’인 셈인데도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참여’ 속에서도 일관되게 ‘보수주의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이 목소리에 호응하는 많은 독자층, 지역적으로는 서울 강남지역과 신도시, 연령층으로는 2,30대 여성들이 ‘사회적 소외감’에 대한 ‘위로와 격려’(동아일보 5.8)을 받았다 한다. 그러나 군사정권에서는 실천문학에 맞서 순수문학을 표방하던 작가가 페미니즘에 맞서서는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시도했다는 것은 페미니즘이 군사정권보다 더 해롭다고 봤든지, 아니면 만만하게 봤든지 둘 중의 하나일 터이어서 어느 쪽이더라도 그 현실참여의 용기가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작품은 작가의 직계조상인 정부인 안동 장씨의 목소리를 빌어 의고적인 문체의 일인칭 형식으로 씌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는데다 현대어법에 맞는 어미처리를 하면서 화자의 입을 빈 작가의 강력한 자기주장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구소설의 문체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은 몇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는 안동 장씨의 입을 빌어 현대 여성, 구체적으로는 ‘저속하게 이해되고 천박하게 추구되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과연 온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둘째는 과연 안동 장씨로 하여금 오늘날의 세태를 보게 한다면, 작가처럼 이와 가이 격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것인가. 셋째는 비판의 주체로 설정된 안동 장씨의 삶의 궤적이 과연 조선시대 여성의 삶의 보편성이나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비판의 대상이 되는 현대여성들의 행태가 과연 보편적인 양상들인가. 넷째는 현대여성에게 보이기 위해 정부인 장씨의 업적을 나열하며 빈번하게 현대여성을 질타하는 이와 같은 서술방식이 과연 우리의 소설에 관한 일반인식과 부합되는 것인가. 순서대로 살피면 첫째, 작가가 객관성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 있어 온당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작자 후기에서 거론한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페미니즘’에는 당연히 찬동한다는 말은 작품 속에서는 전혀 실천되지 않고 있다. 또한 페미니즘을 나병환자나 에이즈 환자가 다수를 확보하기 위한 ‘전파열’을 갖는 것에 비유함으로써 작가가 페미니즘을 그런 몹쓸 병들과 동격에 놓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수도 없이 지적할 수 있다. 안동 장씨는 ‘큰어머니’(할머니)가 되어 혈족을 뛰어넘어 베푸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런 삶이야말로, 삶의 지표의 동일성에 있어 시대를 넘어 현대로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베품의 삶을 바로 여성성과 모성성의 우월한 면으로 파악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없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이루어지지 않은채 감정 섞인 비난만 하고 있는 셈이다. 둘째, 안동 장씨를 시공을 초월하여 살려낸다면 오히려 페미니즘이 이룩한 성과에 대한 찬사와 선망을 먼저 보냈을 터이지 이처럼 일관되게 비난을 하리라고 보기 어렵다. 가문을 통하여 자아성취를 대신한 안동 장씨가 전혀 딸들의 성취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씨의 삶의 의미나 양상이 그와 같이 시공을 넘어 확대되어야 한다면, 먼저 장씨의 넷이나 되는 딸의 삶으로 그 의미가 계승 내지 확산되었어야 한다. 작가 또한 그 부분을 아들들의 성취보다 더 공들여 기술했어야 한다. 작가는 안동 장씨의 뜻과는 무관한 단지 작가만의 주장을 펴기 위해 장씨를 끌어들인 것은 아닌가. 오늘도 이 땅의 수많은 엄마가 “나처럼 살지 말아라”고 하고 수많은 딸들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며 엄마의 삶의 의미를 일정 부분 거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셋째, 안동 장씨는 당시의 전형적인 여성상으로 보기 어렵다. 토사곽란이 난 손자를 젊을 때의 의학지식으로 구하자 아들 형제가 자식되어 어미를 몰라봤다 하여 석고대죄를 드린다. 아들이 부모를 더욱 더 존경하게 된 계기가 학식에 있었는데, 그 학식이란 것이 조선조에는 일반 여성들의 몫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장씨는 당시에도 예외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씨도 그것을 인정하고 젊은 날 ‘학문과 기예를 스스로 봉하’고 ‘그 시대의 부녀에게 주어진 직분에만 전념해 삼십 년’을 보냈다. 그러나 직분이 아니어서 스스로 봉한 그 학문 때문에 존경받게 된다는 것은 예외적인 것에 대한 찬사가 아닌가. 예외적인 것에 대한 평가는 결국 보편성을 폄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 예외적이었던 능력과 조건 때문에 인정받았던 부분을 확대하여, 인정받은 그 조건을 계승하고자 하는 현대 여성을 나무란다면 논리의 자가당착이다. 잘못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출산을 거부하거나 이혼의 경력을 훈장처럼 가슴에 거는 여성들은 거의 없거나 예외적으로 존재한다. 출산의 고통과 그것이 야기할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여성은 출산을 하고, 그것을 선망하고 있으며, 이혼녀가 당하는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서라도 혼인을 고수하려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현상이다. 예외적인 인물(안동 장씨)을 통하여 예외적인 상황(페미니즘의 부정적인 면)을 비판하고 있어서 결국 애쓴 비판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넷째, 서사의 이야기는 내포된 개별적 사실들이 현실이 기술이어서 지식이 되거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현실의 반영이기에 전체에서 감동과 교훈이 생긴다. 이 작품은 안동 장씨의 삶을 통하여 여성으로 거둔 업적을 알리고, 나아가 그 업적을 토대로 현대 여성을 질타, 훈계하여 자기 삶의 의미를 확대시키고 있어서 서사이기보다 교술양식에 더 가까운 작품으로 보인다. 소설은 갈등을 기본요건으로 한다. 갈등은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위가 아니어서 긴장을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설의 양상이다. 안동 장씨는 세상과 대결한 일이 없다. 세상의 질서에 일찍 순응 내지 타협하며 그 질서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 갈등은 없다. 그러기에 등장인물을 통하여 작가의 주장을 직설법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 작품은 소설이기에는 자격미달이다. 근래 들어 소설에 교술적인 성향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 한 조류로까지 지적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갈래의 선을 넘어버렸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아직도 이 작품을 베스트셀러로 만들면서 현존하는 보수의 지지기반을 대변해주고 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전업주부의 일상의 가치에 대한 논리적인 의미 부여를 갈구하는 계층이 아직 두터우며. 보수의 벽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남성 또한 다수라는 것이 독자층의 향배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으로 전업주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의 해소에 페미니즘이 아직 무력하며, 그래서 보수주의가 강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페미니즘의 높은 목소리에 가려 보수주의자가 제 소리를 낼 수 없는 것도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니다. 몇 년 사이 페미니즘의 위세가 강해져서, 이를 모르는 사람이나 거부하려는 사람이 다같이 위축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의 이와 같은 보수의 대변은 용기있는 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이 인간불평등에 기초한 것이라면 당연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의 해결에는 기득권층의 이해와 양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다시 한 번 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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