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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9 | [사람과사람]
세기말 한 유학자의 고뇌와 응변(應辯)·김기현
김기현 (2004-02-12 16:08:21)
고뇌의 시대와 삶 간재(艮齋) 전우는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난세에 처하여 견디기 어려운 고뇌의 삶을 살았던 구한말의 큰 유학자다. 그는 1814년 전주에서 태어나 1922년 부안 계화도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삼정의 문란 등 국내사회의 극심한 혼란에 더하여, 두 차례의 양요(洋擾)와 을사조약, 경술국치 등에서 드러났던 바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의 개항요구와 침략의 와중에서 끊임없이 지성의 번민을 겪으며 살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로 잡혀가 죽음당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제문에서 그 괴로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나 같은 사람은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고 싶어도 세상이 즐겁지 않고, 죽으려 하나 그 바른 자리를 얻지 못하여,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만 합니다. 외로운 그림자만 위로를 하니, 서책을 끌어안고 통곡을 합니다.” 그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고 또 자학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이 또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오해와 비방이었다. 당시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1861-1939)가, “전모(田某)는 수구당의 괴수로서 개화의 걸림돌이므로 그를 죽여야만 개화가 이루어지고 나라가 보전될 수 있다”고 힐난한 것은 차라리 그의 뜻을 강고하게 해주는 자극이었다. 문제는 같은 ‘수구당’내의 비난이었다. 그는 죽음이 두려워서 구국의 상소와 의병 궐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의병활동과, 나아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의암 유인석(1841-1915)이 그를, “나라에 무익한 물건”이라 지목하고 또 “불충불의(不忠不義)한 자”라고 배척한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면 그는 정말 그렇게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을까? 그가 자신의 은둔행적과는 달리 후세사람들로부터 정당하게 평가받고자 했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위정척사(衛正斥邪) 간재는 당시의 시대적 위기상황 속에서 거개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정척사, 즉 정도(正道)의 보위와 사도(邪道)의 배척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고취하였다. 유학사상사 속에서 살필 때 위정척사 의식이 이 때에 그에게서 처음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도덕학으로서의 유학은 원래 삶의 정도를 지적 실천적으로 추구하는 학문인만큼, 바른 것[正]과 그릇된 것[邪]을 주의깊게 판단하고 또 엄격히 취사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19세기 일본과 서양의 무력위협과 문화침략에 직면하여 새로운 전개 양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의 말대로 “우리를 회쳐먹고 삶아먹으려는”사악한 야욕속에서 우리를 호시탐탐 넘보고 있었던 그들의 위협은 그에게 발동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보위하고자 했던 ‘정도’는 정치 경제 문화 사상 등 삶의 모든 방면에서 우리를 떠받쳐온 민족적 정체를 뜻하였으며, ‘사도’는 우리 민족의 정체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진 일본과 서양의 모든 문물을 가리켰다. 그가 서양의 과학기술까지도 거부한 이유도 이러한 위기의식에 연유한다. 그는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서양문물의 편리성과 이기성을 긍정하고 수용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선망하고 추종하게 되어, 종당에는 편리지향이 아니라 삶의 의미추구의 우리(유교)문화를 부정하는 결과를 피치 못할 것임을 경고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타문화 또는 다른 세력의 도전에 대한 창조적 응전력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열강세려그이 도전을 감내하고 소화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사회에서 지식인이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이 점을 생각하면 그의 격정적인 반응과 ‘수구적’ 고집을 비난만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말기적 사회의 지성인이 난세를 구원할 방도를 알지 못하여 겪는 아픔과 고뇌를 그 역시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간재는 의병의 궐기를 거절한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들었다. 혹자는 그를 “썩은 선비”라고까지 타매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궐기거절의 변을 들어볼 필요가 잇다. 그는 기본적으로 궐기의 ‘의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최면암의 의병궐기의 소식을 듣고 격려의 편지를 보냈고, 제자들에게는 의병활동을 폄하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거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자책하기까지 하였다.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여념이 없는데, 우리들은 편안히 앉아서 책이나 보고 있으니 이렇게 부끄러울 데가 어디 있는가.” 이렇게 심하게 자괴하면서, 그리고 주위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는 어째서 의병의 궐기에 나서지 않았을까? 민족문화의 보전에 삶을 바친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어떤 사태에 임해서 취해야 할 ‘의리’는 결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태가 그들 각자에게 주는 각양의 의미만큼이나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 제가끔의 처지와 삶의 목표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는 사태의 의미는 역시 그만큼 다각으로 처사의 의리를 현시하기 마련이다. 예컨대 온 국민이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족의 대의이지만, 그 저항과 투쟁의 방법은 사람들 각자의 처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당시로 말하면 임금의 투쟁방법과 대소관료, 농민, 상인, 학자의 그것이 같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각분야, 각인의 투쟁이 모두 저 민족적 대의에 수렴되는 것은 물론이다. 간재가 판단 선택한 투쟁의 ‘의리’는 바로 하자로서의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륜강상과 민족정신(문화) 보전의 학문과 교육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는 일견 우활한 방법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학자들도 모두 총칼 들고 싸움터에 나가는 것만이 애국은 아니다. 국가 존망의 일선에서 일제에 무력저항했던 학자들의 의병활동이 거룩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 후면에서 왜양의 문화침략에 대항하여 강학을 통해 민족문화의 보전에 삶을 바치려 했던 간재의 뜻 또한 존중되지 않으면 안되다. 그것 역시 학자의 중차대한 임무인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맡길 일이요, 양자를 시비경중으로 논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시 최면암의 자제 최영조(崔永祚)는 간재의 이와 같은 뜻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간재의 처지는 나의 선친과 다르다. 후학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할 줄 알게 함으로써, 그들이 오랑캐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의 직분이다.” 간재는 은둔 강학의 땅을 이리저리 찾다가 72세때 부안 계화도에 최후로 정착하였다. 그는 학문과 교육이야말로 정치의 성패와, 나아가 국가의 흥망을 넘어서 인류의 밝은 미래를 확실하게 담보해줄 원동력이라고 믿어 그 곳에서 강학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행각은 물론 자기 한 목숨을 부지하거나, 또는 그의 말대로 “세상을 과감히 잊고서 내 한 몸이나 깨끗 닦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서나 세상 근심의 뜻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가 을사보호조약의 소식을 듣고 쓴 다음의 편지는 그의 이러한 뜻을 잘 밝혀준다. “지금 나라는 기울고 인류는 멸망하려 하지만, 의리를 강명하는 일, 이기심을 버리는 일, 후진을 양성하는 뜻을 더욱 절실히 가져 조금도 해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들이 혼란한 사회일수록 더욱 자신들의 일거일동의 사회적 의미를 깨달아, 각자 의롭고 공명한 삶 속에서 희망의 미래사회를 일구어나가도록 그들을 훈도 하였다. 그가『주역』<박괘(剝卦)>의 뜻을 자주 상념했던 것도 이러한 미래 지향적 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는 “도덕도 성쇠가 있고 나라도 흥망이 있다”는 문명의 이치와 역사의 법칙으로 자신의 시대적 고뇌를 달래면서, 아무리 궁핍한 시대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정신생명의 ‘큰 씨앗’으로 나고자 하였다. <박괘>의 이른바, “먹히지 않는 큰 과일[碩果不食]”의 숨은 뜻이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학자의 허약한 변명으로만 돌려서는 안된다. 사실 그와 주의 노선을 달리하였단 한말의 의병활동은 민족생존과 국권회복의 ‘대의’이외에 민족생활의 정신가치를 돌보고 배양할 겨를을 갖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의병의 직접적인 목표는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생존에 있었지, 우리 민족의 가치있는 문화생활에 있지 않았다. 그러한 전민족적 생존투쟁의 50여년이 억울하게도 민족생활의 공백과 파탄을 초래하였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또 아직까지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그대로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간재의 노선의 의병운동과 함께 서로를 보완해주는 의의를 갖는다. 그는 국가존망의 와중에 사람들이 추스릴 여유를 갖지 못했던 정신가치의 보전과 교육에서 자신의 민족적 임무를 발견하여 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들의 심성과 행위 속에 유교정신의 ‘씨앗’을 뿌려 미래의 밝은 민족 문화를 꽃 피우고 결실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3천여명의 제자들은 그 일차적인 수확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 시대에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유교(문화)의 명맥은 또한 그 많은 제자들이 뿌려놓은 씨앗들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물론 그의 고전주의적 교학(敎學)에는 그 내용상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수시병통(隨時變通)의 철학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유학이 21세기 문명의 향방과 관련하여 국내외에서 주목되고 있는 오늘날, 그가 수호하고자 했던 유학은 이제야말로 우리가 새롭게 가꾸고 꽃 피워내야 할 이 시대의 ‘큰 과일의 씨앗’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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