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2 | [문화저널]
농민들은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글·박홍규 / 문화저널 편집위원
(2004-02-17 13:42:30)
감나무에 남겨진 몇 개의 까치 밥이 서리와 추위로 말라가고 있다. 들녘에 거둬들이지 못한 벼짚들이 소먹이로 챙겨주길 기다리고 있고 논밭엔 어느새 대신 들어 앉은 보리와 마을이 파란 싹을 키우며 인동에 대비하고 있다.
하우스 속에는 상추며 호박이며 딸기들이 3-4겹 비니루를 뒤집어 쓰고 더운 훈짐 속에 열매를 키우거나꿈꾸며 자라고 있고 우사와 돼지막을 서둘러 북풍을 막기위해 보온벽을 쳤다.
1년 13개월을 영농속에서 산다는 이 땅의 농민들은 이 한겨울에도 한시도 발뻗고 여유를 부릴만큼 한갓진 시간이 없다.
농민들은 가끔씩 술잔을 돌릴때면 남의 돈 얘기하듯 자산농가부채를 손가락으로 꼽으며 서로 비교해 가면서 계산을 하곤 한다.
그전에는 마치 빚진 것이 자신이 농가를 잘못지었거나 살림을 잘못해서 그런 것 인양 쉬쉬하고 부끄러워 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너나 나나없이 공통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최저 5천만원이 기본이고 1억이 훌쩍넘는 농민들도 부지기다. 더욱이 30-40대 농업후계인력들의 부채는 평균 7천만원(전농표본조사. 97.10)이 넘어서는 것으로 파악돼 심각한 실정이다.
부채갚기위해 집팔고 땅팔고 재산정리하면 될까 말까 하는 수치다. 영농비율은 계속상승하고 농산물 가격이 불안정한 실정으로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김영삼정권 5년만에 무려 5배나 증가했다. 쌀값은 농민값이라던데 수매기는 96년(4%인상)을 제외하고 93년부터 95년까지 동결해서 무려 6년동안 9%인상으로 물가인상율의 4분의 1, 평균 근로자 임금인상율의 6분의 1도 안되는데다 또다시 98년 수매가를 동결하려 하고 있다.
소값은 어떤가. 작년에 125만원 주고사서 정성들여 1년을 키웠는데 고작 105만원이란다. 건고추는 2천원에 불과하고 포도, 사과, 배, 감귤 등 과일은 예년가격의 60-70%에도 못미친다.
이러한 농축산물의 연쇄폭락속에서 농민들 살남기 위해선 정책자금을 받아 더욱 농사규모를 늘릴 수밖에 없는데 결국 농민들이 더 많은 빚을 지게되어 눈덩이처럼 커진 것이다.
이래서 농민들은 농가부채는 결국 정부농업정책 실패의 당연한 결과로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다 농업 이제 몰락하는 것 아니냐’는 패배주의가 농촌을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휩쓸고 있다는 것이다.
O-157, O-26, 리스테리아균, 깍지벌레등 외래 병해충이 무방비상태로 유입되고, 고독성농약이 잔류되어 국민건강과 농업생태계를 크게 위협하는 현실속에, 농민의 영농의지 약화와 패배주의는 식량자급과 건강한 먹거리의 해결을 근본적으로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절망과 한숨과눈물의세월이 어제 오늘만의일이 아니지만 농업에 대한 집단포기의사를 드러내놓고 하기는 예전과 같지가 않다.
11월 18일 서울 한강고수부지에서 전국 농민회총연맹 주최의 <농축산물가격 보장과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전국농민대회>가 있었다.
추곡수매도 거부하고 동네마다 차량을 대절해서 추위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3만여명의 농민들이 모여 들었다. 추위를 이기려고 소주로 몸을 녹여가며 농민들은 절망의 집단표현을 했다.
‘다음 대통령은 우리 농업을 살려내라’고.
이농민들의 목소리와 눈빛속에 어쩌면 우리 농업의 미래가 살아있는지도 모른다. 저마다 농가부채 탕감을 약속하는 대통령 후보들은 그 눈빛속에 숨어있는 의지들을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의지마저도 꺾인다면 그다음은 민족 농업의 파산이다.
경제논리속에서 ‘비효율적 영역’ 또는 ‘부차적 영역’으로 분류되고 인식됨으로 해서 생긴 비교 우위론의 당연한 귀결인 농산물값 가격불안과 농가부채는 차기정부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서 민족농업의 토대를 살리고 농민들의 영농의지에 희망의 바람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이것이 해결되야 통일농업의 비젼도 그려나갈 수 있다. 농민들은 약속에 대한 환상이 예전같지 않다. 김영삼 씨는 ‘쌀만은 절대수입하지 않겠다’,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겠다’고 한 대 농민약속을 집권 뒤 2년도 채 되지 않아 스스로 깨고 등을 돌렸다.
그 결과 농민들의 절망과 패배주의는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책임질 수 없는 집권수단으로써의 공약은 갈때까지 간 농민의 마음을 더 이상 현혹하거나 달랠 수 없을 것이다.
힘든 노동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작은 희망이라도 간직하고 있다면 아직은 다행인 셈이다. 그 싹을 살찌우고 열매 맺기위해서 북을 주고 비료를 주는 일은 농정을 바로 세우려는 정치권의 헌신과 국민들의 따뜻한 성원이 그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