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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 [문화비평]
김대중 주필, 더 이상 장난치지 마시오!
강준만(2004-02-12 16:28:36)
97년 대선을 맞이하여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곡필이 서서히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미 「김대중죽이기」라는 책과 「말」97년 9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김 주필이 92년 대선시에 어떤 농간을 부렸는지 그걸 고발한바 있다. 그가 또 한번 그런 장난을 치게끔 내버려 둬야 하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번 만큼은 그런 장난질을 결코 용납해선 안될 것이다. 김 주필은 나의 고발에 대해 한번도 공식적인 반론을 제기한 적이 없다. 논쟁과 토론을 생명처럼 알고 살아야할 신문사 주필이라는 사람이 그런 침묵을 보인다는 건 나의 고발 내용에 수긍한다는 뜻일 터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나와 그의 ‘급’이 안맞아 괜히 나를 상대해 나를 키워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일보는 지난 몇 년간의 나의 「조선일보」비판에 대해 나를 철저히 외면하는 수법으로 대응해 왔다. 물론 보복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내가 책을 많이 보는 탓에 출판담당 기자의 ‘작은’보복이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일보는 지난 몇 년간 내 책에 대해선 단 한줄 아니 단 한글자도 소개해 주지 않았다. 놀라운 일관성이다. 그리고 「김대중죽이기」라는 책이 한국 출판계를 목졸라 죽인다는 식의 아주 저열하고 악의적인 보도를 한 적도있다. 어찌됬건 그런 식의 내용이 온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나는 김주필의 침묵을 나의 주장에 대한 수긍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김주필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다. 또 학생들에게 명예훼손을 포함한 언론윤리법규 과목을 가르치는 나의 입장에서 충분한 실증자료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김주필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도 없다. 김주필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한다 해도 내가 큰 손해를 볼 건 없으나 나는김주필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김주필의 인간적 반성과 참회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그의 위선 몇가지를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그의 이중성은 우리 언론의 고질적인 이중성의 축쇄판이기 때문이다. 그는 96년 2월 25일자 「NO라고 말할수 없는 사회」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매우 지당한 말씀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칼럼을 읽으면서 차라리 김주필이 어느 쪽이든 좋으니까 제발 이중성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지않을 수 없었다. 원론과 추상의 차원에서 지극히 옳은말씀을 해 독자의환심을 사 두었다가 구체적인 이유가 나타나면 표변하는 김주필의 그런 모습을 보는게 정말 지겹기 때문이다. 김주필은 그 문제의 칼럼에서 “일본 지식인은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랬단간 뼈도 못추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가 반대의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개탄한다. 반대의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는걸로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가장 심한 신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신문의 주필이 그런 거룩한 말씀을 하니까 어지러운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흔히 국익과민족의 이름으로 다른견해, 반대의 목소리를 압살한다. 국익이 무엇이고 어떤것인지에대해 국민적 컨센서스가 모아지기도 전에 일단 국익과 민족이라는 ‘마패’를 앞세워 그것에 반하는 모든 것을 반동으로 제압하곤 했다. 설혹 국익이 걸려있는 사안이라고 해도 그것을 수행하고 집행하는 과정의 문제는 다양하게 논의되어야 하는데도 심지어는 과정상의 이견마저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몰고가버리는 경우가 너무 허다했다. 기실 그것이 우리 정치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언제나 사물과 상황전개에 의문을 가져보고 그 의문 내지 이견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태도는 민주시민사회의 불가결한 요소이며 그 나라 지식층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양이다. 그것은 지적 훈련의 결과다. 그러나 우리처럼 이의를 말하는 사람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런 것이 훈련될 여지가 없다. 이렇게되면 한국사회는 일렬로 줄지어 가는 초등학교 학생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건정말 위선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북한문제에 대해 「조선일보」와 다른 생각을 말하기만 하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조선일보」의 주필이 천연덕스럽게 그런 고상한 말씀을 한다는게 믿겨지는가? 아니나 다를까 김주필의 그런 성향은 그가 자주 흘리는 ‘악어의 눈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가끔 언론을 대변하며 자성의 말을 하기도 하는데 도무지 진실성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김주필은 95년 11월 19일자 칼럼에서 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언론도 우리 사회의 정치의 ‘잘못된 관행’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대선과 총선에 얼마의 돈이 드는지 또 그 엄청난 돈이 어떻게 조달되는지 정치인도 알지만 기자도 잘 안다며 그렇게 다 알면서 이제와서 ‘노태우 비자금’을 천하의 대범죄인냥 대서특필하는 것은 ‘놀라운 언론의 위선’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잘못된 관행을 추적하고 보도하고 바로잡는 일에 언론은 소홀했다”며 “잘못된 관행으로부터 이탈하는 첫 시동으로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진심인가? 그렇다면 김주필은 언론의 대변인을 자처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 칼럼에 대해 구체적인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칼럼에 대해 반성 비슷한 말을 한건 97년 3월 22일자 「김현철, 안썼나 못썼나」라는 제하의 칼럼이 최초인 것 같은데 이것역시 진실성이 결여돼 있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기 4일전인 93년 2월 21일자 초판 신문에 ‘대통령의 아들’이란 제목으로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부나방의 세계에 대통령의 가장 큰신뢰를 지닌 대통령의 아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자칫 대통령주변의 기강과 질서를 깨는 결과를 가져올 것 ”이라면서 “대통령은 5년후의 아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은 성공한 퇴임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아들은 5년후 무엇이 될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썼다고 한다. 걸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기사는 김대통령의 강력한 ‘반발’로 앞에 쓴 대목이 모두 빠지고 제목도 ‘대통령의 친인척’으로 바뀐채 다음날 아침 배달됐다. 그 이후 김대통령은 아들에 대한 주변의 언급을 아주 싫어했고, 그때부터 ‘김현철’은 권력주변에서 확고한 금기가 돼 버렸다. 그 이후 필자는 김현철의 무소불위적인 행적과 간섭을 여러차례 들었으나 더 이상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거나 글로 쓸생각을 하지못했다....오늘의 ‘김현철 사건’이 귀결되는데는 언론도 결과적인 방조자의 혐의가 있다. 만일 우리가 권력의 압력이나 대통령의 심기에 구애받지 않고 또 언론계의 이심전심적 분위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의 행적과 간섭에 대해 심도 있게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어쩌면 오늘의 김현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대단히 솔직한 자기 반성 같지만 내가 보기엔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김주필이 권력의 압력이나 대통령의 심기에 영향을 받아 왔다는 걸 인정한 셈인데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야당 정치인들에 대해선 추상과 같은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그런 비판을 할자격도 없는 주제에 비판을 하는 모순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김주필은 이점에 대해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있다. 김주필이 최근 80년 광주의 취재기를 모아 엮은 「5.18 특파원 리포트」에 서 당시의 ‘혹세무민’에 대해 고백, 사과, 후회한 것 역시 ‘악어의눈물’이 아닌가 의심된다. 5.18당시 그는 조선일보 사회부장이었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서울에 돌아와 나는 비록 아무 도움도 되지는 않겠지만 이른바 ‘대치장소’의 분위기라도 전달할 수 있을까 해서 기사를 썼다. 별것도 아닌 스케치 기사를 놓고 당국은 ‘폭도’라는 단어를 쓸 것을 통과의 조건으로 냈다. 실강이 끝에 나는 안쓰는것보다는 쓰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총을든 난동자들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는 표현으로 고쳐썼다. 나는지금 그럴바에야 그 기사를 쓰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그 기사가 여러사람 입에 올랐었다는 것만은 적어두고 싶다. 결국 기사는, 신문은 그 시대 그 상황의 산물이며 기록일 수 밖에 없다는 초라한 자위를 하면서 말이다.” 김주필이 쓴 글엔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 나는 이 경우 도대체 ‘사랑’의 뜻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미디어오늘」(97년 5월 26일) 김종배 기자는 김주필의 변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평을 하고 있다. “김주필은 글이 끝날 때까지 ‘사죄’란 말을 단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사죄, 또는 그 유사어가 있어야 할 자리엔 ‘자위’와 ‘후회’란 단어가 새겨졌고 사죄의 심경이 배어나와야 할 문맥엔 상황론이 대신했다. 그리고 글 말미에서 이 한마디를 첨가했다. 자신의 손으로 광주의 실상을 보도 하지 못한 것은 ‘업보’라고, 무엇이 업보를 낳았는지, 그 인과의 법칙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채 그저 업보라 했다. 그리곤 자신과 광주는 악연으로 맺어졌다고 덧붙였다. 광주항쟁 때는 출판국장으로 광주와 악연을 맺었다고 술회했다. 광주와의 숙명적인 연줄이 악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인과의 법칙을 김주필은 너무 멀리서 찾았다. 자신을 악연의 굴레로 밀어넣은 그 인과의 법칙이 바로 자신의가슴에 자리하고있다는 사실을 김주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기에 한국언론을 대표하는 한 거두의 글은 옹색한 성명서가 돼 버렸고 김주필이 떨치고자 했던 원죄는 씻어지지 않은채 더욱 끈끈한 올가미가 돼 버렸다. 그리고 다수의 독자는 자신의 과오를 정당화 하기 위해 끊임없이 방어논리를 만들어 내는 지식인의 왜곡된 처세를 다시 한번 목도하는 씁쓸함을 맛봐야만 했다.” 그게 어디 김종배 기자 혼자만의 생각이겠는가. 김주필의 위선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건 국가와 민족은 물론 김주필 개인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생각을 바꾸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제발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여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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