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9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우리 일상과 닮아있는 축제의 영화·홍성희
홍성희
(2004-02-12 16:05:37)
바람이 살을 간지럽히기 시작한다. 가을이 스민다. 추수감사의 이 계절에 성큼 높아진 하늘은, 어둠 속 비디오 영상과의 개인적인 밀교를 중지하고, 제의와 공동 축제의 마당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익명의 대중들에게 개방된 축제가 능동적인 수용자 층을 형성하지 못할 때 이들 축제는 자칫 당신들의 축제가 된다.
97춘천만화축제, 97서울애니메이션 엑스포,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SICAF) 등의 각종 애니메이션 축제가 우후죽순으로 열렸고, 서울 국제가족영화제도 덩달았다. 명확한 컨셉을 중심으로 소규모적인 집단 중심으로 개최하고 있는 인권영화제, 독립영화제 이외에도 대학 써클 단위별로 열곤 하는 사이버 펑크 영화제, 컬트 영화제 등, 여기에 문화기관 내지 시설 관련 중심으로 열리는 유명 감독 추모 영화제, 혹은 중견감독 회고전 형식의 영화제 등등. 봇물터진 것처럼 쏟아지는 각종 영화제들을 헤엄쳐 다니다 향방을 잃을 즈음, 매스컴은 영화제의 각기 그 편차를 드러내고, 혹자는 이렇게 우연히 영화의 제국에 거대한 섬같이 떠오는 영화제에 몸을 누인다. 작년의 부산국제영화제에 이어, 올해는 장르영화제로서 새로이 기획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영화라는 축제가 가능할까? 몸이라는 매체가 본질적으로 그 역할과 소임을 다하는 축제양식이 영화와 더불어 가능할까? 영화 축제라고? 각종 영화제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축제를 베푸는 입장에서 선택되어진 영화의 전시장에 몸을 허락할 수 있다는 개연성이며, 개별 취향의 선택은 차단되어 있다. 반면, 축제에 모여든다는 것은 막연하나마 그 축제를 통해 드러난 다수의 취향을 내것, 우리것으로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공연한다? 영화가 공연된다? 아마도 영화축제의 못브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까. 모종의 행사를 위해 특정한 시공간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야말로 공연예술의 각 장르에서 주요하게 부각되어지는 공연성의 원리로서, 영화제는 영화를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로부터 출발한다. 이렇게 이벤트화된 영화 상영은, 일관된 컨셉 아래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의 말하기를 보여주는 일종의 공연이 되며, 한데 모인다는 것이 이루어내는 효과로 말미암아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이 생겨난다. 이곳은 집회의 장소, 예배의 장소가 되며, 영화제는 가능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문화 의식 내지 문화 운동의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가 보여준 가장 큰 헛점은 아마도 영화축제의 정신을 혼동한데서 온것이라 해야 할까. 축제는 놀이마당으로 연희를 베풀고 즐기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막연한 압박감에서 상영행사와 이벤트 행사의 차별성과 그 융합에 실패한 것이다. 야외에서 대형 스크린을 마주하는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이루어진 비일상화된 특수 공간화, 한편 거리의 문화로 펼쳐지는 일상 공간을 점하는 기아 부대 행사로서의 문화공간이 서로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로는 영화제라고 하는 독자 공간의 창조가 그 숙제가 될 것이다. 그곳은 무엇보다 영화매이나들의 자위, 자축과 즐김, 누림의 장소가 되어야 하며, 영화인들의 연대의식을 다지는 곳, 다층적 만남과 교류의 장이어야 할 것이다.
한편, 축제에서의 영화는 그 자체의 우상화와 독단화를 거부한다. 국적이 다른 영화는 서로 섞여들면서 협화음을 이룬채 영화제 행사의 공통테마를 기조로 대규모 교향악을 연주한다. 영화제 기획의 컨셉을 공유하면서, 관객 수용자는 의식있는 영화 보기를 체험한다. 단편영화제, 인권영화제,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처럼 정상적인 유통 경로로 만나기 어려운 작품을 소개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마련될 수도 있고, 이번에 ‘상상력, 대중성, 미래지향’이라는 모토를 내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와 같이 감각과 취향 존중의 방식에 기초하여 매니아들의 비밀 결사 같은 느낌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만큼 선택은 신중하고(작품성), 책임있는 것(필름의 상태/원본, 자막처리의 세심함 등)이어야 한다.
이처럼 축제 형식의 이벤트는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던 것이기도 하지만, 미디어의 발전 형태상으로 볼 때, 집인형 미디어와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송달형 미디어가 상호 발전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이벤트 양식은 어떤 면에서 가장 원시적인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화제란 영화 미디어 자체의 속성인 복제화된 첨단의 예술 상품을 선보이는데, 영화는 여전히 반복, 재생되지만, 한편 특정 영화제라는 일회성을 빌어 상영되어지는 영화는 일종의 라이브 공연화되고, 프로시니엄적인 극장 환영의 해체와 더불어 공간의 순환을 유도하기도 한다.. 가령, 대형 영화제의 경우,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현실의 피드백된 이미지와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가상 이미지를 교차시키고, 진행자의 멘트가 곁들여지면서 공간의 안과 밖이라는 공간 환경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인식되는데, 이러한 관계성은 공간의 안과 밖을 오가는 인식과 지각을 기초로 한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속성은 그것이 영화예술로서 허용되지 안을 경우 무차별적인 테러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일방향적인 과격함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 등급의 판정을 위시한 영화적 제재는 이러한 영화적 폭력을 우려한 것이면서도, 판단의 잣대가 되어야 할 영화관객의 판정을 얼치기로 하고 있다. 즉 영화관객의 수준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뿐더러 영화예술로서의 작품전체를 판단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영화적 감수성이 채 형성되지 않은 ‘나쁜’ 아이들의 기호가 빚은 심각한 장난이 행해지곤 한다. 또는 터무니없이 상업적 이윤을 위해 ‘나쁜’ 어른들의 가위질이 영화의 길이를 규격화시키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의 유치함과 조잡함으로 일그러진 영화가 아닌 축제의 영상, 축제의 영화는 과연 어떤 것일까? 가장 원시적, 혹은 원초적일 수 있는 퍼포먼스라는 개념은 일방향적 소통의 대표적 주자인 미디의 측면에서 다시금 요구되어지는 덕목으로 보인다. 이미 국내에서도 최근 음악 분야에서 ‘멀티미디어 플레이 그라운드’라고 하는 인터랙티브 뮤직이 시도된 바 있으며, 외국의 경우 이미 총체 공연 형식으로 무용, 영화, 음향, 조명 등에 의한 인터미디어 시어터 이벤트를 실험한 바 있다. 포스트모던 테크놀로지로 이루어낸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도 순수미술과 상연미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퍼포먼스의 형태로 공연된 것이다. 미디어를 통한 사이버 스페이스의 상호 작용성으로 표현되는 인터랙티브도 결국은 예술과 생활의 긴밀한 관계성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것일 터이다.
오늘날 예술은 어차피 본질적으로 정보소통 양식의 하나로 설명된다. 소통은 그것을 매개하는 미디어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미디어의 변모는 예술작품의 제작 및 표현양식, 소통방식의 변용을 초래하게 된다. 뉴미디어 시대인 현대의 공간은 그야말로 영상으로 가득 찬 공간이며, 이벤트는 원시적인 매스커뮤니케이션임에도 불구하고 그 확산성으로 말미암아 정보화 시대의 새로운 미디어가 된다. 축제의 미디어가 영화인 영화제와 이벤트(축제)미디어적인 공연(퍼포먼스)은 그 상이한 출발로 말미암아 이상으로서의 ‘진정한 축제’를 다각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언뜻 보기에 다채롭고 풍성한 대형문화이벤트의 속살은 한편으로 아수라장인 경우가 더러 있다. 준비기간을 충분히 갖기 못한 채 날림으로 행사를 주무르는 등의 불성실함 외에도, 기획적인 아이디어의 빈곤으로 행사 자체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문화적 감성을 가지고 문화예술 기획을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편차는 다양해진다. 또한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영상매체는 그만큼 실재적 감성적 응용이 요구되는 분야이고, 여전히 활발한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진정한 축제는 작위가 아닌 고도로 세련된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그러한 축제의 영화는 또한 삶과, 우리의 일상과 아주 닮아 있을 것이다. 자칫 쇼가 아닌 세기말의 축제와 살아남아야 하는 작가의식을 위해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