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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0 | [사람과사람]
선비의 기개와 의로움으로 망국을 붙들다 -의병장 임병찬의 생애와 의거활동-
글·김양규 군산 향토사 연구회 회장 (2004-02-12 16:43:09)
나라가 위태로울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은 저서 『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은 백성의 군대이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싸우는것”이라 밝혔다. 의병의 존재가 민족의 생존을 가능게 한 정신유산이며, 국가존립의 필수적인 요건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있었다. 이곳 전북 출신의 의병활동 가운데 1895년(고종32)이후 경솔국치 전후 약 10여년간의 어려운 시기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항쟁한 군산출신의 돈헌(豚軒) 임병찬(林炳贊)을 빼놓을수 없다. 군산에서 첫울음을 울다 임병찬의 자는 시중(時中). 후일 중옥(中玉)이라고 고쳤으며 호는 돈헌 이고 본관은 평택이다. 1851년(철종2년) 2월5일 용래(溶來)와 송악왕씨(松岳王氏)의 맏아들로 옥구현 서면 대사리, 지금의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앞산 남산 기슭에서 첫울음을 울었다. 병찬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기로 소문이 나 4살 때 천자문을 배우고 8살 때 고을 백일장대회에서 장원을 하는등 그의 비범함은 널리 알려져있다. 12살 때 모친상을 당하자 아버지는 삼취로 파평윤씨(跛平尹氏)를 맞이하게 되었고 병찬은 그해 다섯 살인 위인 임천조씨(林川趙氏)와 혼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듬해 2월 상처하고 태인 매죽에 살고있던 여산송씨(礪山宋氏)를 맞이하게 된다. 부친은 총명하고 비범한 아들이 아전으로 만족할 위인도 아니고 크게 대성할 인물이라 믿었다. 그러나 병찬이 17세가 되던 1867년에 아버지가 병상에 눕게되어 가정을 책임지는 처지가 되어 옥구현의 서리로 들어가 형방을 맞게된다. 10여년간 정직한 ‘구슬아치’를 하다가 1877년 칩거하여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향리의 후진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면서 학자생활을 하였다. 점점 쇠퇴해 가는 국운과 타락해 가는 세태를 한탄하며 번민하던 그는 말없이 가사를 정리하여 1882년(고종19년) 32세때 태인현 산내면 영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입산수도자가 된 셈이다. 산골에서 조용히 고우와 후학의 지도에 전념하는 은둔군자의 소문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는 전라감사의 간청으로 1886년 전라동의 대동리가 되어 전주감영에서 근무하는 한편 전라도 거문도에 진을 설치하고 그 감독관을 맡았다. 이때부터 돈헌은 관직생활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포상하여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오위장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그해 7월에 그는 낙안군 수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아전들의 작폐를 없애고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고을을 바르게 다스렸다. 그리고 18844(고종21년) 이래로 체납된 세금 6만 7천량과 쌀 1천 8백여석을 무리없이 추징하여 오랜 작폐를 일소하는 업적을 남겼다. 조세에 밝고 공정한 돈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1890(고종 27년) 4월에 군산창, 6월에는 성당창, 7월에는 법성포창의 겸관사관이라는 관례없는 파격적인 겸직을 맡기도 하였다. 1890년 9월에 지방관의 만기인 과만이 된 그는 낙안군민의 유임의 진정도 뿌리치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산골로 되돌아 왔다. 집에 돌아온 그는 3년뒤 1893년 2월에 영동에서 같은 산내면이지만 순창군 접경의 화문산 아래 해발400m가 넘는 높은 산속 중송리로 이사하였다. 그가 공자를 모신 사당과 ‘흥학재’라는 학당을 지어놓고 모여든 제자들에게 학문만이 아니고 활쏘기와 말타기 까지 익히게 한 것을 볼 때 그의 깊은 의지를 알 수 있다. 본래 이마을에는 7호가 살았는데 그가 이사온 뒤에는 70호에 수백명의 호구로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그를 뒤따라 모여든 제자들이었다. 그는 철저한 유학자였다. 깊은 산골에 함열문묘옆의 영소전에 있는 공자 영정을 모사하여 이곳에 영소전을 짓고 모시어 제자들과 정성껏 제사를 모시는 유학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후 벼슬길도 사양하고 유학숭앙의 길을 걷고있는 선비의 기상을 가상하게 여긴 고종은 그가 사는 마을을 종성리로 고치도록 하였다 한다. 그후 그는 시기하는 소인배의 무고로 모역의 뜻이 있다고하여 그와 제 자두사람과 같이 진위대에 잡혀가 3개월이나 감방살이를 한 억울한 일도 있었다. 돈헌은 나이 55세가 되던 1905년 국권을 빼앗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간 침식을 잊고 통곡한 후 국권회복을 위하여 몸 바칠 것을 마음속에 다짐한다. 그리고 살아있는동안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상을 못한 한을 풀고자 아들과 조카들에게 의논하여 어머니 왕씨의 무덤을 그가 살던 종석산위로 옮기고 추상을 하였다. 그는 여막속에서 의병봉기의 때와 동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면암최익현과의 의병활동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의 만남은 1906년 면암제자들의 몇차례 연락으로 첫대면이 이루어져 사제의 지간으로 의기투합되었다. 두사람의 결합은 호남지방 창의의 기폭제가 되었다. 돈헌은 호남각지의 인사들에게, 면암은 남도의 유림에게 각각 격문을 보내 동참을 호소하여 적극 참여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112명이나 되었다. 면암은 윤4월13일 예정대로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치고 즉석에서 창의의 뜻을 밝혔다. 돈헌은 병기를 수집하고 뜻을 같이 하는 100여명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돈헌이 면암을 모시고 거의를 하여야 하는 대의 명분을 밝히니 따르기를 원한 사람이 800여명이 되었다. 각부서를 정한 의군들은 태인 정읍 내장산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 이때 몰려온 적군이 일본군이 아닌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임을 확인한 면암은 ‘동족끼리 싸울 수 없다’하여 의병에게 해산명령을 내리게 된다. 강제 해산명령에도 불구하고 12명이 남아 항거하던 중 일본군에게 구속되어 서울의 일본군 사령부에 이송된 최익현과 임병찬은 일본 대마도 감금 2년을 일방적으로 선고받고 대마도에 압송되었다. 이때 면암은 단식투쟁을 선언하고 선비의 기개를 지키다가 병환으로 향년 74세의 나이에 숨을 거둔다. 돈헌은 ‘나의뒤를 이어달라’는 면암스승의 유언에 따라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이곳 저곳에서 일본군경과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당시 각지의 의병활동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약 4년에 걸쳐 전개되었으나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동안 일본군이 실시한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인해 와해 되고 말았다. 돈헌의 제2차의병활동 고국에 돌아온 돈헌은 고종황제에게 스승 면암의 유소를 올리고 새로운 의병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그의 과거행적으로 인해 돈헌의 움직임 뒤에는 항상 일본관헌이 뒤따랐다. 돈헌은 1910년 8월 29일 치욕의 한일합방 소식을 뒤늦게 알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침식을 전패하고 통곡하다가 병석에 눕기까지 하였다. 간교한 일본관리는 돈헌에게 회유책으로 명치천황의 「은사금」의 첩지를 전하려 왔으나 꾸중만 받고 되돌아 갔다. 비로소 기다리는 연락이 왔다. 1912년 9월 대마도에서 같이 감금당했던 동지가 고종황제의 밀서를 갖고 온 것이었다. 그 밀서는 교지와 칙령 제3호로서 ‘비밀리 대한독립 의군부를 조직하라’는 내용이었다. 돈헌은 곧바로 두 손자로 하여금 전라북도내 8군을 돌아 충시의사의 후예를 찾아 원수를 갚고 나라를 일으킬 동지를 구하도록 하였다. 또 믿는 동지를 시켜 전라남도까지 광범위하게 동지의 규합을 꾀하였다. 1914년 2월 23일 각군의 대표 302명과 총대표 27명을 합하여 329명의 동지들이 참여한 비밀 조직을 마치고 거사준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수원에서 행동을 함께했던 김창식이 왜경에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에대한 모진 고문으로 조직이 탄로되어 대대적인 거사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돈헌의 마지막 저항과 순절 돈헌은 의거가 좌절된 것이 분하여 조선총독에게 면담을 요청하였다. 1914년 5월 29일 총독대신 경무 총감과의 면담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의 부당함을 책하고 ‘한국의 독립은 세계 평화의 법도’임을 역설하고 흥망성쇠의 순환법칙을 인정하고 욕심을 버리라. 반드시 한국 흥하고 일본은 망한다고 당당히 대의를 주장하였다. 그후 6월 3일 보안법위반의 명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긴급구조로 죽음을 면한 그는 그후 단식투쟁을 전개 굳은 절개를 내세웠다. 이에 일본경찰은 서둘러 재판을 열고 1년 감금형을 선고해 거문도로 이송하였다. 6월 15일 거문도 도착한 그는 천명에 따르겠다며 식사를 받았으나 끝내 선비의 절개를 지키었다. 돈헌은 1916년 5월 20일에 병환으로 한많은 세상을 마감했다. 향년 66세였다. 김양규 / 고등학교 교장을 20여년을 근무해왔다. 군산향토사랑 위원회를 맡고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을 지냈고, 현재 군장공업전문대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강의를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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