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1 | [특집]
전북문화 10년, 그 의미와 전망
21세기 전북문화, 그 가능성을 본다
-21세기를 향해 뛰는 사람들-
글ㆍ최주호 손희정 문화저널 기자
(2004-02-17 12:07:15)
■ 국악 / 전주국악실내악단ㆍ한음사이ㆍ소리샘
우리음악을 만들고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임
흔희 전통이라고 하면 보존계승하고 창조발전시켜 나가야할 우리 것을 가르킴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의 행적은 보존계승에만 너무 얽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창조와 발전’, 이것이 이들 실내악단이 근본적으로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전주국악실내악단ㆍ한음사이ㆍ소리샘. 이들 실내악단에는 ‘전통’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젊은이들의 의욕’이 있다. 흔희 전통이라고 하면 보존계승하고 창조발전시켜 나가야할 우리 것을 가르킴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의 행적은 보존계승에만 너무 얽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창조와 발전’, 이것이 이들 실내악단이 근본적으로 내걸고 있는 슬로건이다.
우석대 심인택 교수가 지휘를 맡고 있는 전주국악실내악단은 은은하고 조용한 한국음악의 전통적인 면을 십분 살리면서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작업을 토대로 성장해 왔다. 심교수는 “창조는 과거의 음악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과거 음악의 시원을 찾아내고 그 원형위에 ‘오늘의 우리’를 입히는 작업이 심교수와 전주국악실내악단의 음악적 목표들이다.
소리샘과 한음사이가 전통의 ‘재창조와 발전’에 주력하고 있다면 전주국악실내악단은 거기에 ‘계승’을 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창조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통의 맥이 끊긴다면 그것은 무미건조한 변화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북대 국악과 졸업생들로 활동을 벌여오다 ‘우리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모임을 새로이 구성, 올 4월 창단된 한음사이(대표 이승곤)와 소리샘(대표 박인범)은 추구하는 음악방향이나 활동도 매우 흡사하다. 우선 이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같다. 그것은 서양외래문화가 무분별하게 유입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갖게 되는 국악에의 이질감을 인정하고, 이것이 왜 생겨나게 된 것인지를 파악하고 해결해 보자는 건강한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방안은 먼저 우리 전통음악을 소재로 한 새로운 예술음악의 창작이다. 거기에다 문화공연의 혜택이 잘 돌아가지 않는 대중들과, 국악을 알아야 할 청소년들에게 ‘국악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야 한다는 것이다.
맘맞는 음악친구들끼리의 시도로 시작하긴 했지만 그것의 잠재력있는 성과를 지켜보면서 창조와 발전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의 성과로 이들은 노동의 현장이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이들의 음악은 서양 악기의 접합을 통해서도 이색적인 맛을 낸다. 한음사이는 “전통적인 국악기로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음색을 모두 내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악기를 개량하고 몇몇 서양악기를 ‘필요에 의해’ 끌어다 사용하고 있다. 전주국악실내악단이 국악기와 양악기중 현악기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한음사이와 소리샘의 서양악기와의 접합은 가희 파격적이다. 드럼과 신디사이저. 기타 등 보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악기들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서양악기를 이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양악기의 차용이 아니라 ‘우리것화’된 악기로써 국악의 현대적 감각을 살리고 국악의 멋을 돋보이게 하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전주국악실내악단과 한음사이 그리고 소리샘,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이들 세 건강한 실내악단을 통해 국악이 대중의 생활 속에 흐르게 되고 이를 토대로 우리 음악이 재창조되고 발전 계승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실험적이고 의식있는 ‘젊은 정신’ 때문이다.
■ 국악 / 남원시립국악단 악장 전인삼 명창
“다섯마당 완창하면 창작판소리 개발도”
그에게는 지금 세가지 꿈이 있다. 그 하나는 판소리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득음을 통해서 소리의 본질도 찾고 예법도 배우겠다는 것이다. 또 도제를 통한 판소리도 중요하지만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야 더 많은 판소리의 소재들을 찾아내고 창작 판소리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세 번째 다짐이자 꿈이다.
올해 전주 대사습 놀이에서 판소리부분 장원을 차지한 남원출신 소리꾼 전인삼 명창(38세)은 지난해 흥부가 완창에 이어 올해는 수궁가를,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완창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그의 스승인 명창 강도근 선생의 타계로 ‘남원소리를 하겠다’는 그의 목표도 더욱 확고해졌다.
그에게는 지금 세가지 꿈이 있다. 그 하나는 판소리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득음을 통해서 소리의 본질도 찾고 예법도 배우겠다는 것이다. 또 도제를 통한 판소리도 중요하지만 이론적으로 많이 알아야 더 많은 판소리의 소재들을 찾아내고 창작 판소리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세 번째 다짐이자 꿈이다.
그는 현재 전주예고와 우석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남원으로 찾아오는 국악도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또 요즘은 귀명창들도 길러내야 할 판이라고 농담같은 진담도 던진다. 어느 자리에 가든 예전같이 추임새를 신나게 넣어주는 귀명창들이 없어 아쉽고 또 예전처럼 소리꾼에게 득음을 요구하는 청중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판소리 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사람들을 모아내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현재 고향의 판소리 동호인들과 함께 귀명창 기르기에도 제법 시간을 바치고 있다.
여기에 남원소리인 동편제를 통해서 서편제의 소리기법도 배워 나가겠다는 것이 그의 다부진 욕심이다. 그러나 그가 전통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판소리도 예술적으로 대중적 욕구를 충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것이 판소리계의 영역다툼이나 인기로써라면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판소리의 본질적인 맥을 찾아내고 그것을 새로이 개발하는 작업을 통해서만 진정한 대중성 확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뒤늦게 시작한 판소리의 체계적인 공부에도 열심이다. 판소리의 과거를 알지 못하면 제대로된 소리를 하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차차 배워가고 있는 판소리의 미학적 가치에 요즘 푹 빠져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의 이 끝없는 욕심이 그를 남원의 명창이 아니라 한국의 명창으로 길러내는 징검다리이다. 그의 욕심속에 전북의 국악은 또하나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는 앞으로 초청받는 무대보다는 그가 기획하는 무대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한다. 그는 서구에 기준을 둔 공연장이 아니라, 또는 의례적이고 일회성인 무대가 아닌 과거 우리 조상들이 누렸던 연희마당을 마련할 계획이고 그런 계기들을 통해서 진짜 판소리 한자락 읊어보고 싶은 것이다.
■ 국악 / 전북도립국악단 악장 조재수
“젊은 사람도 같이하는 국악 만들자”
지난해 조재수씨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곤 그 작업에 매달렸다. 국악을 창작하는 것이 바로 그것. 표현의 폭을 넓혀나가고 색다른 음색을 가미시키는 작업을 통해 젊은 국악창작을 시도해보자던 그의 노력은 지난달 서울한국국악협회에서 공모한 창작곡 부분에서 그의 작품 <만장기>가 당선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지난해 <조재수와 함께하는 음악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열린 대금 독주회에서 그는 시민들이 국악에 대한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길 바랐다. 나이드신 어른들만 가득 메우는 공연무대는 그에게 늘 고민의 대상이었다.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조재수씨는 조창훈 선생으로부터 정악을, 서용석, 김광복 선생으로부터 산조를 사사받았으며, 스승에게 받은 교육과 도립국악원 최상화 선생의 도움을 통해 “과거의 음악은 음악대로 보존하고 이 시대의 맞는 음악은 새로이 개발하자”는 나름대로의 국악관을 세웠다. 국악이라는 개념도 좀더 포괄적이였으면 하고 바란다. 국악기로 옛날 음악이나 하는 것이 국악의 전부가 아니라 서양음악까지도 우리것에 맞게 개발하고 이용해 연주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도 국악이 그렇게 고리타분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95년 국악실내악단을 창단해 나름대로 그 활로를 열어보려 했지만 주위의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금방 해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조재수씨는 다른 방법을 찾아내곤 그 작업에 매달렸다. 국악을 창작하는 것이 바로 그것. 표현의 폭을 넓혀나가고 색다른 음색을 가미시키는 작업을 통해 젊은 국악창작을 시도해보자던 그의 노력은 지난달 서울한국국악협회에서 공모한 창작곡 부분에서 그의 작품 <만장기>가 당선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오늘의 조재수씨가 있기까지는 대금연주자이자 그의 반려자인 김성자씨의 튼튼한 내조가 있었다. 김성자씨는 남편이 작곡을 하면 그것을 예리하게 다듬는 역할을 맡는다. 남달리 탁월한 아내의 음감이 조재수씨에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가 작곡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자신없어 할 때마다 아내가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좋은 작품도 대중들에게 소개되거나 공연무대에 올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으로 내년에는 작곡 발표회를 열고 CD를 제작, 판매하는 등 국악 저변화에 보다 더 분투하겠다고 밝혔다.
밤새워 연구하고 고민하는 젊은 국악인이 있다는 것은 전북국악의 축복이다. 더구나 재능있는 연주자가 국악이론에 몰두하고 새로운 국악을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21세기 전북국악의 희망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흘리는 땀과 열정 속에서 전북의 국악은 한걸음 도역할 수 있을 것이다.
■ 무용 / 현대무용단 사포 대표 신용숙
“거부감 없는 신화(身話)가 무용대중화의 열쇠”
그는 현대무용을 “오늘 이 시대의 우리 정신”이라고 표현한다. 이 지역의 삶의 이야기와 우리네의 정서를 가리킴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감만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럴 때만이 대중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를 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사포는 야외에서 벌이는 춤판, 소극장 무대에서의 공연을 즐긴다.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관객들의 들썩거리는 어깨를 보면서 교감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10여차례의 야외춤판, 21회의 소극장 공연을 통해 그런 대중화작업을 벌여왔다.
사포의 전북가림다무용단 시절부터 무용단을 지키고 춤을 만들어 왔던 신용숙씨. 85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창단한 가림다 무용단에서 그는 그저 시를 쓰듯 노래를 하듯 삶 속에서 늘 춤추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변혁의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춤출 때만은 늘 생동감있는 젊음을 노래했다. 그런 그녀에게 변화가 생겼다. 추상적인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 무용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무용이라는 것이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는 데서 오는 변화였다.
그는 현대무용을 “오늘 이 시대의 우리 정신”이라고 표현한다. 이 지역의 삶의 이야기와 우리네의 정서를 가리킴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하다 보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감만 줄 수 있어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럴 때만이 대중에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를 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손가락의 움직임조차도 재연될 수 없는 현대무용은 늘 창조만이 있을 뿐이다. 각자의 개상조차도 순간순간 변화하지 않으면 의미있는 발전은 기대하기 어렸다. 그래서 늘 실험성과 독창성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고의 고통을 치러야 한다. 이같은 ‘즐거운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그와 현대무용단 사포는 알고 있다. “우리 지역에는 못된 풍토가 있어요. 특히 어떤 특정 학교에서는 우수한 전북 인재들을 서울 등 대도시로 빼앗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운 것인양 홍보하고 다니더군요. 이같은 문제는 사포의 위기이고 전북 무용계의 쇠퇴를 가져올 것입니다.”
예전에 무용공연이 무용하는 사람들의 잔치였다면 90년 이후의 성과는 일반 관객이 생겼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무용에 대한 지역인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비싼 대관료, 경제적 지원의 부족, 우수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의 어려움 등 공연의 기초를 세우기 힘든 전북 무용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어떤 곳이라도 달려가 춤으로 얘기하고 진솔하고 서슴없이 팔과 다리와 온 몸으로 춤추는 것, 그것이 곧 무용의 이해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 무용 / 김경주 무용단 김경주 교수
우리춤이 절제된 자유로움, 그 맥을 잇는다
김교수는 “한과 신명, 흥과 멋이라는 한국인의 복합적 심성을 이해하고, 이를 맺고 풀고 얼려서 극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시켜 내보이는 춤을 추고 싶다”고 한다. 그런 그녀는 이제 40대, 무르익어가는 자신의 춤사위를 무용단을 통해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해있다.
김경주 무용단은 힘있는 무용단이다. 우선 그들은 젊고 활기넘치며, 그들 가운데 누구를 만나도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지난 94년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행사와 95년 문화저널의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서 보여준 그들의 소고춤은 우리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김경주 무용단이 다른 여느 무용단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들이 지닌 진취성 때문이다.
김경주 무용단이 처음 창립된 것은 지난 87년. 창단 이듬해에는 ‘88 국제무용제에 <땅의 소리>로 참가했고, 90년에는 민속춤판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국내외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면서 역동적인 한국춤의 멋과 운치를 소개해왔다.
이 무용단의 리더인 우석대학교 김경주 교수는 한국춤의 계보 하나를 온전히 이어받고 있는 중견춤꾼이자 활동가이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27호(승무)와 제40호(학춤)의 보유자였던 한영숙과 김매자로부터 전통무용을 사사받았다. 그의 춤은 춤사위와 호흡을 극도로 절제시킨 가운데서도 한과 흥, 멋과 신명의 정서가 절절히 배어나는 정중동의 묘미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춤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이를 현대화하여 대중들의 정서에 맞는 춤을 개발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소고춤은 바로 그런 노력의 하나였다. 바로 그런 점이 그들을 전북무용의 내일을 이끌어갈 또 하나의 희망으로 세워놓았다.
김경주 무용단은 그들을 원하는 곳이라면 국내외 어디든지 달려가고, 스스로 전국순회공연을 조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스스로 바쁘게 살고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그는 “한과 신명, 흥과 멋이라는 한국인의 복합적 심성을 이해하고, 이를 맺고 풀고 얼려서 극히 자신의 감정을 절제시켜 내보이는 춤을 추고 싶다”고 한다. 그런 그녀는 이제 40대, 무르익어가는 자신의 춤사위를 무용단을 통해 이어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해있다. 개발도 중요하고 대중화도 중요하지만 사라져가는 우리것에 대한 믿음, 그녀가 그 믿음을 지켜내 주기를 기대해 본다.
■ 문학 / 시인 안도현
90년대 문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러나 80년대라는 시대상황은 이땅이 문인들에게도 몸둘바를 모르는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당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교사가 된 안도현 시인은 ‘현실변혁의 무기로써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조국의 분단이 안겨다준 민족적 고통과 민중의 삶에 가슴아파하던 그의 시는 조용하지만 힘이 넘치는 저항의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해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로 얼어붙은 출판계속에서도 건재를 알렸고, 올해는 『그리운 여우』로 다시 저력을 확인시켜준 안도현 시인. 그는 지금도 전북문학의 동량이지만 21세기에도 가장 기대받는 ‘전북의 작가’이다.
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본격적인 시쓰기에 돌입한 그는 85년에 화제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80년대라는 시대상황은 이땅이 문인들에게도 몸둘바를 모르는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당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교사가 된 안도현 시인은 ‘현실변혁의 무기로써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조국의 분단이 안겨다준 민족적 고통과 민중의 삶에 가슴아파하던 그의 시는 조용하지만 힘이 넘치는 저항의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
전교조가 절반의 승리를 거두면서 94년 산서고등학교로 복직한 그는 다시 ‘나’를 찾기위한 과정들을 겪었다. 양심적인 문학이 소중했던 시대에는 작품활동 자체가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이제는 양심만 가지고 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의 시세계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그것은 ‘나를 통해 우리를 보는’과정들이었다. 그는 “우리는 나와 나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나를 폐기하고 우리만을 찾는다면 잘못된 것이다”고 말한다.
산서고등학교는 그에게 자연에 대한 새로운 눈뜸을 가져다 주었다. 그때부터는 왕성한 글쓰기에 들어간다 “복직 전에는 학교와 교육문제에 대해 쓸 것이 많았다. 그러나 복직 후의 사회는 발언자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사회는 그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빠르게 변화해갔다. 어른을 위한 동화『연어』는 그의 문학이 시대의 고통으로부터 자연으로 다시 자연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로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최근들어 『그리운 여우』를 내놓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학교생활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원고 청탁은 예사고, 강연의 주문량도 많아졌다. 바쁘기만한 생활이지만 앞으로는 여행 등을 다니면서 자신을 추스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몸담고 있는 작가 회의의 활동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좋은 문학이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문학행위를 통해 끝없이 자기를 쇄신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는 그는 “치열한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재 『연어』에 이어 어른을 위한 동화를 내년초에 발간하고, 1년에 두권 이상의 책을 쓰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가 간직하고 있는 문학이 현실을 통한 자아성찰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와 글은 21세기 전북문학의 한 방향이 될 것이다.
어쩌면 그가 글쓰기를 고민하고 신춘문예를 통해 자신의 시를 세상에 알리기까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열심히 자신을 변화시켰지만 그는 언제나 ‘사회와 인간’이라는 테두리 속에 있었다. 80년대라는 사회가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고 90년대의 변화 역시 그를 한가하게 묶어두지 않았다. 전북문학의 대들보로 우뚝선 그가 이제 21세기를 향해서 어떤 문학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고 감격시킬 것인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문학 / 전북청년문학회
“세상이 변해도 지킬 건 지킨다”
‘문학을 통한 삶, 삶을 통한 문학’을 통해 진정한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기존문단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들이 힘겹게 지켜오고 있는 ‘등단제도’의 거부 또한 그들만의 참신한 글쓰기를 가능케 하는 요소중의 하나이다. 문학의 진정성의 의심받고 상업주의 문학이 횡행하는 지금 ‘전북청년문학회’에 거는 기대는 지역문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지키고 옹호해야 하는 가치와 정신은 있는 법이다. 민족과 민중의 현실을 주목하고 그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 했던 80년대의 시대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이어가며 90년대의 문학적 혹은 시대적 정체성을 밝히고자 하는 ‘젊은 문학인’들의 열정이 모아진 것이 ‘전북청년문학회’(전청문)였다. 민문협의 산하에서 ‘젊은 작가군’을 이루었던 그들이 92년 ‘전북청년문학회’로 출발한지 6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 그들은 변화된 시대속에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그들이 내지 회지 「청년문학」은 벌써 지령 30호를 넘어섰고, 「열린문학까페」, 「문학강좌」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작가와의 만남을 주선해왔으며, 문학의 삶과 대중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또한 창립 3주년을 맞아 『필부를 꿈꾼적 없다』를, 96년에는 송보웅 유고시집 『하늘에 돌을 던지며』등을 발간하는 등 전북지역에서 청년문학의 맥을 이어왔다.
전청문이 지향하는 것은 이른바 문학의 ‘청년정신’이다. 중견문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고 그렇게 보고 분석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발표의 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청년문학회는 「청년문학」을 통한 활동을 계속하며,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청년같지 않은 청년들을 위한 동인지의 발간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낼 동인지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남민」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82년 전북문학의 길을 바꾼 「남민」이 조심스럽게 거론되고 있다. 82년 전북문학의 길을 바꾼 「남민」이 아직(?) 80년대를 잊지 않고 있는 젊은 작가들로부터 회상되고 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어쨌든 전청문은 이러한 사업들을 위해 내년 2월 정기총회때 신인발굴의 문제와 함께 새로운 동인지에 대한 구상을 확정할 생각이다. 전청문이 본격적인 동인지 체제로 돌아선다면 전북문학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전환의 기점을 맞을 것이다.
청년문학회 박은정 회장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전청문은 지역의 삶을 대변하고, 기성문인들이 다루지 못했던 사회의 현실문제에 대해 보다 접근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고 밝혔다. ‘문학을 통한 삶, 삶을 통한 문학’을 통해 진정한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 주겠다는 것이다. 기존문단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들이 힘겹게 지켜오고 있는 ‘등단제도’의 거부 또한 그들만의 참신한 글쓰기를 가능케 하는 요소중의 하나이다. 문학의 진정성의 의심받고 상업주의 문학이 횡행하는 지금 ‘전북청년문학회’에 거는 기대는 지역문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 젊은 문학인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전청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내일의 문학을 볼 수 있다.
■ 미술 / 온 청년미술연구소 회장 판화가 유대수
끝없는 창작, 끝없는 표현
판화가 유대수씨는 젊은작가다. 그의 판화 속에는 힘이 있고 사회적 문제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 표현방식 등이 지역 미술계에 새로운 시도와 가능성으로 표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현재 정체성되어 있는 지역 미술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지역성(향토성)을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를 구체적인 창작방법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전북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밝혔다.
‘온 청년미술연구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유대수씨는 보기 드물게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작가로 꼽힌다. 그동안 그는 열악한 지역미술의 환경속에서도 이론적 소양을 쌓기 위해 회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고민해왔다. 또한 「전북민족미술인협의회」와 「작업실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앞으로 지역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미술의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지역미술이 학연과 지역성이라는 피해의식을 극복하고, 이론과 실기가 병합된 미술이 그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서 동년배의 젊은 작가들에게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할 것을 주문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전북미술의 질적인 성장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면서 고치려 하지 않고 피해의식만 갖는다면 발전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술은 미술로서 즉 작품성으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학연이나 지연 등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으려 한다면 전북의 화단은 크게 낙후될 것이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학연에 의한 작품성보다 작품을 둘러싼 토론과 비판만이 지역미술의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사실적인 접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주제가 있는 <환경전>, <인간과 환경전> 등을 기획하여 사회적 문제에 가깝게 다가가고 문제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전시회를 기획하여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이는 미술이 사회의 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사회에 대해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하는 고민 속에서 표출된 것이다.
그는 앞으로 멀티풀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병행하는 판화를 위해 노력을 할 것이라고 한다. 직설적이고 굵은 선을 이용한 강인한 인상에서 이제 순수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있는 그대로 판화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 미술 / 만능재주꾼 이철규
열심히 그리는 것이 ‘최선’
그의 주된 작업은 민화를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작업이다. 이는 노장사상의 소요유(消遙游)의 세계가 말하고 있는 자연과 정신의 합일, 즉 자연에 역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행위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년 12월 문예진흥원에서 개최될 개인전 준비에 여념이 없는 한국화가 이철규씨. 그는 조용한 새벽녘에 허름한 지하 작업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작업을 시작한다. 한국화가 이철규씨는 이 지역 화단의 젊은 동양화가로는 손가락으로 꼽히는 작가다. 그의 젊고 참신한 감각은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그는 ‘재주’를 인정받은 화가인 것이다.
그의 주된 작업은 민화를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작업이다. 이는 노장사상의 소요유(消遙游)의 세계가 말하고 있는 자연과 정신의 합일, 즉 자연에 역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행위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미술세계는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해석으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다.
초기 그의 그림에서는 서민의 모습들이 진솔하게 담겨져 있었다. 걸인, 막일꾼 등 서민들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화폭에 담겨져 있었다.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그의 그림은 ‘자연’으로부터 결국 민화의 재해석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의 그림에서 주된 테마는 인간과 자연이다.
그의 앞으로의 계획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소박하다. “현재의 작업에 그냥 몰두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그리고 보여주는 것 이외 달리 무엇을 하겠습니까” 요즈음의 그의 관심사는 그간의 평면작업으로부터 입체적 작업으로 옮겨지고 있다.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몇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표현미술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래서인지 한국화가이면서도 서양화를 그리고 조각, 판화 등 모든 미술장르를 가리지 않고 한다. 재료 또한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사용한다. 재료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이를 “재료사용의 극복은 결국 표현의 자유와 직업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작업에 몰두하는 그는 그 행위 자체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키워주고, 때문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결국 이런 작업은 새로운 것에 대한 고민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새벽녘에야 작업을 시작한다는 그는 전라한국화제전과 12월에 있을 동질성 회복전(한국화대작전)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는 현재 전북대와 전주예고의 강사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 연극 / 창작소극장의 재건과 곽병창
“이제 공연으로 만나고 이야기 하자”
창작소극장과 곽병창을 연결지어 이야기하려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창작소극장은 고 박동화 선생님의 신조와도 다름없는 ‘창작’극 활동을 이어받고, 인간의 삶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과 연극인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소극장’의 참된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그것이다.
90년 6월 창작극회가 재건됐을 때도, 그리고 올 4월 불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창작소극장이 눈물겨운 몸부림으로 재건되었을 때도 곽병창씨는 흩어졌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재로 변한 소극장을 일으켜 세우는 ‘책임’을 져야했다. 그는 자신의 고민거리들을 해결하기 위해 창작극회를 잠시 떠나야 했지만 극회는 그러한 곽대표를 다시 불러냈다. 곽대표와 창작극회, 그리고 창작소극장은 한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창작소극장과 곽병창을 연결지어 이야기하려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창작소극장은 고 박동화 선생님의 신조와도 다름없는 ‘창작’극 활동을 이어받고, 인간의 삶과 우리가 만들어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관객과 연극인이 함께 나눌 수 있는 ‘소극장’의 참된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곽대표와 창작극회를 이어주는 끈이다. 곽대표는 “창작극회는 창작집단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창작집단, 다소 미진하더라도 우리손으로 연극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집단의 설립 취지”라며 재탕삼탕하는 연극은 절대 사절이라고 못박는다.
또 그는 “소극장은 연출가와 작가들에게는 충분한 실험의 장이 되어준다”며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그것을 연극에 다시 반영함으로써 보다 완숙한, 보다 진지한 연극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소극장 연극의 필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또 배우는 장기적인 소극장 공연을 통해 연기력을 향상시키고 자신을 스스로 검증하는 계기와 자극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소극장 연극을 좋아한다.
때문에 곽대표는 이런 두가지 사업을 빠르게 그러나 진지하게 진행할 계획이다. 먼저 인재를 키워나가는 일이다. “창작극회를 개인적 연극발전의 토양으로 삼겠다고 찾아오는 연극인들을 키워내고 워크샵 등의 다양한 교육을 통해 극작가를 키워내겠다”는 게 그가 가진 첫 번째 과제다. 그래서 곽대표는 연극인들에게 “입문할 때의 각오를 변질시키지 말고 연극을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전반적인 지역정서를 뒤바꾸고 공연문화 자체를 내것으로 소화하려는 풍토를 마련하겠다는 곽대표의 야심찬 목소리도 주의깊게 들어봐야 한다. “공연문화가 내것이라는 인식들이 약해서 지역축제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있으며 사람들은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곽대표는 “이제부턴 공연을 통해 만나고 이야기 하자”고 벼르고 있다.
창작소극장 재건을 통해 자신감과 힘을 얻은 곽병창 대표, 그에게 전북 연극의 장래를 짊어지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양악 / 첼리스트 김홍연
관객이 원하면 어디든 간다
김홍연씨는 자기개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레슨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음악을 먼저 완성시키기 위해서다. 완성된 음악을 들려줄 때 비로서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주시립교향악단 수석 첼리스트 김홍연씨. 그녀는 자신의 음악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열악한 음악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외시 되고 있다. 특히 삼성문화회관 개관 이후 중앙음악의 대규모 유치로 인해 지역음악은 더욱더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 기획, 경제 이 3박자가 고루 갖추어져야 올바른 음악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3박자를 고루 만족할 만한 성과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전북음악이 중앙에 비해 뒤쳐진 것이 사실이고 기획의 부재와 경제적 어려움은 늘 지역 음악인들을 허기지게 한다. 무엇하나 만족시킬 것이 없는 이 지역에 자신의 음악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정신만으로 대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국악의 본고장에 서양음악을 뿌리내리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무거운 첼로 가방을 들고 순창으로 향한다. 순창에서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첼로 앙상블 초청연주회가 있기 때문이다. 11월만 해도 4회의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다. 관객이 원하면 어디든지 가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는 음악인구의 저변확대를 원하는 그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
“의미를 주지 못하는 음악회는 지양되야 합니다. 관객이 음악을 듣고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연주자 자신이 만족감을 얻어야 합니다” 그간 행사위주로 진행되어 온 지역음악과 연주자의 자세를 꼬집는 말이다. “지금 지역음악은 침체되어 있습니다. 한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상품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할 때입니다.” 그녀는 후원자를 찾아 이곳 저곳을 헤매이던 때를 생각한다. 후원자를 만나 사정사정해서 연주회를 가진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지역에서 클래식에 대한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았고, 연주자 또한 대중성을 얻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근본적으로는 지역음악의 침체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음악의 대부분은 관객들과 같이 호흡하기 어려운 곡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연주자들 대부분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레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그만큼 자기개발의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대중을 위한 음악의 고민도 부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홍연씨는 자기개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레슨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음악을 먼저 완성시키기 위해서다. 완성된 음악을 들려줄 때 비로서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립교향악단 첼로 수석이면서 또 ‘첼로 앙상블’의 리더로, ‘글로리아 스트링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년 30~40회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2~3명과 함께 작은 음악회를 만들어 갈 계획이다. 물론 그가 가진 계획의 0순위는 자기음악의 완성이다.
■ 양악 / 성악가 김선식
자신이 깨야 듣는 사람도 깬다
그는 앞으로 ‘새로워지는 음악’을 계획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새로워지는 음악’이란 무슨 말일까. 먼저 이곳과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생소하기만 한 동구권음악 등 미개척 분야의 음악에 집중하고, 국악과 양악이 조화를 이룬 신선한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워지는 음악’이다.
‘전국구’ 성악가 김선식. 그의 이름앞에 따라 붙는 ‘전국구’라는 별칭은 그가 얼마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말이다. 헝가리 등 동구권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83년 프랑스 가곡 콩쿨에 입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 김선식씨는 지금은 전북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주일에 평균 한차례 이상의 공연이 있기 때문에 충전할 기회가 없습니다. 연일 독창회나 앙상블, 오페라 등의 무대를 위해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만의 실험적인 무대를 보여 줄 기회가 없었죠”
그는 앞으로 ‘새로워지는 음악’을 계획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새로워지는 음악’이란 무슨 말일까. 먼저 이곳과 정서가 비슷하면서도 생소하기만 한 동구권음악 등 미개척 분야의 음악에 집중하고, 국악과 양악이 조화를 이룬 신선한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새로워지는 음악’이다. 요즘 그가 양악과 국악이 어우러진 무대에 자주 서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전주 국악실내악단과 협연으로 음반을 제작할 정도로 국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국악인이 아닌 성악가다. 단지 우리 것을 알고 양악을 국악에 접목해 새로운 음악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깨야 듣는 사람도 깬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국악의 고장이라는 지역 특징상 양악보다 국악이 대중화된 것은 ‘양악을 하는 연주자들의 고민이 부족한 탓’이라며 중견작가의 자기성찰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역음악계를 꼬집는다. 연주자가 고심한 흔적이 보일 때 관객들로부터 관심을 끈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연주회수를 대폭 줄여 내실을 기하는 한편 새로워지는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창작에 몰두할 계획이다. 또한 지역의 후배들과 함께하는 무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부러워하는 것인 선후배들이 나이차를 떠나 한 무대에서 같이 공연할 수 있는 국악공연이다. 이를 음악의 발전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현재 전주 온누리 교회의 지휘자이면서 ‘노래사랑 나누는 사람들’과 가곡연주회 등의 화원으로 활동하면서 전주대, 군산대, 예술고 등에 출강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