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문화저널]
독자와 함께
문화저널(2004-02-17 10:31:48)
지난달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느새 십년이야!’라며 같이 기뻐해 주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동안 문화저널에 음으로 양으로 도움주신 분들이 일이십명이 아닙니다. 비록 그 수는 적을망정 전국적으로도 정예화(?)되었다고 자부하는 독자들이 늘 문화저널의 든든한 힘이었고, 원고료도 없는 이 염치없는 잡지에 고운 글들을 보내주신 필자들이 우리의 ‘빽’이었습니다.
이번 창간 10주년 기념호에서는 그동안 연재되었던 몇몇 꼭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꼭지들이 등장합니다. 일년여 동안 백제의 불탑을 진지하게 강의해주신 천득염 선생님의 연재가 마무리되었고, 전문 영화평론가들의 영화이야기도 틀을 바꾸었습니다. 새롭게 시작되는 연재꼭지의 하나는 김두경 선생의 음식이야기입니다. 문화저널 편집위원을 지내기도 했고 예전에는 <김두경의 옛말사랑>이라는 꼭지를 연재하기도 했던 김두경 선생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젊은 서예가입니다. 또 하나의 연재꼭지는 전북의 자랑스러운 시인 김용택 선생이 끌어가는 <김용택의 영화이야기>입니다. 보기와는 달리(?) 영화를 대단히 좋아하는 이 시인은 늘 소년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노래합니다. 그가 펼쳐보일 영화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기대해 주십시오. 더불어 그동안 성의있는 연재로 문화저널과 독자들에게 글읽는 즐거움을 주셨던 전남대 천득염 교수님과 홍성희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창간 10주년 기념호에는 대형 특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전북문화의 80년대와 90년대를 중간결산하는 이 꼭지는 그동안 문화저널에 쌓여온 자료들을 텍스트로 활용하면서 지역문화의 중심에 서왔던 분들을 인터뷰하면서 정리되었습니다. 문화저널은 창간 10년의 의미를 지역문화의 발전과 등치시키고 그 미래를 전망해 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호응을 기대합니다.
창간 10주년 ‘후원인의 밤’
문화저널은 지난달 10일 ‘후원인의 밤’을 열고 전주 코아백화점에서 지난 10년간의 사업들을 정리, 보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날 행사에는 한승헌 변호사,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장영달 국회의원, 전라북도의회 황병근 의원과, 전북예총 김남곤 회장, 국립전주박물관 이종철 관장, 전봉호 변호사, 전주방송 백낙천 사장, 전북일요시사 김종량 편집국장, 시인 김용택, 안도현씨를 비롯 70여명의 후원인이 참가, 문화저널 10년을 축하했다. 문화저널 발행인 천이두 교수는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을 문화저널이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후원회원들의 그간의 보이지 않는 격려와 질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무한한 미래를 향해서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지역문화를 선도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이날 후원인의 밤 2부 행사로 마련된 ‘문화저널 발전을 위한 제언 및 간담회’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문화저널의 글 속에는 시대를 보는 고운 마음씨가 있다”며 창간 10년을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문화저널이 “동학농민혁명 시민강좌를 처음 다루기 시작하는 등 지역 문화 발굴에 앞장서왔다”고 치하하고 후원인들에게는 꾸준히 후원활동을 벌여 문화저널의 가치를 높여나가는 동기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영달 국회의원과 황병근 도의원도 삶 속에 항상 함께하는 문화저널로 자리매김해 줄 것을 부탁했다.
전라도에 사는 뜻
김영민 한일신학대학교 교수·철학과
한일신학대학의 김영민 교수가 문화저널에 글을 한 편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지역문제가 어디 새삼스러운 문제이겠습니까만, 이 가슴 따뜻한 부산출신의 철학자가 현지(?)에서 직접 겪고 느낀 이야기는 진솔한 감동을 줍니다. 전라도의 독자들께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며 수줍게 보내주신 이야기를 같이 느껴보십시오. (편집자주)
나는 예언자도 아닌 주제에 늘 고향에서 서운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껴왔다. 아마 고향이라는 귀속감에 따르는 기대치가 높은 탓에 생기는 흔한 감상일 것이다. 어쨌든 그간의 내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오히려 집 밖에서, 그리고 고향인 부산 이외의 지역에서 매사가 욕심 이상으로 잘 풀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곤욕스러웠던 부산에서의 강사생활을 마치고 의외로 이곳 전주의 조그만 대학에 임용되자, 필요이상의 애향심으로 무장한 이웃들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워했지만 나는 계모의 그늘에서 가출하는 콩쥐의 심정으로 선선히 이 낯선 곳에 발을 옮겼다.
나는 소위 ‘지역감정’의 볼모가 된 적은 없었다. 이것은 내 심성 이전에 내 삶을 주도하는 사고 방식이나 형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주로 경상도에만 붙박혀 살아온 나에게 과연 ‘전라도’는 낯선 땅이었다. 당연히 고향이 아닌 곳에서 느끼는 인상이야 우선 낯설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라도에 살게 되면서 느꼈던 그 낯섬은 표정과 인상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구조의 문제라는 점에 그 특이성이 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안정되고 주변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나는 생생한 체험을 통해 이곳 전라북도의 소외상을 알게 되었다. 책이 일러주던 것을 이곳의 지형과 풍물, 그리고 언어들을 만나면서 그 실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가 이 곳 지식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쉽게, 그러나 절실하게 드러나는 것을 접하면서 나는 이입된 아픔에 몸을 떨었다. 아는대로 남한의 근대화의 축은 주로 정부의 이원구조였고, 부산과 서울에서만 살아왔던 나의 체감에 잡힌 근대화 역시 그 구조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내 전라도 생활은 작금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근대화 비판담론이 추상으로 날지 않고 그 터를 얻게 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사회학적 분석만으로 쉽게 드러낼 수 있는 영호남 대립구도와 이에 따른 지역 패권주의의 출발점은 박정희 정권아래의 3선 개헌을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 내력은 이미 여러 논자가 자세히 밝힌 바 있어 진부할 정도다. 또 여러 분야에서의 기독권을 특별히 경상도가 독식해 왔으며, 특히 전라도가 소외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미 자세한 통계를 통해서 상식화되어 있다. 혹자는 ‘내부식민지’를 말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가.
근대화의 성격과 관련된 사회구조적 차별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역사 감각이다. 전주에 살게 되면서 나는 오래전 교과서에 얼핏 스쳐 지나가고 말았던 우리 역사의 한부분을 손 끝에 잡힐 듯 다시 느끼게 됐다. ‘백제’말이다. ‘백제예술전문대학’이니, ‘백제쇼핑’이니, ‘백제식당’을 만나는 것은 내게 조금 과장한다면 ‘충격’에 다름 아니었다. 아, 얼마만의 백제인가. 그 ‘백제’가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경주로만 내빼던 여행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윤대녕의 단편 「신라의 푸른길」이니 현인의 <신라의 달밤>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남겨놓은 흔적을 확인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산가족’을 다시 만나는 감동이었다.
강연이 잦은 나는 다니는 곳마다 자주 말한다. “전주(全州)란 완벽한 고을이라는 뜻이지요. 나는 전주에 살게 되면서 그나마 남한이라도 이제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라도에 사는 뜻? 그것은 바로 우리 근대화의 뜻을 캐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 역사의 뜻을 캐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변방에서 중심으로
오정요 방송작가
그래도, 경원동 우체국 골몰이며 처처의 요새지대 술집들을 중뿔나게 오갈 때는 가끔씩 ‘원고 좀 주세요’ 어쩌구 하는 황송한 부탁으로 몸둘 바를 모르게 하더니, 그런 공치사도 들을 수 없게 된지 4년만에 드디어 ‘접속’에 성공! 어떤 시인은 ‘문화저널을 옹호함’이라는 시까지 써서 문화저널을 예찬했거니와, 이제와서 새삼 문화저널을 예찬함에 새로운 수사가 필요치 않은바, 그저 조용히 앉아 배달오는 족족 일심전력으로 읽어보는 것으로 내 마음의 상찬을 전할 수 있을지. 글쎄 나는 이렇게 ‘끈질긴’ 잡지가 다른 지역에도 있는지 철저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절이 하도 수상하던 때에는 간혹 ‘문화주의자들의 사치’라는 혐의도 없지 않았던 바, 그것은 그 수상한 시절에 일심으로 마음 쓸 일이 따로 있었던 탓이리라. 그것의 손익계산서는 21세기적으로 차치하고, 어떻든 그 시절의 문화저널이 ‘변방’이었다면 이제 일심으로 마음 쓸 일도 없이 갑자기 열린세상, 황망중에 ‘게바라’가 21세기 신상품으로 불티나게 팔린다는, 이름하여 수상타면 더 수상타 할 이 시절에, 까짓거 이런 오진 잡지 하나 ‘중심’으로 자리잡은들 누가 나서 탓하리오. 말난김에, ‘문화’에 더하여 ‘저널’에 힘을 실어, 구독료도 팍팍 올리고, 그 여세를 몰아 난공불락 방송사 철탑도 높은 여의도 바닥에 ‘문화저널 서울지사’ 하나 열게 된다면, 그곳에 이 손 쓸일 있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백골이 진토되어…….
다시 전라도의 정신으로
문형식 『노령』편집장
내게 문화저널은 백제기행 생활문화기행의 주관자요, 여러 기획 공연물의 참신함을 불러일으켰던 선두주자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남녘에서 불어오는 흙냄새나는 사진자료와 편집 등은 흔들리는 전북문화에 청량감을 주는 비법을 지닌 잡지로서 늘 깔끔하고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문화는 곧 정신이다. 특히 전라도의 정신은 정의와 민주, 피끓는 동학정신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 전북 전주의 정신은 문화를 사랑하는 예향의 핏줄기를 자연스레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점일 것이다. 그 점을 꼬집어 밝혀준 게 문화저널이다.
문화저널이 계속해서 탁월한 문화정신으로 고장의 흔들리는 역사를 바로잡는데 큰 중심이 되어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지역문화를 이끄는 지킴이
이진영 독자
쌍둥이도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요즘, 10년이란 결코 짧지 않다. 그 긴 세월을 개미처럼 잘도 이끌어온 문화저널, 매달 언니에게 배달되는 문화저널을 훔쳐보는 재미로 대학생활을 보냈고 문화저널의 눈을 통해 우리 지역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문화저널의 절대적인 애독자가 됐다. 나처럼 소리 높여주는 독자들이 있기에 문화저널도 어느덧 열 살이란 나이를 먹었으리라.
문화저널은 지역문화를 이끄는 문화지킴이로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자신한다. 거침없고 힘찬 발걸음으로 또 다른 10년을 향해 뛸 문화저널에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발전이 있기를…….
기쁜마음으로 기다리는 친구
김양윤 독자
바쁜 일상에 쫓겨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어렵게 약속을 하고는 하루를 들뜬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결국 몇시간 수다로 채워질게 뻔한 만남이지만 이렇듯 기다려지는 것은 만나게 될 대상이 편하고 좋은 친구이기 때문일테지요.
매달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주며 생각하고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가 생각납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해주는 편하고 좋은 친구이지요. 그 친구 문화저널이 머지 않아 생일을 맞는다기에 축하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10년 뒤에도 다시 이런 편지를 띄우고 싶네요.
이제 제법 손이 굵어진 농군
정훈 전북대 신문사 편집장
문화저널을 볼 때마다 이제는 손이 제법 굵어진 농군이 떠오릅니다. 문화적 토양이 튼실한 우리 전북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연이 아닐 겁니다. 국악이면 국악, 연극이면 연극, 문학이면 문학 등 전북문화 전반에 걸쳐 몸체는 물론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고 품에 안은 모습을 보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월이 지나 변해야 할 모습, 변하지 말아야 할 우리의 모습까지도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그 발전의 원천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궂은 일 마다않고 날밤을 지새면서 문화저널을 만드는 일꾼들의 애정어린 열정이 없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요.
요새는 무슨 이유에선지 소중한 우리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십년간 ‘문화가꾸기’의 외길을 걸어 온 것처럼 앞으로의 십년, 그러니까 문화저널 창간 20년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뿌리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어느새 열 살이 되었단다
양병삼 기독교 전북방송 PD
세상사람들의 관심과 축복 속에서, 얇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만 같건 흑백표지로 모습을 드러냈던 문화저널이 어느새 열 살이 됐다. 조금은 칼라풀한(?) 표지에 두툼해진 모양새로.
그동안 문화 또한 중앙집권적인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도 지역문화 창출은 요원하기만 했는데, 문화저널 10년사는 그런 우리들의 피해의식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데 결코 작지 않은 성과물이었다면 너무 과장일까.
월간지 지령 114호가 갖는 비중은 백제기행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 무게가 실리지 않았나 싶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고 지역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이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화의 영원한 숙제인 ‘대중성 확보’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는 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만하면 됐지’라는 마음을 갖게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전하기만 하다. 그 허전함을 우리 마음 속에서 지워나가야 할 일이 열 살이 되는 문화저널에 던져지는 화두인 듯싶다.
자타가 공인하는 지역문화운동의 기수로서 문화저널 열 살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거는 기대는 자못 크기만 하다. 건강한 지역문화 공동체 실현을 위해서 땀흘리는 문화저널의 미래상을 그려보는 일, 비단 나만이 아니라 문화저널의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