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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 [서평]
올바른 연극사를 향한 작은 노둣돌 -김정수의 『해방기 희곡의 현실인식』, 신아출판사, 1997-
글·곽병창 연극연출가 (2004-02-17 13:36:48)
1. 저자는 근 10여년 이상, 연극현장과 강단을 부지런히 뛰어 다니며 견식을 넓혀온, 이 지역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양수겹장의 연극인이다. 이참에 학위논문을 가다듬어 단행본으로 낸 『해방기 희곡의 현실인식』(1997.10.신아출판사)은, 그의 이런 부지런함의 소산인 셈이다. 직장일과 연극일, 그리고 문화저널의 편집위원으로 쉬지않고 매진해 온 그의 이력으로 보면, 사실 이런정도의 책 묶기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남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우쭐해 하는 것을 좀처럼 못 견디는 그의 천품을 어느 정도 아는 필자로서는, 오히려 눈이 번쩍 뜨이게 반가운 사건이다. 2. 책이건 글이건 아니면 정치가들의 연설이건 간에, 모든 종류의 개인적 담론에는 일괄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 점에서 책 한권을 끌어가는 동안 저자가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떤 방식으로 꼿꼿한가가 책 전체의 가치를 좌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관점의 문제에 관한 고민들 곳곳에서 치열하게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저자는 우리 연극사를 움직여온 공리적 , 계몽적 연극관에 대해서는 크게 거리를 두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연극사가들이 대상을 취사선택하고 기술해 온 관행에 대해서는 또렷이 구별되는 위치에 애쓰고 있다. “동전의 한 면만을 보고 양면을 보지 못하는”저간의 관행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애쓰는 ” 입장에 서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해방기라는 매우 특수한 기간을 연구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점도 가벼히 넘길 일은 아니다. 이 시기가 곧 한국연극사를 둘러싼 그동안의 첨예한 논쟁들이 총집결해서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두현 유민영 등 기존의 권위있는 연극사가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빠뜨리거나 고의로 폄하했던 부분에 대해 우선 이의를 제기한다. 동시에 양승국, 이석만, 정호순 등 소장 연구가들의 입장이 프로극 운동의 사적 전개와, 그 의식과 조직의 변모양상등을 주로 살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연구가 이른바 좌우익 연극인들의 입장을 한자라에서 대피하고 고찰하는 데에 다소 소홀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또, 이들의 논의가 주로 조직과 연극론 등에 치우쳐 개별 희곡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에 이르지 못한 점에 착안해서, 개별 희곡에 대한 연구를 자신의 작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있다. 1부에서는 해방기라는 시기에 관한 개념규정과 그 이전의 연극상황에 대한 개괄적 전제로 채워져 있다. 1분의 논의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해방기의 연극적 정황을 뒤에서 뒤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 이전시기의 중요한 연극사적 쟁점에 관한 정리이다. 이전의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몇 차례 시도된 적이 있엇던 논쟁별 정리에다가, 저자가 나름의 균형감각을 가지고 덧붙인 언급들이 돋보인다. 가령 신파극의 이중적 성격에 관한 언급을 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동안의 순기능, 역기능, 논쟁에다가 한마디를 더 보태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수용된, 이른바 프로시니엄 무대극에 대한 열망이, 신파극의 유행기를 전후하여 전민중들의 심적 저변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나마 근근이 이어오던 전통 연희의 맥이 뿌리째 뽑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단절된 전통연희를 다시 이어받으려는 노력이 해방기에야 조심스럽게 다시 일고 있는 양상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2부가 이 책의 중심인 셈인데, 2부의 논의는 대부분 이시기의 희곡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비교에 집중되어있다. 이전에 다른 연구에 비해서 두드러져 보이는 점은,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창작된 좌우 양 진영의 대표희곡들을 나란히 비교의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방법이 다소 작위적인 느낌을 남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껏 그런 방식으로 냉정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면 선행연구가 흔치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이런 비교, 연구의 대상으로 그가 붙든 주제들은, 친일파를 청산하고 풍자하는 문제(송영의 <황혼>과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각하>), 삼일운동을 기념하는 방식의 차이에 관한 (유치진의 <조국>, 함세덕의 <기미년 삼월 일일>, 김남천의 <삼일운동>), 식민지 말기와 해방직후의 가난한 민중현실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의 문제 (김동식의 <유민가>와 김영수의 <혈맥>)등으로 이어지면서, 책 전체에 모종의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송영의 <황혼>이 인물과 인물사이의 대결과 갈등이 폭발적인 국면을 향해 치닫다가 마침내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몰락하는 장면으로 끝나는것에 비해 <이중생>의 경우는 인물과 상황(미군정 치하)사이의 갈등이 더욱 두드러져 있고 주인공의 몰락도 훨씬 더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런 구성상의 차이와 현실인식의 차이가, 곧 이후의 연극사에서, 이른바 ‘민족의식’이라는 주제를 대하는 결정적 차이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간파해내고 있다. 3. 해방기의 희곡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엉성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 대상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을뿐더러 이른바 좌익 연극의 그 이후 진행과정에 대한 연구 통로가 막혀 있어서 그들의 연극적 지향점과 형식에 관한 고민이 어떻게 발전되어갔는지, 어떻게 오늘날 북한이 자랑하는 혁명가극이라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는지 등에 관한 연구가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잇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우익 연극에 대한 연구 또한, 아직도 이념적 감싸안기라는 구태를 다 벗지 못한 상태여서, 그 주제의식의 미세한 변모와 좌익 연극과의 길항, 극형식에 대한 고민과 전통성에 대한 입장 등에 이르기 까지, 냉철한 미시적 분석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수의 이번 결실은 균형잡힌 연극사, 희곡사를 마련하는 일에 소중한 노둣돌 하나를 내는, 작은 성과라 할 만하다. 아쉬운게 있다면, 균형감을 의식한 나머지, 때에 따라서는 논의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반분하는 듯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 저자의 오랜 경험과 연찬의 무게가 실린 자신만의 목소리를 좀더 많이 내비쳤더라면 하는 점 등이다. 모쪼록 이 책이 저자로 하여금 좀 더 활발하게 자신의 신념을 널리 드러내고 그 생각이 이세상에 옳게 쓰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몇마디 뱀발같은 소리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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