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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8 | [특집]
‘문화재’와 ‘가치’는 누가 만드는가 문화재 지정, 그 기준의 모호함·최주호
최주호 (2004-02-12 16:10:21)
‘보존할 만한 가치’에 대하여 '문화재는 겨레의 역사와 선조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는 유형 무형의 모든 문화적 소산을 포괄하며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말한다. 문화재의 종류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크게 분류한다‘ 문화재 보호법 제2조에서는 문화재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란 무엇인가. ‘보존할 만한 가치’와 ‘문화유산’의 개념은 어디까지인가. 아직껏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전주의 전통 비빔밥이나 전주 한지는 과연 ‘보존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문화유산’이 아니라는 것인가. 현재 문화재 보존 관리를 위한 기본법인 현행 문화재 보호법은 1962년 1월 10일 제정되어 일반법에 우선하여는 특별법적인 성격을 갖고 있고, 문화재 보존 관리에 대해서는 다른 법률을 배제하고 이 법의 규제를 받도록 하고 있어 문화재는 정부의 강력한 보호와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올해 문화유산의 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문화재에 관한 정책은 겉돌고 있고, 지정에서부터 보존 관리까지 총체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가운데 문화재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국가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로는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전통 건조물이 있고, 이밖에 도에서 지정하는 문화재는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문화재자료로 각기 구분되어 관리되고 있다. 현재 전북도의 6개시 8개군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156개와 도지정 문화재 389개를 합쳐 545개인 반면 비지정 문화재는 40,283점으로 집계되어 있다. 전체 문화재중 불과 1.4%만이 국가나 지방정부의 보호대상인 셈이다. 비지정문화재는 국립전주박물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국공사립대학 박물관, 동진 수리민속박물관에 각기 분산되어 추후 문화재 지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전라북도가 지정·보호하고 있는 유형문화재는 탑이나 사찰 등의 부동산 문화재 101점과 그림 등의 동산 문화재 41점이다. 전북도에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은 141점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국보 5점, 보물 81점, 사적 28점을 합해도 255점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천년고도를 자랑하는 이 곳에 선조의 문화유산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이것 뿐일까. 우선 첫 번째 문제는 탑이나 불상같이 겉으로 들어난 것 이외에 지하에 매장된 문화재 및 유적에 관련된 것이다. 도내의 유적 발굴은 전주박물관, 전북대, 군산대, 전주대, 원광대 다섯 곳에서 맡아 발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굴기관은 한결같이 예산상의 문제와 인적자원의 부족으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발굴이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유형 문화재의 지정 및 보존관리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유형문화재의 경우 통상 100년을 기준으로 문화적 가치를 평가해 문화재 지정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그 이전이라도 ‘가치’가 인정된다면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실은 상당히 경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소장할 수 없는 부동산 유형문화재의 경우 문화재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보호구역으로 지정 개인의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여 관리 운영하는 까닭에 그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때로는 재산권 침해 시비가 일기도 한다. 실례로 전주 경기전의 경우 1971년 12월 유형문화재 339호 지정되어 반경 100m이내에 4층이상 건물을 지을 때는 경관심의를 받도록 법제화 되어있어, 사실상 건물증축 등이 어려운 상태로 주민들의 생활환경에 지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같이 묶이게되는 보호구역에 대해서 국가나 지방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 지정은 유형문화재 보다 무형문화재 지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현재 도내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는 국가지정이 7종 8명이며 도지정 무형문화재는 14종의 33명에 달한다. 특히 한 종에 2명이상이 중복 지정되어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재 지정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문화재 지정을 심의하는 문화재 위원들과 전북도는 여기에 대해 ‘어떤 종목에 한 사람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 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면 지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결국 무형문화재의 가치하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염불보다 잿밥’ 문화재 지정은 전적으로 전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 결정한다. 문화재 위원회는 문화재 위원과 전문위원으로 구성되어 문화재 전문위원은 자료수집, 조사 연구 등을 통해서 문화재 지정을 상정하며, 문화재 위원은 이를 심의 의결하여 문화재 지정 여부를 결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지사가 지정을 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러나 유형문화재와 같이 객관적인 자료와 분석이 없는 무형문화재 지정의 경우 끊임없는 논란이 일고 있는 상태다. 문화재위원회의 한 위원은 ‘무형문화재 지정의 경우 객관적인 자료가 없는 만큼 위원의 양심적인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고 고충을 털어 놓았다. 무형문화재 지정에 얽힌 속사정은 더 복잡하다. 무형문화재를 지정할 때 일부의 신청자들이 ‘상업적 이익’을 고려하여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야말로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화재(?)는 그 가격이 3배 이상 폭등하는 등 문화재라는 자신의 상표(?)를 마구 남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이다. 심지어는 문화재 지정 신청시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한 종목을 신청해 지정받는 경우도 있다. 무형문화재의 지정과정에서 좀더 심층적이고 철저한 자료조사가 필요하다는 점에 모든 전문가들이 이의없이 공감하지만 아직 이렇다할 대책도 없고, 대안에 대한 고민도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 문화재와 ‘돈’의 오묘한 관계 이처럼 무형문화재의 지정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전주의 특산물인 전주 이강주에 이어 부채나 한지 비빔밥 등 전북 지역의 문화 유산에 대한 문화재 개발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몇해전부터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위원들은 “지역문화인 부채나 한지 등을 문화재로 지정하면 민감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충분한 협의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다”고 한발 발을 빼고 있다. 전주 비빔밥 등 지역문화 유산을 문화재로 지정할 경우 가격상승, 업체간의 과다경쟁 등의 문제가 발생할 뿐만아니라 선별과정과 지정문제에서 집단적인 반발을 야기 시킬 수 있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 비빔밥이나 전통 한지 등의 문화재 지정은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전주의 비빔밥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의 특산품으로 포장되어 세계에 수출되고 마침내는 한국에까지 직영점을 내고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전주 비빔밥 등의 문화상품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우리의 전통식혜로 미국의 코카콜라가 특허를 따내는 어이없는 일이 이곳에서도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표조사부터 시작하라 이제 문화재 개발과 보존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세워야 할 때다. 천년고도의 명성에 걸맞는 문화재 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전주를 비롯한 전북의 곳곳에는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고 매장된 문화재 역시 상당히 많은 양이 묻혀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만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조사와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곳곳의 공사현장에서 문화재가 발견되고 있지만, 공사 지연 등을 우려한 건설업체들에 의해 불도우저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표조사에 대한 필요성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현재 전북도의 지표조사는 거의 전무한 상태로 어느곳에 어느 유적이 있는지, 이미 발굴된 곳을 제외하면 모르는 실정이다. 지표조사를 통해 보다 지역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체계적인 학문연구는 물론 매장문화재에 대한 훼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전남도의 경우 90년대 들어서 지표조사팀을 구성, 거의 마무리된 상태며 현재는 마을의 생활상까지 조사하는 단계에 이르러 문화정책에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문화재와 유적 등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올바로 계승되고 보존되기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정책이 나와야 한다. 현재 전북도는 전북도지정 문화재보호조례 개정을 준비중에 있다. 문화재를 “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삼고 올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지정했는지 근본적인 물음부터 되짚어 봐야할 때다. 국토개발 속에 멍드는 매장문화제·최완규 8월초 장마처럼 연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TV와 신문들은 대한항공의 추락사건으로 모든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이러한 대규모 불행한 사건이 없었다면 몇몇 일간지의 사회면 머리기사로 장식할 수 있었을, 경주 진덕여왕릉의 도굴기사는 한쪽에 치우쳐 눈길을 끌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 매장문화재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올해는 정부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의 해로서 온갖 행사들이 정부 혹은 지자체를 중심으로 각종 행사들이 앞다투어 치러지고 있는 판에 그것도 문화유산의 대표적인 도시인 경주에서 왕릉에 대한 도굴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고 수치스런 일이었다. 하기야 모 공영방송사에서는 각종 문화재에 대한 정확한 성격이나 진정한 가치에 대한 설명을 제껴둔채 문화재에 대한 평가를 가격으로 친절히 감정해주고 있는 방송을 휴일 오후마다 내보내고 있다. 인기 코미디언까지 옆에서 한 몫 거들고 나서는 그 방송의 가격 감정과정을 보면서 결국 골동품 좋은 것 하나면 팔자 고칠 수 있다는 사행심을 부추겨, 심지어 왕릉까지 아무 두려움없이 도굴하는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편견일까. 문화유산이란 간단히 정의하면 선조들의 오랜 생활속에서 축적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거나 남겨진 유형무형의 문화재를 통털어 일컫는 말로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확인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민족 자산인 것이다. 그 중 매장문화재는 문자 그대로 땅속에 묻혀있는 문화재를 일컫는 말로서 발굴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햇빛을 보게 된다. 발굴은 흔히 외과의사가 수술을 진행하듯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하는 작업으로 출토되는 유물에서 밝혀지는 비밀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유물이 거기에 있게된 경위를 밝히는 작업은 흔히 사람에 있어 족보를 밝히는 작업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의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는 흔히 문헌자료와 고고학 자료를 드는데 전자는 발굴의 한계에 다달아 거의 새로운 자료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조차 어려운 형편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아직 땅속에 깊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파괴를 최소화하는 길만이 우리의 역사 파괴를 막는 길인 것이다. 매장문화재의 파괴요인은 홍수, 산사태등 급격한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자연적 요인과 범죄적 행위인 도굴과 개발이라는 합법을 가장한 인위적인 파괴행위를 둘 수 있겠다. 매장 문화재에 대한 파괴는 불가피한 자연현상에 의한 파괴보다 인위적인 파괴가 광범위하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위적인 파괴행위 가운데 도굴은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진 고질적인 것으로 주민들의 감시와 철저한 관리로서 어느 정도 예방효과가 있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사전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것으로 공공기관이나 사업자, 그리고 주민들의 인식전환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나 오늘날 곳곳에서 빠른 속도로 진해오디고 있는 국토개발사업에 따라 매장문화재가 파괴되거나 파괴될 위기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도, 개발논리에 밀려 매장문화재가 구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급속한 국토개발로 인하여 자연환경이 파괴됨으로서 인간 삶까지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러 인간 스스로 파괴한 자연환경을 어떻게 원래 상태의 자연환경으로 되돌려 과거와 같이 쾌적한 조건속에서 풍요로운 인간의삶을 영위하도록 하느냐가 커다란 당면의 문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환경문제가 외부적인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인간내면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문화유산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생존해 왔으며 자연환경의 조건속에서 문화를 창조해 왔기 때문에 환경과 문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이를 보전하는 것 자체가 우리를 지키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문화재 특히 매장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문화유적이 현재의 삶속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개발을 하는데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어 작업과정에서 문화유적이 발견되면 밀어버려 후환을 없애 버리자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 수준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밀어버리고 보자는 사고가 행정관청 등 공공기관에서 오히려 팽배해 있다는 것인데, 중앙정부보다 재정이 열약한 지방자치단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3년전 익산 영등동에서 발굴조사된 25기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원삼국시대 주구묘의 발견은 조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사를 지연시키면서 발굴조사에 협조해 준 익산시의 도움이 컸고, 그에 대해 지금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행정당국이 앞장서서 매장문화재 보존에 힘써야하고 조사활동에 전폭적인 지원이 당연한 것일진대, 이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거 매장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끝에 보여주는 작은 관심이 너무나 커 보였든지, 아니면 너무나 보편적인 일상이 특별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소박한 욕심을 부린다면 집자리와 여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산유적으로 추정되는 저습지 발굴까지 협조가 있었다면, 익산지역의 청동기 문화인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쉬움으로 남는다. 지금도 생각하면 중장비의 몇삽이면 집자리 유적 하나가 날아갈 판인데, 며칠만 늦었더라도 날아갈뻔한 익산지역의 청동기문화인들의 집자리를 다행이 공사과정중임에도 조사할 수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면 아찔하게 느껴진다. 일부 유구는 복원을 전제조건으로 공원지구로 이전해 놓았으니 복원되어 익산시민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될 날을 기대해 본다. 최근 전북대학교에 의해 조사된 장수 남양리유적의 경우를 보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학자마저도 이러한 지역에 설마 유적이 있을까 할 정도로 입지조건에서는 열악한 곳이었지만,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유적이 발견된 바 있다. 현재의 지형과 당시의 지형이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오랜 문화전통을 가진 우리민족이 살았던 한반도의 어느 곳에서도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실례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나 공단조성에 앞서 환경영향평가가 법제화 되어 있고 아울러 문화재조사도 병행하도록 되어있지만 오히려 문화재 파괴를 합법화시켜주는 들러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각오를 새롭게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대규모의 댐공사나 고속도로, 택지조성공사는 문화재조사가 선행되고 있는 편인데, 문제는 기존의 2차선도로를 확포장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법적하자가 없다는 이유로 인해 사전조사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즘 새로이 건설되는 도로보다 예전부터 있어 왔던 도로는 인간생활의 장과 근접한 지역에 있고, 도로의 입지 자체가 인간생활의 장과 같은 조건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도로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아무런 사전조사없이 이러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법적용 이전에 담당국가기관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최근들어 우리 전북도내에서도 각종 공단조성, 고속도로 공사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중에 있는데, 다행인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매장문화재에 대한 가치와 보존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조금씩 향상되어 매장문화재 조사에 긍정적인 인식을 가족 협조적인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매장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지 못한 70년대 개발사업에서 우리 전라북도가 소외되었던 점도 매장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던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위안을 삼으면 안될까. 우리는 몇 년전 헐리우드의 영화 「쥬라기 공원」의 외화수익이 우리나라 자동차 몇 만대 수출과 맞먹는 외화수입을 올렸다는 기사를 기억하고 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총성없는 문화 전쟁시대라고 석학들이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 시장에서도 가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할 것이다. 곧 가장 한국적인 우리의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문화유산의 이해를 바탕위에 두고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매장문화재의 파괴를 막고 보존할 수 있는 제도적인 문제애 대해서 가장 기본적인 몇가지 제언을 해두고 싶다. 첫째 각지역별의 문화유적에 대한 정확한 기초조사가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이를 근거로 개발에 앞서 적절한 보존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문화재보존관리업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전문분야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관련 행정을 일반 행정관리들이 담당하고 있어 효율적인 문화재관리와 보전업무가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일선 시 군단위까지 문화재를 전문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인력배치가 이루어져 문화재 파괴요인에 적절한 예방대책 및 보존과 활용 방안을 마련토록 해야할 것이다. 셋째, 현재 전라북도에서 시행중인 각종 국토개발에 따른 문화재 조사사업을 대학이 도맡고 있어 대학 본연의 연구와 교육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잇는 바 전문기관을 설립하여 전문인력을 흡수하고 개발에 따른 문화재 조사와 보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해야 할 것이다. 넷째, 대규모 국토개발 과정의 계획단계에 매장문화재관련전문인을 참여시켜 사전에 문화재의 파괴를 예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사중에 발견된 매장문화재는 이미 파괴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매장문화재에 대한 보존문제는 전공하는 몇몇 학자들만의 목소리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향유하고 계승하는 것도 몇몇 전공자들의 몫만은 더욱이 아니라 온 민족의 공동의 자산이요 긍지이기 때문에 모든 주민이 합심하여 보존하고 계발하여 후손에 손상없이 물려주는 전달자 역할에 충실애햐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문화재는 한 번 파괴되면 영원히 그 시간성을 보상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국제화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경쟁력있게 우리를 지켜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행한 가객의 시대는 갔으나·김성식 한때 대단한 청중을 몰고 다니던 인기 가객이 있었다. 그는 민족사적으로 치욕적인 을사조약 1년전에 출생하여 한일합방과 일제 강점기, 8·15와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민족수난기, 그리고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 등 격동이 연속되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다. 서편제 수업 후 동편제까지 두루 섭렵하여 계면조의 개발에 천재성을 발휘한 그는, 청구성에다 수리성을 겸한 특유의 목으로 전라도 육자배기목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구사하여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25세에 상경하여 ‘쑥대머리’로 데뷔한 첫무대에서 그는 일약 스타로 떠올라, 5명창시대 이후의 대표적인 소리꾼이 된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가객이었다. 격동기의 역사를 살아온 불가항력적인 불행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국창으로 명성을 떨치던 4·50년대가 정치적으로 혼돈과 불행의 시기였으며 검열과 탄압의 시대, 그리고 민족의 수난기였다. 더구나 해방 후에는 일시에 급격한 외래 문화와 서양식 공연양식의 범람으로 인하여 판소리는 대중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마침내는 회생불능의 지경에까지 다다른다. 그 벼랑에서 끝자락을 온몸으로 붙들고 절규하다가 마침내 1961년에 57세를 일기로 세상과 작별한 천재 가객, 어전과대도 아니고 인간 문화재도 아니었던 소리꾼, 그가 바로 천재적 국창과 불행했던 소리꾼이라는 칭호를 동시에 받는 임방울이다. 다소 장황해졌지만 이상은 천이두선생님의 ‘임방울의 생애와 예술’을 토대로 필자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그리고 불행했던 임방울시대의 종말과 함께 1962년, 드디어 소위 인간문화재라고 부르는 ‘중요무형문화재’제도가 문화재보호법을 모태로 마련되었다. 문화재란 물론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를 총괄한다. 문화재보호법은 무형문화재를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아가 문체부장관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무형문화재중 중요한 것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지정할 때에는 당해 중요무형문화재의 보유자(보유단체 포함)를 인정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행규칙에 의하면 보유자는 ‘중요무형문화재의 예능 또는 기능을 원형대로 체득·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자’여야 하고, 보유단체는 ‘중요무형문화재의 예능 또는 기능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이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문화재보호법에는 시·도지사가 그 관할구역안에 있는 문화재로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시·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다고 명시함에 따라 우리 전라부도도 1984년에「전라북도지정 문화재보호조례」를 마련하여 ‘역사상, 학술상, 예술상 가치가 크고 향토색이 짙어야’ 한다는 기준에 따라 현재 무형문화재로 14종 33명이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법적인 장치 마련으로 특히 전통문화예술은 마치 꺼져가는 생명이 긴급수혈을 받은 것처럼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그 안전판 위에서 보호·육성될 수 있었다. 판소리를 비롯한 국악계는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파장은 민족문화 전영역에 걸쳐 ‘우리것 되찾기’ 라는 중흥의 산파역이 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인간문화재’ 칭호가 당대 최고의 시력과 권위를 인정받는 영예로움의 상징이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미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의 명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온갖 사회의 천대와 멸시를 오로지 예술혼 그 하나만으로 헤쳐온 사람들이기에 누구나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잊는 전공자라면 누구도 인간문화재를 꿈꾸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마치 온나라 어린 운동선수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올림픽 금메달 획득인 것처럼. 그러나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아직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로 인한 역기능이 하나하나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먼저 전통과 전승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모순이다. 전승은 옛것이 원형 그대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라면 전통은 시간상으로 바로 지금, 즉 과거에서 출발한 어떤 것의 현재적 모습이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부터 전해 내려왔지만 과거와는 똑같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창조적으로 계승되지 않은 전통은 전통이 아니다. 이미 박제화된 유물이다 특히 예술분야는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은 그가 사는 시대와 그가 살아가는 방법에 따라 저마다의 독자적인 세계와 혼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같음’이 아닌 ‘다름’이 인정받고 오히려 존중되어야 한다. 적어도 ‘다름’이 틀림‘으로 몰리는 편견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원형은 근원과 바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훌륭한 스승은 ’나 만큼만 해라‘ 가 아니라 ’나를 능가할‘고 가르친다고 한다. 물론 어느 분야가 예외가 있겠냐마는 우리의 전통예술 특히 국악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마치 성불을 위한 수행자처럼 오랜 시간과 인내와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소 역설적으로 말하면 실은 그래서 경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생을 두고 절차탁마해야 할 예술인데 단거리 선수처럼 숨가쁘게 곧장 직진만 해서야 몇조금이나 가겠는가.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문화재보호법(무론 무형문화재 제도에 한해서 논의하고 있다)자체도 이론의 법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거야 어쨌든 간에 법 제정의 배경은 사뭇 다르다. 일본이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할 당시에는 그들의 전통음악이 이미 원형에서 심각하게 변형된, 다시 말하면 지나친 현대화의 길로 치닫는 추세로 인하여 전통음악의 ‘원형 보존’이라는 절박함이 문제로 대두하였다. 따라서 문화재보호법은 그러한 전통음악 보호를 위한 근거마련의 일환으로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취지는 일본의 사정과 정반대에 서있다. 우리는 오히려 단절과 인멸, 그리고 명맥잇기 차원에서 ‘원형보존’의 근거마련이 시급했던 것이다. 다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국악계가 계속적인 긴급수혈을 받을 정도로 허약한 상태도 아니고, 이미 전문대를 포함한 20개 대학에 국악과가 설립되어 대부분의 국악전문가 수급을 이루어내고 있다. 따라서 문화재보호법이 가졌던 본래의 목적과 취지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판단한다면 그 기준을 이제는 좀더 유연하게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이미 인간문화재가 많아서거나, 국악의 대중화가 실현되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험과 예술성이 높은 원로급의 명인들이 원형을 더 지도·감독해야 하고, 국악의 대중화·생활화도 아직은 할 일이 더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일이 유일하게 할 일이라고 간주하는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전통음악은 창조적 계승과 다양한 장르, 다양한 무대양식 그리고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의 재생산에 실패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서이다. 궁극적으로 예술활동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를 디딤돌로 삼아 펼쳐질 때 이른바 시장경제논리에 따른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형문화재에는 이 밖에도 공예기술, 의식, 놀이 부문이 규정되어 있다. 이 중에서 의식과 놀이 부문, 즉 민속부분에는 어찌된 일인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위도 띠뱃놀이’가 지정되어 있을 뿐, 도지정문화재는 전무한 실정이다. 오히려 이러한 부문은 전통사회에서의 마을과 기예와 신앙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보호·육성 그리고 전승의 가치가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추모가 음악과 종교적 제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미분화 종합예술이면서 가장 향토성이 짙은 축제, 그리고 전통농경사회 최고의 덕목인 풍년기원의 염원이 가득한 세시풍속인 의식과 놀이는 지금 당장, 국악분야가 그랬듯이 긴급수혈을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도 우리 도에는 이러한 놀이와 의식분야가 마을을 단위로해서 전승되는 곳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 현장은 농촌의 현실이 그렇듯이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현장은 전통농경사회의 유일한 흔적, -그것도 언제 끊어내고 내뺄줄 모르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그 끝자락을 외롭고 힘겹게 붙잡고 잇는 황혼의 노인네들만 우두망하니 있을 뿐이다. 전북의 전통적인 정체성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한 생활양식에서 찾아야 하고, 특히 문화재지정의 기준이 ‘짙은 향토성’ 에 있다면 명맥잇기마저 힘들었던 국악을 긴급처방해서 반석 위에 올려놓았듯이, 그리고 공예기술 분야에 장인들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명맥을 이을 수 있게 했듯이, 의식과 놀이 분야도 시급한 보호·육성이 간절한 상황이다. 적어도 ‘전통문화예술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취지와 전통문화예수의 균형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사라져가는 문화재, 우리 전통과 정신도 묻힌다·이춘구 전북인은 늘 패배자이고 역사의 반항아였는가?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아인가? 기자라는 직업 이전에 전북을 탯자리로 한 민초로서 학창시절 이후 가슴속에 품어온 의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풀지 않고는 내 자신이 바로 설 수 없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전북은 한국사 무대에서 변두리에만 서기를 강요받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비참한 현실 속에서 내 고향의 유래와 참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은 온고을 문화유산을 정리 보존하는데서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전북의 산하 곳곳에 흩어져 잇는 유형문화재는 선조들의 정신과 생활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전북의 유형문화재는 백제멸망 이후 백제기록이 사라지고 잦은 전쟁 때문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으며, 최근에는 문화재 당국의 무관심과 개발논리에 밀려 심하게 훼손되고 재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먼저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부터 현장 중심으로 관리 실태를 살펴보자. 사라지는 유적들 부안군 보안면 부곡리 산성은 서해안고속도로 용지에 포함돼 통째로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백제 최후 항전지 주류산성의 전초기지로서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잇는 부곡리 산성은 백제시대 테머리식(산꼭대기에 테를 두른 듯한 축성양식)토성이다. 바로 옆의 도롱이 산성과 눈앞의 고부성, 고부눌제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면 부곡리 산성의 중요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산성은 외성과 내성사이에 회랑이 있으며 건물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이렇듯 소중한 백제산성이 서해안고속도로 토취장으로 활용되면서 사라질 뻔 한 것이다. 이 부곡리 산성은 원광대하교 나종우 교수와 함께하는 KBS취재진의 집중적인 보도와 비판으로 고속도로 용지에서 극적으로 제척시키게 됐다. 한국도로공사는 지정문화재가 아니어서 저지른 실수였다고 변명하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부곡리 산성 옆의 도롱이 산성(일명 사산 산성)도 채석장이 두 군데나 허가돼 경관을 크게 헤치고 있다. 산성 바로 아래까지 골재를 채취해 50미터 가량의 절벽의 맨살을 드러낸 채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성 동북쪽의 동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일본 지원병이 갯벌에 빠져 참패하는 기록은 주류성이 백제부흥운동 최후의 항전지임을 증명하고 잇다. 부안지역의 백제 성들을 일괄해서 사적으로 지정하고 보호하는 대책이 서둘러져야 할 것 같다. 부곡리 산성 앞의 송림에는 장군총이라 불리는 백제고분이 놓여 있다. 해방 직후 도굴됐을 때의 목격담을 전하는 허노인에 따르면 높이 2미터에 너비 1.5미터의 큰 규모이고, 갑옷과 금관식 등 귀중한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백제 중방인 고부성 등을 연결시켜 판단컨대 장군총의 주인은 담로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재발굴 조사를 통해 장군총의 주인을 찾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일이다. 부안군 주산면의 나무개(木浦)마을에는 백제때 배를 맨 5개의 큰 바위가 남아 있었다. 배를 매어둔 바위를 통해 백제시대 항구를 재현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경지정리와 직강공사 등으로 바위 일부는 논바닥에 파묻히고, 일부는 마을 이정표로, 우물가 빨랫돌로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바위 하나에서도 우리는 백제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련만...... 부안군 주산면 사기점 마을의 대규모 도요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 취락 구조 개선사업으로 도요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고려 청자며 조선백자 파편이 마을 안에 나뒹굴고 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김제시 진봉면의 봉수대도 3년전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그러나 모부대가 봉수대를 군사용 헬기장으로 바꾸면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문화재는 우리 곁에 있다. 농촌 출신이면 누구나 마을 모정의 추억을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정도 근대화 물결에 밀려 대부분 원형을 잃은 채 사라지고 있다. 모정은 임진란 이후 호남지방에만 나타나고 조선시대 후기 농민의 민권의식 신장의 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당산과 어우러져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김제 장화동 모정을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제안한다. 또 필자는 일제 때 독립운동과 6.25동란의 현장을 사적지로 지정해 훼손을 방지할 것도 촉구한다. 전북은 최익현과 임병찬 장군이 정읍 칠보 무성서원에서 병오창의를 일으킨 것을 비롯해 진안 마이산의 이석용 장군의 호남의병창의 등 일제침략주의자에 맞서 구국 항전의 기치를 높이 세운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런 점에서 단군성전을 모시고 조선개국의 설화가 어린 마이산의 이산묘 역시 사적지로 지정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6.25의 격전지인 순창 회문산과 남원 지리산 등을 사적지로 보존하는 방안도 하루 빨리 세워져야 할 것이다. 유형문화재의 방치도 문제이지만 더욱 참기 어려운 일은 전북의 문화유산과 관련해 왜곡된 전설이 많다는 점이다. 왜곡된 전설과 방치된 사적 백제때 창건된 고창 선운사는 백제성왕을 속요 전사케 한 신라 진흥왕이 시주해서 창건된 것처럼 왜곡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선운사 석굴을 진흥굴이라 버젓이 이름 붙인 것인데 탐방객들도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진흥왕과 관련된 기록이 지워놓고 있다. 무주 구천동의 석굴 이름도 이를 나제통문이라 정하고 신라 김유신 장군이 굴을 뚫은 것처럼 전설을 왜곡하는 일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 굴은 1930년대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만든 것이다. 이름도 신라적 사관에서 벗어나 제라통문으로 고쳐야 한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하고 무슨 이유로 왜곡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비지정 유형문화재의 훼손만큼이나 지정 유형문화재의 관리도 소홀하기는 마차가지다. 백제 부흥군의 최후 항전지인 부안 주류성(전라북도 기념물 20호)은 정문 문루와 건물터 등이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제외됐다. 가장 중요한 핵이 빠졌으니 상식 밖의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화재 위원들은 현장을 답사하고 보호구역을 지정했는가 묻고 싶다. 바로 이 곳에 모 유력인사의 별장과 사슴농장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차제에 보호구역 바깥의 정화구역도 문화재지정의 취지를 살리는 환경정비가 시급하다고 하겠다. 왕궁탑의 국보 289호로 승격된 것은 전북의 문화 유산이 뒤늦게나마 재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임실 신평의 중기사 석등도 보물 267호에서 국보로 승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군(사적 391호)과 정읍 은선리 백제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57호)은 거의 방치상태이다. 고인돌과 고분이 비바람에 씻겨 무너지고 담장의 석재로 사용되고 있다. 김제 금구 월전리 산성(전라북도 기념물 85호)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름이 잘못 붙여진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제 때 고을 이름을 본따 구지지 산성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정된 유형문화재라 할지라도 학설이 엇갈리는 게 많다. 그 동안 전북 사학계의 끈질긴 노력으로 백제 부흥군의 최후 항전지는 부안 주류성으로 굳어지고 있지만 충남의 한산과 연기설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왕궁탑의 건립 연대도 문화재당국은 고려 초를 받아들이고 있다. 전북 사학계에서는 부여 정림사지탑과 모양이 같고 탑신의 체감법, 옥개석 끝이 하늘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과 고려초기 왕궁지역에 탑을 세울만한 세력이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을 들어 백제 후기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정확한 연대정립은 전북 사학계의 몫이다. 우리의 문화재를 우리의 손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유형문화재의 보존상 문제를 열거했다. 문제 투성이의 유형문화재 보존을 제대로 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반적인 재조사가 시급하다는 점을 문화재 당국에 고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유형문화재의 올바른 평가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중앙의 문화재관리국에 전북 출신인사를 진출시키고 문화재를 관리하는 모든 당사자가 솔선해서 제 평가를 받도록 헌신적 활동을 벌어야 한다. 완주 소양 송광사의 사천왕상이 보물로 지정된데 이어 대웅전의 삼존불좌상도 국보로 지정될 예정이다. 이는 그냥 굴러들어온 것이 나리라 주지 스님이 문화재 사랑의 열정으로 문화재 위원들을 설득한 데서 얻어진 과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와 함께 1사 1산운동처럼 1사 1문화재운동을 제창한다. 전북의 모든 기관, 단체 나아가 친목계마저 나서서 1문화재 가꾸기에 동참하는 것도 큰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또 하나, 문화재 안내판을 올바르게 세울 것도 권유하고 싶다. 1사 1문화재운동이 뿌리를 내리면 문화재 안내판도 저절로 세워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다. 마지막으로 전북의 새로운 역사창조를 다짐하는 역사헌장을 제정하고 역사헌장탑을 경기전과 덕진공원 등 주요 장소에 건립할 것을 주장한다. 원광대학교 사학과 나종우 교수는 기록되지 않은 패자의 역사라고 영원히 묻혀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전북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게 더 많다. 오늘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잇는 유형문화재부터 올바르게 해석하고 전북의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저 풍요로운 백제 관음보살상처럼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는 온고을 정신을 곧추 세우자. 태생적으로 드리워진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자. 전북인이 자주적 의지를 가지고 한국사의 중심에 서서 새 역사를 이끌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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