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문화저널]
귓밥좀 파줍시다
글ㆍ이병천 소설가
이병천 / 56년 완주 출생. 전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문화방송에(2004-02-17 10:30:16)
사람마다 제각각 천차만별이겠지만, 누군가 나에게 어린 시절을 뒤돌아볼 때 가장 자애스럽게 남아있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하나 꼽으라면 그건 바론 내 귓밥을 파주시곤 하던 정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흔을 넘긴 이날 이때까지도 그날들을 머리에 떠올리자면, 꼭 싱건지 국물이라도 귀 안으로 흘려넣듯 나는 마냥 시디신 웃음이 치밀어올라 온몸이 간지러워지곤 한다.
하물며 우리 어머니가 손수 귓밥을 파주던 그때 그 순간에서랴.
“여그 한번 누워봐라야.”
귓속이 근질거린다고 괜한 투정을 부릴라치면 어머니는 먼저 그렇게 자기 넓적다리에 내 고개를 누인다
“안 아프게 파야되야!”
“아프먼 늬가부텀 말을 히라잉?”
어머니가 그 솔잎같은 머리핀을 뽑아들기도 전에 나는 벌써부터 귓속이 한없이 간지러워져서 몸이 배배 꼬이고 어머니의 품에서 풍기는 희미한 젖냄새로 인해 어쩐 일인지 전신마취라도 당하듯 눈이 저절로 감기곤 했었다.
마루에 그렇게 어머니는 앉고 나는 누워서 귓밥을 파던 날이면, 어디 나도 한번 네 귓속이나 들여다보자하듯 햇볕이 내 귓속을 따뜻하게 파고 들어오는 게 느껴지기도 하고, 우물가 둘레로 소담스럽게 피어낸 채송화가 나를 따라서 간지럽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가까이도 보이던 게 아직도 내 기억에는 선연히 살아있다.
“아가, 여그 봐라야! 귓밥이 우리집 널벅지보다 더 크다.”
“어떤 널벅지?”
“쩌그 저 보리쌀 씨는 그릇 말여. 그렁게로 늬가 여태까장 이 에미 말도 안듣고 맨날 말짓만 허고 댕겼는갑다.”
“히히히…긍게 더 파줘.”
“인자 눈 씻고 봐도 없는디?”
“아직도 근지럽단 말여어.”
“그려?…그먼 돌아누워봐라.”
귓밥을 다 파내고나서도 나는 그냥 일어나기가 몹시도 서운해져서 내내 그렇게 졸라대곤 했었다. 그러면 내 어머니는 또 그걸 다 헤아리시고 그냥 건성으로만 슬슬 귓바퀴 언저리를 문질러주시던 것이었다.
내 귓밥을 파주던 어머니!… 그래서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말을 듣게 될 때나 무슨 <자애스러운 어머니>와 같은 표현을 대하노라면 우선 먼저 내 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게 되고, 그리고는 이윽고 우리 어머니가 내 귓밥을 파주던 모습이 떠올라오는 것이다. 그렇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혹은, 어머니란 존재는 확실히 전적으로 자애스럽다 하는 긍정과 함께.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뒤로 점차 나이도 들고 또 몸도 귓속도 커지면서 하냥 어머니에게 귓밥을 파달라고는 차마 조르지 못해서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그 많았던 귓밥들을 그때마다 어떻게 다 파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결혼을 하고 가정이라는 걸 꾸리고 생활하던 어느 날부터인가는 신기하게도 내 아내에게 귓밥을 좀 파달라고 하면 썩 좋겠구나 하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까짓 발상이 신기할 게 뭣이냐고, 당신은 신기할 것도 세상에 참 많아서 좋겠다고 누군가 괜히 초를 치고 시비를 걸 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언제부터인가, 세상 거의 모든 남편들은 한번쯤은 자기 어머니와 아내를 비교해보듯 나 역시 그랬으며, 또 무엇보다도 아내는 이미 한 아이의 어엿한 자모(慈母)가 돼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귓밥을 좀 파달라고 해야했던 내 심리기저, 그 복잡한 구조의 일말(一抹)에는 비록 내 엉뚱한 방식이 늘상 그 모양이긴 해도 아내를 진짜 시험해볼 수 있는 문제 하나로 그 일이 문득 무엇보다 적절하리라고 여겨졌었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생각을 좇아 그렇게 요구했다.
“어이! 귓속이 아조 근지러운디 좀 봐줄랑가?”
“어디, 이리 한번 누워봐요.”
어릴 적 내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아내는 제 넓적다리에 내가 고개를 베고 눕도록 했다. 성공이었다. 온몸이 오그라들던 간지러운 추억 하나가 내게 다시금 현현되는, 즐겁기 짝이 없는 상상과 함께 나는 아내에게 내 귓속을 맡겼다.
“암시랑토 않은데요?”
“잘좀 봐.”
아내는 내 귓불을 이리저리 잡아당겨 속을 열어보면서 제법 샅샅이 살피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 그 뿐.
“괜찮은데요, 뭘!”
“그러면 귓밥 때문에 근지러운 것잉게로 그거나 좀 파주지.”
“안돼요.”
딱 자른 한 마디로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왜 안되느냐고… 아내는 우선 자기가 눈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했다. 눈이 나쁘기 때문에 까딱 잘못하다가는 고막을 터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짜피 안경을 쓰고 귓밥을 팔 텐데 그게 무슨 걱정거리냐고 당연히 나는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남의 귓속을 손대는 일은 아무래도 불안하고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아예 내 고개를 밀어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속아지가 좀 틀어지고 말았다. 서운한 것은 이루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귓밥을 다 파주고 난 뒤에 흔히 남아있던 그런 서운함과는 사뭇 다른 감정일 수 밖에 없다.
“괜찮아. 살살 파면 되고, 아프면 내가부텀 소리를 지를께.”
“차암 이상하네요. 남의 귓속을 어떻게 파라는 건지!…”
“이상한 건 너다. 그러먼 이발소 여자들은 손님들 귀를 어떻게 판다냐?”
“그러면 이발소에 갈 때마다 귀를 파든지요, 하여간 나는 못파주니까.”
“……?”
나는 참말로 황당해져버리고 말았으며, 급기야는 별스런 오해도 다해보기에 이르렀다. 이를테면 아내가 내 귓 속에서 나오는 귀지를 아주 불결하게 여기는 때문은 아닌지 의심해보기도 했고, 그렇다면 만약 내가 방귀를 뀔 경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시험해보자고 일부러 그녀 앞에서 가죽피리가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내본 적도 있었다.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어줍잖게 얻어 들었던 얘기를 종합해서, 아내가 혹시 섹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은 아닌가 넌지시 확인해보기도 했었다. 물론 그 이유는 맹세코-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하거니와- 절대로 아니었고, 방귀를 내가 어떻게 뀌든 아내가 별스럽게 꺼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나는 그 뒤로도 아내에게 여러차례 귓밥을 좀 파줄 것을 간청하기도 했고 또 더러는 은근히 협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내는 귓밥은 자기 스스로 파는 것이라고 점잖으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어서 나는 매번 쓴 침만 삼켜야 할 뿐이었다. 이제 그 행복한 귓밥파기를 다시는 못해볼 지도 모른다는 어떤 해괴한 절망감만 커지는 채.
그런 어느 날, 나는 정말이지 부아가 치밀어서 이발소를 찾아가고 말았었다. 잘 아시겠지만, 요즘들어 귓밥을 파주는 이발소라면 대개가 그렇고 그런 곳들이다. 칸막이가 돼있고, 그 안에서 머리를 깎는 일보다 손톱이나 다듬어주고 귓밥을 파주고 또 남자들의 팔다리를 주물러대다가 팁을 받아가는 여자들이 기생하는 곳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홧김에 서방질, 아니 오입질 비슷한 걸 하러 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부터 먼저 밝히자면, 정말 아니올시다 였다. 그 이발소 여자는, 논두렁에 나있는 무슨 쥐구멍이라도 작대기로 마구 쑤셔대듯 내 귓속을 성의없이 왁살스럽게 쑤셔대고 있었다. 내가 몹시 불만스럽게 비명을 지를라치면 여자는 오히려 멀뚱한 눈으로 나를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기껏 아프지 않게 귀를 파준다는 게, 마당 쓸어준답시고 사돈데 팔촌댁 뒤안으로 싸리비를 들고나간 년처럼 그저 건성으로만 깔짝거리던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아내에게 끝내 말하지 못했던 다른 내막이 있기는 하다.
그때 그 시절,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에서 포경수술을 받곤 했었다. 의무병에게 막걸리 두어 됫박만 들고가면 손쉽게, 그리고 세모꼴이든 네모꼴이든 원하는 모양새로 얼마든지 수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난처하고 고역스러운 일은, 그 가엾은 처지의 젊은이들일수록 시도 때도 없이 발기현상이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그럴때면 이제 막 포경수술을 마친 터라 그 통증이 여간 아니기 마련이었는데 그때마다 발기를 가라앉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귓속을 간질이는 일 말이다. 그러니까 예민한 귓속을 간지럽힘으로써 신경을 귀쪽으로 집중시키게 되면 팽팽하게 발기돼있던 거시기 녀석이 어느 결에 스르르 다시 쪼그라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신경을 그쪽으로 집중시킨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비록 다른 부위처럼 커지거나 작아지는 현상은 없을지 몰라도 그곳 역시 하나의 분명한 성감대인 까닭이다. 내가 아내에게 드러내놓고 고백하지 않은 내막이라는 게 바로 그런 은근한 심사다.
귀 역시 성감대의 하나라는 사실쯤을 아내가 물론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솔직하자면, 그걸 좀 드러내놓고, 남들에게 비난받을 걱정조차 할 필요없이, 합법적으로 자극받고자 하는 내 꿍꿍이속을 아내가 간파하고 있는지 어쩌는지 내가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이발소에서 돌아오던 길 내내 나는 참말로 섭섭했으며 또 울화통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귓밥도 파주지 않는다고 아등바등 다투다가 아내를 쥐어팰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눈밝은 여자를 따로 구하자고 이혼소송을 해볼 수도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말이다. 그날 마악 집으로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엄마, 나 귓밥좀 파줘!”
내 아들놈이 제 에미에세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내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저 어린 시절, 내 귓불을 흘러가던 시디신 웃음을 그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들놈도 이제는 그 신맛을 알고 있구나!
“엄마, 나 귓밥좀 파달라니까?”
“엄마는 눈이 나빠서 안돼. 아빠한테 파달래라.”
“자기가 할 일을 남에게 미루지 맙시다!”
“그게 왜 내 일이여 임마. 면봉으로 늬가 알어서 살살 파면 되는데… 고막은 아주 약하니까 조심하구.”
나는 그날 이후로 내 아들놈의 귓밥을 전담으로 파주고 있다.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는 내 믿음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때마다 왠지 부아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다. 눈이 좀 나쁘면 나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서로 티그락태그락거리며 귓밥을 좀 파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내 아들녀석도 애비가 귓밥을 파주는 일을 더러 고맙게 여길지언정 마치 손맛없이 담가진 싱건지라도 떠먹듯 표정이 떨떠름하기 일쑤다. 나 역시 만약 그 어린 시절 우리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귓밥을 파주시곤 했더라면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을까?
물론 그 뒤로 내 귓밥은 오늘날가지 내 스스로가 파고 있다.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전과 달리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들이 모두 그렇고 그럴 뿐인 험한 세상이라서 그런지, 내 귓속은 자나깨나 영 개운치가 못하다. 더러 눈이 참 밝은 누군가가 내 귓밥이나 좀 파주는 일은 이제 아조 없을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