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문화저널]
영화에 대한 추억
-남진ㆍ문희 주연의 <울고 넘는 박달재>-
글ㆍ김용택 시인
김용택 / 섬진강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48년 임실 출생. 순창 농(2004-02-17 10:28:46)
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순창극장 앞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다. 저녁밥을 지을 때 쯤이면 언제나 극장에서 영화보러 오라는 방송을 했다. 눈물이 아니면 감상할 수 없다느니, 액션과 서스펜스가 넘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밥 앉히는 손이 내 손 같지 않고 맘이 과년한 섣달 큰애기 마냥 싱숭생숭 허둥지둥 했다. 책상 앞에 앉아 봐야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때 영화를 보기 위해 일주일분의 식량 중에서 한끼 씩을 굶어 모은 쌀을 쌀집에 팔아 영화를 보곤 했다. 아니면 영화가 삼분의 이쯤 끝나가면 극장 앞으로 나가 어슬렁거리다가 기도 눈에 잘보여서 공짜로 영화 끄트머리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 끄트머리를 보고 나오면 너무너무 서운하고 허전하고 미적지근하고 아무튼 맘이 맘이 아닐 때가 많았다. 그 무렵 본 영화가 아마 김승호 주연의 <역마>였다. 내가 그 때 가난했기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밤마다 영화관에서 살 뻔했다. 고등학교도 순창으로 간 나는 순창극장을 많이도 이용했다. 영화를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일도 뒤로 미루었다. 장동휘 박노식 독고성 허장강 등 가죽잠바 입고 가죽장갑 끼고 나오는 깽 영화를 나는 참 많이도 보았다. 우리 또래 나이든 사람들은 학생 시절에 다 겪었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4교시 끝나기를 기다리던 그 들뜬 심정들을. 나는 늘 그렇게 영화에 들떠서 살았다. 지금도 나는 새 영화가 개봉되는 토요일이면 괜히 기분이 들뜨곤 한다. 새 여자를 만나러 가는 바람둥이처럼 말이다.
1968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집에서 오리를 키우다가 망했다. 견딜수 없는 나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는데, 서울갈 차비가 모자랐다. 어머님께서 바람부는 강변까지 따라오시며 내 손에 쥐어 준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돈이 턱없이 모자란데다가 그 때 내가 신은 신발은 고무신이어서 나는 순창에 가서 운동화를 사 신어야 했고 걸칠 웃옷이 없어 사촌동생의 잠바를 입어야 했다. 신을 사신고 나니 돈이 모자라 나는 대전에 사시는 외삼촌 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내가 서울을 간다는데 차비라도 줄 것 같아서였다. 나는 무작정 대전행 기차를 탔다. 차비도 모자란 불안한 심정으로 기약없고 정처없이 난생 처음 집을 나선 나는 무섭고 겁나고 두려웠다. 한치 앞이 안보이는 캄캄한 앞길이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어떻게 대전에 내려 유성까지 갔는지 지금도 나는 캄캄하기만 하다. 외삼촌은 그 때 유성에서 빵장사를 하고 계셨다. 밀가루 반죽을 하시다가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는 나를 맞이하셨다. 나는 이틀인가 삼촌 집에 묵게 되었는데 어느날 밤 나는 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삼촌이 적어도 서울갈 차비는 주겠지 하는 배짱으로 집에서 가지고 온 돈으로 본 영화는 남진 문희 도금봉 주연의 <울고 넘는 박달재>였다. 남진이 외아들이고 문희가 남진에게 갓 시집온 새댁인데 결혼을 한 아들이 아내와 같이 있는 꼴을 보지 못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들에 나가 같이 일하는 꼴도 못보고 밤에 같이 잠자는 꼴도 못보고 사사건건 끼어들 자리 안 끼어들 자리 끼어들어 신혼의 단꿈을 깨는 시어머니의 오기가, 그러나 이유있어 보이는 영화였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며 혼자 마구 울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던지 나는 혼자 숨을 죽이며 울었다. 집에 와서 일기를 쓰면서도 일기장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나는 울었다. ‘눈물로 쓴 일기’는 잉크가 번졌다. 내 신세가 영화 속의 문희나 남진이나 도금봉처럼 서러웠을까? 아마 그 영화 속의 어떤 슬픔이 아무런 약속도 희망도 없이 집을 나온 내 답답한 신세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 이튿날 나는 턱만 윤정희 닮은 외삼촌의 처제와 같이 집을 나섰는데 그 처제가 촌티가 덕지덕지 붙은 나와 동행하는 것이 쪽팔렸던지 서울 가는 표를 끊어주고는 나더러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 5백원인가 얼만가를 주는 것이었다. 뽀짝 가지도 못하고 이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던 나는 혼자 떨어지는 게 두려웠지만 잘되었다 싶어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시간이 많이 남았기에 무조건 대전역 앞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 때 내가 본 영화는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 영화 <남자식모>였다. 오늘 영화이야기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