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1997.9 | [매체엿보기]
물방울이 구르는 소리·김재용
김재용 (2004-02-12 16:07:09)
물방울이 나뭇잎 위에서 구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윤화중의 작품집에 실린「비나리」를 들으며 그 소리를 듣는 착각에 빠진 것은 왜일까. 터무니없는 환청이라고 치워 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비나리」에서 그 소리를 분명히 듣는다. 대지의 풍요를 재촉하는 봄비가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나뭇잎 위에 떨어져 경쾌하게 구르는 그 음을 찾는 것이다. 그 경쾌함은 발랄한 색조를 띠고 있다. 그리하여 겨울을 이기고 봄을 다시 약동하는 모든 물상들의 풍요와 환희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생의 충만함을 느끼는 우리 자신들의 감성이 가야금의 선율을 타고 흐른다. 「유년(幼年)의 여름」은 제목 그대로 어린 시절의 여름 이야기다. 자연의 위력에 몸을 사리면서도 그 힘의 뒷자락에 드리운 그늘에 몸을 맡기고 평화로움을 즐기는 사람들의 여유가 가락마다에 베어 있다. 위협적인 가락이 거침없이 풀어지다가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편안한 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아이의 꿈을 펼친다. 특히 놀라운 기법은 두꺼비 동요의 삽입이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라는 잘 알려진 선율을 엇모리 장단에 앉은 것이다. 이것은 국악이 전혀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큰 변모이다. 즉 국악이 자신의 틀만을 고집스럽게 묵수하며 반복하는 닫힌 장르가 아니고 다른 여러 음악의 장르들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는 열린 장르로서의 개념을 보인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계화 시대에 국악이 열린 음악으로서 존립할 가장 유리한 근거를 확보하고 있음에 각별히 주목하고 싶다. 낙엽이 쓸려 가는 소리는 아무래도 죽음을 환기한다. 죽음에도 소리가 있을까.「영가」는 죽음이란 비극적 체험을 가야금의 처연한 가락에 실어 환기시킨다. 자못 엄숙하고 진지하게 하지만 죽음이 반드시 비극적일까. 또 죽음이 반드시 죽은 자만의 몫은 아니다. 죽은 자가 있으면 산 자가 있고, 산 자에게도 죽음은 비극적 체험이다. 그들 사이에 어찌 쌓인 감회가 없을까. 살아 생전의 좋았던 기억도 있을 거이나, 아쉬움에 맺혔던 응어리가 더욱 심한 법이다. 다시 못 볼 떠남이고 보냄이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산조의 맛은 어떨까. 같은 작품이라도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맛은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 작품집에서 산조에 들인 맛은 각별하다. 여기에 실린 임동식 편 산조는 지금까지 거문고 산조의 양대 명인으로 알려진 신쾌동과 한갑득의 그것과는 여러모로 큰 차이가 난다. 30년대에 요절한 거문고의 귀재 임동식의 꽉 들어 찬 소리를 연주한 윤화중의 솜씨가 보통 아니다. 국악이 찬밥신세로 전락된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남의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그 슬픔을 이기는 일차적인 임무는 국악인에게 있다. 그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와 변천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음악대중이 기꺼이「한국 음악」의 품에 안기게 해야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