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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 [문화저널]
전북의인물,전북의역사 / 항일운동의 맥을 관통한 동학지도자
글·표영삼 천도교 상주선도자 표영삼 / 평북출생으로 천도교 상임선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4-02-17 13:48:20)
임실천웅서 난 33인의 한사람 자암 박준승(朴準承)선생은 일찍이 동학혁명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3·1운동 때에는 33인의 한분으로 참여한 전북이 낳은 혁명가이며 애국자이다. 선생은 1866년 11월 24일에 임실군 청웅면 옥석리 아랫배치(下舟峙)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박호진(朴昊鎭)이오. 모친은 복씨(卜氏)이다. 본관은 밀양이요, 명은 준승이었고 자는 성래(聖來)요 1907년 전후에는 준신(準信)이라 했다. 도호(天道敎 道號)는 자암(菴)이다. 위로는 박준태(朴準泰), 박준호(朴準浩) 두 형이있었다. 어릴때부터준수하고 총명하여 주위에서 귀여움을받았다. 8세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10세가 지나자 글재주가 남달라 같은 또래를 가르쳐 애기선생이란 칭찬도 받았다.15세(1880)가 되자 부친은 글공부의 재주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감나무골에서 삼요정(三樂亭)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원암(源菴) 김영원(金榮遠, 1853년생)을 찾아갔다. 그는 26세(1878년 ~ 1879년)에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색장(色掌) 과 장의(掌議)를 지낸 이로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학자였다. 원암은 박준승에게 몇마디 물어보고 나서 두말없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김정갑(金正甲;김영원의 손자)의증언에 의하면 “박준승은 2년간 감나무골에 기거하며 수학했다”한다. 이때 33인의 한명인 지강(芝江) 양한묵(梁漢黙1862 생)도 동문 수학했다. 2년을 마치고 나서도몇차례찾아와 한 두달씩 머물며 글공부를 계속했다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친 18세 (1883) 때에 장환기의 둘째 딸 장승화(張承嬅 1865년생)와 결혼했다. 자암이 나이 21세때인 1886년 병환으로부친이 별세하자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삼형제는 제각기 분가하여 살기로했다. 복씨 어머니와 같이 분가한 자암은 호주가 된 것이다. 가슴을 울린 보국안민의 정열 19세기 후반기는 나라안밖이 어려웠으며 민중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과 1884년 7월에 일어난 개화당 갑신정변의실패로일보과 청국의 간섭은 도를 넘었다. 영국군의 거문도점령과 러시아 세력의남진이 겹쳐 한반도는 열강의각축장이 되었다. 무능한 척족정치는 국가재정을 파탄에 몰아넣었으며 수령방백의 농민 착취는 극에 달했다. 이때 임실지방 동학교도들은 눈에 띄게 활동했다. 임실지방은 일찍부터 동학이 들어와 운암면, 청웅면, 덕치면에 상당수의접을 조직하고 있었다. 천도교 창건록에 의하면 임실출신 지도자인 풍암 이병춘은 1887년에 입도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때 운암면 쌍암리의 최봉선과 청운면 새목터의 허선도 같은 시기에 입도했다. 이들이주동하여 많은 포교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23세에 이르러 자암도 동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주문을 무시로 외우며 가난한 도인들에게 유무상자하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서로 존대하는 모습들이 호감이 갔다. 자암에게는 정이 통하는 집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중 24세 (1889년) 때인 2월에 스승인 김영원 어른이 동학에 입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학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이웃 새목터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빌려보게 되었고 김영원 선생에게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세상의 틀을 다시 개벽하자는 동학의 목적이나, 도인들이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아 안민을 도모하자는 보국안민의 정열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리고 교리면에서도 한울님은 저 세상에 있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내 몸안에 모셔져 있다고 믿는다든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해야 한다는 사인여천의 실천덕목들은 새롭게 느껴졌다. 자암은 결국 1890년 4월 23일에 스승을 찾아가 입도식을 올리고 동학 도인이 됐다. 권유에 따라 약 1년간 종교적 수련에 몰두했다가 동학운동에 나선 것은 1892년 11월에 삼례 교조신원운동때부터이다. 그후 1893년 3월에는 금구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을 위한 대집회에도 참여했다. 이듬해인 1894년 4월에는 전봉준 장군께서 동학혁명운동의 깃발을 올리자 자암도 임실 동학도 들과 같이 기포했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3월에 최승우(崔承雨), 김병옥(金秉玉)등 여러명이 (운암면 지천리에 모여) 기포했다고 되어있다. 이 해 12월부터 동학혁명운동은 일본의 신식무기 앞에 실패로 돌아갔으며 도처에서 동학도등른 학살되기 시작했다. 임실지역 동학 지도자들은 회문산(回文山)으로 깊이 숨어들어 수년간이나 은신했다. 일개교도였던 자암에게는 별다른 지목이 없어 무사히 넘길수 있었다. 당시 임실 현감 민충식(悶忠植)은 동학에 가담하여 혁명운동에 협조했기 때문에 관민간에 충돌이 없었다. 또한 군민 거의가 동학에 가담했었던 관계로 다른 지역과는 달리 동학도에 대한 보수세력의 탄압도 심하지 않았고, 일본군이 진입한 후에도 별다를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동학에 가담했던 민충식 현감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 탈출해 살아 남았으며 불행하게도 일본군에 체포된 5명의 접주만 희생됐다. 수접주가 되어 갑자개혁운동에 참여하다 자암은 이듬해인 1895년 가을에 3Km떨어진 고개 넘어 남산리로 이사했다. 세상이 조용해지자 동학 활동은 다시 일어나 임실지방에서도 1896년 봄부터는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차묜애 설돈 풍암 이병춘 선생이 상주 은척면에 찾아가 해월 선생을 상면하면서 동학도들의 접촉은 빈번해졌다. 혁명 당시 나섰던 지도자들 보다 신진들이 대거 나섰다. 자암도 이때부터 포교에 전념하여 많은 교도를 얻게 되어 가을에는 접주라는 중임을 맡게 됐다. 1897년에는 대접주 다음가는 수접주(首接主)로 승진됐다. 1898년에 해월 선생이 순도 하자 동학의 지도부는 의암 손병희 체제로 바뀌었다. 1899년에는 대한제국으로 출범하면서 자주독립과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의 외압으로 정책이 좌우되게 됐다. 일본은 대한제국을 자기들의 영향하에 두려고 노골적인 압력을 가해왔고, 나라 사정이 점점 불안해지자 민중들의 생활고는 더해갔다. 민중들은 다시 동학에 관심을 기울이게됐다. 자암은 많은 민중을 받아들여 1902년에는 육임직(六任職)인 도집(都執)에 임명되면서 당당히 종교지도자로 나서게 됐다. 일본군은 1904년 2월에 인천항의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키면서 러일전쟁을 도발했다. 이로부터 일본은 군사적인 위협을 강화하면서 대한제국의 내정에 직접관여하게 됐다. 일본에 망명중이던 동학의 법대도주(法大道主)인 손병희 선생은 국운의 장래를 통탄하고 대책을 모색하게 됐다. 그리하여 국내 동학도 들에게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나라의 자주독립과 정부 개혁을 위해 총궐기할 것을 지시했다. 세칭갑진 개혁운동을 벌이도록 한 것이다. 아 자사애 떠라 임실동학 지도자인 이기동(李紀東), 조석걸(趙錫杰), 박준승, 최승우, 허선, 김영원등은 청웅면 남산리 홈다리에서 수백명 동학도들이 모인 가운데 1904년 9월초에 진보회를 개회했다. 강령은 황실존중과 독립기초의 공고화, 정부개선, 생명재산보호, 군정과 재정을 정리할 것등 이었다. 전국적인 이 운동은 8월 29일부터 9월 중순까지 약 15일간에 걸쳐 13만명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민회를 열어 정부개혁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1905년 11월 중순에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이 나라의 주권은 짓밟히게 되었다. 손병희 선생은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내세웠다. 1906년 1월에 귀국하여 2월에 천도교 대헌(大憲)을 제정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를 조직하고 74개의 지방 교구를 설치했다. 임실군에는 1907년 6월에 3개 교구를 설치했는데 제 1교구는 운암면지천리에, 제 2교구는 청웅면 향교리에, 제 3교구는 양지리에 설치했다. 자암은 제2교구장에 피임됐다. 1907년 10월 26일에는 천도교연원 조직의 중직인 교령(敎領)이 됐으며, 11월 30일에는 자암(菴)이란 도호를 받았다. 1909년 1월에는 천도교중앙총부의 의사원(議事員)이 됐으며 4월에는 500명의 교도를 지도하는 연원의 조직의 핵심인 도훈(道訓)이 됐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 후 천도교는 전국의 도훈을 몇차례 나누어 소집하여 우이동 봉황각(鳳凰閣)에서 49일간의 수련을 실시했다. 자암은 1차 수련생 21명의 한사람으로지명되어 참가했다. 1914년 4월에는 의암 선생으로부터 74명 공동법문을 받는 중요한 자리에 참여했으며, 이해 7월에는 전남 장성 대교구장(산하에는 장성·담양·광주·곡성·남평·고창·무장·순창교구)으로 임명되어 1917년까지 재직했다. 장성대교구장을 사임한 후에는 곧 천도교 원로기구인 경도사(敬道師)에 추대됐다. 그리하여 중앙총부에 상주하게됐다. 1919년 3·1운동때 천도교에서는 거교적으로 운동을 전개했는데 자암은 민족대표 33인중 천도교 대표 15명의 한 사람으로 선발됐다. 이때 천도교에서는 교중 기관 대표자 4명과 도사(道師)로 있었던 16인 중에서 11명을 선정했다. 자암도 도사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표에 선발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다음 곧장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갔다. 그는 이 기간을 모처럼 주어진 수행기간이라 하며 조석으로 수련에 몰두했다. 이때 “수심태산립정시대양활(守心泰山立正詩大洋闊), 갱정포태수환출신세인(更定胞胎數幻出新世人), 집중무과급수진락지양(執中無過及守眞樂志量), 갱화발신령유신여음천(更化發身靈維神如音天), 경개신인면춘생고목화(鏡開新人面春生古木花)”라는 13귀절의 수행시(修行詩)도 지었다. 여러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기회만 있으면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한가지 대답뿐이었다. 즉 ”독립할 필요가 무엇인가“ 묻자 ”조선은 4천년 전에 나라를 세웠다. 나도 태어날 때에는 당당한 독립국의 국민이었다. 일본에 강제로 합방됬으니 독립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지않은가‘고 반문했다. 또한 “조선이 독립될 줄 믿고 있는가”라고 묻자 “그렇다. 금후에도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지 하겠다”고 맞섰다. 1922년에 출옥한 자암은 천도교 중앙총부의 감사직에 있다가 1923년에 정읍군 산외면 정량리안계로 내려가 종리사 직을 맡았다. 1915년 여름에는 김승화(金承嬅 1887년생)를 둘째 부인으로 맞으면서 임실을 떠나 정읍으로 이사했던 것이다. 그를 맞은 태인교구장인 회암(菴) 임내규(林來圭 1861년생)등은 성금을 모아 자암의 생계수단으로 물레방아간을 지어주었다. 1925년에는 연원 조직인 주간포덕사로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천도교의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宗法師)로 추대되었다. 이해 3월 23일에(호적에는 24일) 세상을등졌다. 정량리에 마련된 묘소는 1965년 6월에 정읍시 충무공 사당 동편 산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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