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0 | [문화저널]
고구려 신라 백제, 이들의 경쟁과 동반관계
-노종국교수의 ‘백제의 역사와 문화’-
정리·편집부
(2004-02-12 16:44:17)
삼국 관계의 기본전제
삼국의 역사가 전개된 시기는 중국자체가 부열되어 있던 시기로 중국의 상황과 삼국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시기에 삼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를 성립시켰고 삼국 상호간의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중국과의 대외관계를 통해서 자국의발전이나 자국의존립을 도모해 나갔습니다. 이 기간이 약 450년 정도입니다. 이오랜 기간동안, 삼국상호간의 관계와 삼국과 중국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로서 다음의 여섯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삼국이 대외정책을 결정하거나 추진해 나갈 때 그것은 삼국 각자의 독자적인 판단, 독자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 같으나 이점을 굳이 언급을 하고 가려는 이유는 종래의 일인학자들이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설정할 때 중국, 만주, 한반도, 일본을 둘러싼 고대동아시아 세계를 설정하고 이 동아시아 세계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 나갔느냐 하는 그 원리의 힘을 그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와 책봉체제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주변에서 자기 지역의 토산물을 가지고 예방을하면 그것을 조공으로 보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작호를 제수해주는 조공·책봉의 관계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지켜나가는 원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기본관계의 축은 중국대륙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조공, 책봉체제에서 벗어나게 되면 중국왕조는 이를 그냥 두지 않고 무력이나 강압적인 방법으로 제재를 가합니다. 이러한 일인학자들의 시각에서 삼국의 대외 관계를 본다면 고구려, 신라, 백제의 대외관계라는 것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에 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속적이고 주변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조공책봉체제론이 그렇게 강력한 국제사회를 움직일만한 질서, 원리로 작용을 했을까요? 세밀히 연구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공책봉체제가 구체적으로 작용했던시기가 있습니다. 그때는 바로 수나라, 당나라 때인데 그때는 중국이 통일되어 있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중국이 주변국가에 일정한 힘을 가했는데 예를 들자면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다거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이런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중국이 남북조로 나누어져 있고 5호 16국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에는, 비록 중국왕조가 고구려 백제에 작호를 제수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무력을 가지고 제재를 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삼국의 대외 관계는 고대 동아시아세계라는 틀속에서 볼 때도 독자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삼국이 자국의 대외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해 나가는데에 있어서 자국의 존립, 실리추구,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 유지라고 하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고 남보다 우위에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도 그렇고 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유로 삼국의 관계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서 우호와 대립, 경쟁과 동반이 되풀이 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삼국의 관계에서 그들이 실제적으로 국경을 접하고 서로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전개한 시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4세기 초부터라는 것입니다.
우리고대사회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있고 국외자료로는 중국의 삼국지에 있는 「동이전」이 있습니다. 삼국지 동이전을 보면 3세기 중엽경까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는 마한이라는 정치체제가, 그리고 경상도 지역과 낙동강 동쪽은 진한, 낙동강 서쪽은 요서라는 정치체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백제는 마한 54개국중의 하나이고, 통일된 국가는 마한이라는 정치체제를 구성했던 4세기 중엽경까지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백제가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를 완전한 하나의 국가로서 통합하고 신라가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를 통합하였을 때 그래서 강력한 통일국가로서의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맞대고 서로 접촉하고 서로 싸우고 교류하고 하는 것은 3세기 후반 이후가 된다고 보여집니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를 살펴보아도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에게 쫓겨나는 것이 4세기 초(313년)이므로 삼국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서로 교섭을 하고 갈등도 일으키고 하는 시점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 이후로 볼수 있겠습니다.
네 번째 한반도내에서 삼국간의 역학관계를 보면 고구려하고 백제가 서로 대립과 갈등의 기본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가 이대립의 기본축을 이루는 것은 신라보다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중앙 집권적인 국가체제를 갖추어 정복적 팽창을 도모했기 때문으로, 후발주자로 등장한 신라는 자국의 이익에 따라서 때로는 고구려에 붙기도 하고 때로는 백제가 붙기도 하면서 삼국관계가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삼국간의 역학관계의 전개를 정리할때는 먼저 고구려와 백제의 동향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삼국이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존립을 위해서 대립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동민족의식 동일문화의식이 깔려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민족과 대립이 있을 때 드러 납니다. 그냥 있을때에는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자기 왕족, 자기 국가를 위해서 싸우게 되지만 이민족과 부딪히게 되면 동일민족, 동일문화의식이 작용을 합니다. 이런의식이 있었기에 당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민족과 민족문화 전체가 유린될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신라와 고구려는 협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남북관계의 경우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섯 번째는 삼국이 서로 교류를 하기 시작한 것이 4세기 초이며 이것이 끝나는 것이 7세기 후반입니다. 약350년 긴 기간의 삼국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면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인가를 생각한 결과 이 시기를 여섯단계로 나누어서 보면 나을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남하와백제, 신라의 화호
4세기초부터 말까지 제1기로 백제와 신라가 서로 힘을 합쳐서 남하하는 고구려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4세기 초엽에는 중국이 5호16국으로 나뉘어 상당히 혼란한 시기로, 고구려는 한반도의 낙랑군, 대방군을 멸망시키고 요동족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게 됩니다.그러나 이 지역은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연의 세력이 뻗쳐오고 있어서 이들 세력과 충돌이 되는데, 이충돌에서 고구려의 수도가 함락되고(324년) 왕의 어머니와 왕비가 포로로 잡히고 왕의 아버지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피해를 보게 됩니다.
고구려는 서쪽진출이 좌절되자 진출의 방향을 남쪽으로 돌림으로써, 고구려의 남하책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백제는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입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즉위해서 왕위계승권을 확립하고 진씨를 왕비족으로 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을 크게 확대하여, 그세력을 가지고서 가야세력을 평정하고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해서 전라도지역까지를 자기영역으로 영합을 하는 형세에 들어섭니다. 이 시점에 고구려의 남하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백제는 신라와 화호관계를 맺게됩니다.
이시점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두 번의 큰전투, 즉 근초고왕24년의 치양성전투와 근초고왕 26년(371년)평양성 전투를 치르게됩니다.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는데, 이시기는 백제와 신라가 화호하여, 남하하는 고구려의 세력을 일단 저지시키고 고구려와 일정한 세력균형을 유지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왜·가야연합 對 고구려·신라연합의 대결.
4세기말부터 5세기 초까지는 제2기로 백제와 왜와 가야가 연합을 하고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을 해서 대적해 나가는 상황입니다. 이시기 신라는 석씨를 대신해서 왕위에 오른 김씨계의 내물왕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던 때로, 김씨계의 왕위 세습을 보다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신라는 이 체제를 뒷받침해줄 후원세력으로 고구려를 택함으로써, 한반도 내에서 세력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백제는 왜, 가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고구려, 신라세력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백제·신라의 동맹 對 고구려의 대결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엽으로 전반적인 상황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항해 나가는 단계로, 신라가 다시 백제와 연결이 되는 시기로 제3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변화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2기때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면서 정치적입지를 강화하려던 신라는 고구려 군대의 도움을 받은 대가로서 고구려 군대가 주둔을 하게됩니다. 이렇게 신라에 주둔해있던 고구려군이 처음에는 김씨체제를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이것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신라의 발전에 저해가 될 뿐아니라 더 나아가서 내정간섭에까지 이르자 더 이상 방치해둘수 없었고 가능하면 고구려의 세력으로부터 이탈해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고구려의 장수왕은 보다 적극적인 남진을 위해서 평양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고구려 남하정책에 가장 큰압력을 받는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북위에 고구려전제를 요구하지만 그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래서 신라에 화호를 요청하고 신라도 그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백제 신라동맹이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백제 신라 동맹은 공수동맹적 성격으로 어느 일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으면 군사원조를 하여 공동으로 대항하는 형세를 만들었습니다. 백제는 신라의 힘을 믿고서 남하하는 고구려의 압력에 대항을 하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웅진으로 천도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지속되는데, 이러한 동맹관계의 지속이 고구려의 남진을 일정 정도 차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한강하류점령과 백제 對 고구려·신라의 대립
6세기 중엽부터 말엽까지의 제 4기의 전반적인 상황은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가 백제와 대결하는 양상이 전개됩니다.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뺏긴 백제의 문주왕은 웅진으로 천도를 하는데 웅진천도 직후만해도 귀족들의반란으로 백제는 상당히 혼란했으나 왕권강화정책의 추진으로 혼란을 차츰수습하였고 안정을 이룩했으며, 그 토대를 바탕으로 성왕이 사비로 천도를 하여 국가 체제를 새로이 정비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습니다.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서 신라군과 가야군을 동원하는데, 이때 백제군이 중심이 되고 신라와 가야군이 합세하는 삼국연합군이 형성됩니다. 한편, 6세기 중엽이후 고구려는 전성기를 지나고 난후 상황으로, 내부적으로는 외척세력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고 남부전선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백제 성왕은 삼국연합군을 편성해서 고구려를 공격, 한강의 하류지역을 되찾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남쪽에서 쳐올라오는 이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백제와 신라를 떼어놓으려 하는데, 그 방법으로 이미 상실한 한강유역의 신라점령을 조건으로 걸고 신라와의 접근을 꾀합니다. 신라의입장에서 봤을 때 한강유역의 차지는 중국과 교역할수 있는 직거래의 교통로를 확보하는 일이 되므로 고구려와신라는 동맹을 맺게 됩니다. 백제는 벼르고 별러서 되찾은 한강유역의 땅을 불과 얼마후에 신라에게 고스란히 뺏기게 된 것인데, 이렇게 되면서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완전히 갈라지고 이후 다시는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합니다.
삼국의 상호 항쟁과 대립
6세기말에서 7세기초로 정리되는 제 5기의 전반적인 상황은 삼국이 서로가 꼬리를 물고 무는 형국입니다.
왕위계승 때문에 벌어졌던 내분을 수습하고 안정기에 들어간 고구려는 다시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탈환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한강유역은 삼국이 다 한번씩 차지해 보았던 곳이고 지리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천연 요지로서, 신라는 그것을 고구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고구려는 늘 그곳을 되찾으려 하면서 고구려와 신라는 갈등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구려·백제 연합 對 신라·당 연합의 대결
6세기 말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해 일하면서 이 통일된 힘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 중에 제일 심각하게 영향을 받은 고구려는 다행히도 수나라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쳤고 그 결과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의 실패 이후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겼다 하더라도 수나라와의 엄청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많은 손실을 보았으며, 고구려 조정내에서는 중국과 대립하기 보다는 화평관계를 맺자는 온건론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정세에 반발하여 영류왕 말기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사태가 일어납니다. 이시기가 바라로 7세기초에서 중엽에 해당하는 제6기입니다.
이후 고구려는 대중강경노선을 취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강압정책을 펴는데, 이런 연개소문의 정책과 고구려의 대외정책이 한반도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시기는 백제에서도 의자왕이 유력귀족들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변화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백제의 외교는 친고구려 외교로 기울이면서, 대야성을 함락하는등 신라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켰습니다. 한반도 내에서 고립에 빠진 신라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원조를 요청하지만 이때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어 협상에 실패합니다.
이에 김춘추는 당나라로 들어가, 당나라 태종이 만나 나당동맹을 체결합니다. 이 시기에 당나라의 일차적 공격대상은 고구려였고,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배후에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어야 했고 그 역할에 신라가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이에 신라와 당나라 두나라의 필요에 의해서 동맹이 맺어지면서 고구려를 먼저 멸망시키려 했던 공격정책을 바꿔 백제를 먼저 치고 난 뒤 고구려를 치는 것으로 작전이 수정되고, 그후 당은 신라의 군사적 물질적 지원을 받으면서 고구려를 멸망시킵니다. 그러나 한반도를 직할 영토화하려는 당의 정책과 삼국을 통일하여는 신라의 통일정책은 정면에서 충돌하는 성격의 것이어서, 신라는 하는 수 없이 대당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대당투쟁과정에서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면서 당군과 군사적 대결까지 강행하여 마침내 승세를 잡게되는데, 이렇게 당군을 몰아낸 신라는 불완전하게나마 대동강 이남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삼국의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