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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 [문화저널]
가난한 학자의 큰 가르침
글.최주호 문화저널 기자 (2004-02-17 14:07:17)
故 이강오 선생은 이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이고 선각자다. 이강오 선생이 작고하기 2달전, 본지의 [이 사람의 세상살이란]에 이강오선생을 싣기로 결정하고 취재를 위해 집을 방문했다. 그때 선생은 엄지발가락에 붕대를 감은체 누워 있었다. 집을 방문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누구시라고 그랬더라. 원고를 써 줄수 있을지 모르겠어, 몸이 아퍼서....이래서....아직 할 일이 많은데 이러고 있으니, 이러면 안되는데... 그래 언제까지 써줘야 하나, 참 이름이 뭐라고 했, 했더라....” 이강오 선생은 원고 집필에 대한 강한 집념을 보이면서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원고 청탁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원고를 써 주겠다고 말을 이었다. 방을 나오는 기자를 보면서 이강오 선생은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몸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다음에 기간 맞처서 원고 써 줄게 오라고.....” 그것이 마지막 선생의 말이자 모습이었다. 학문 욕심이 많은 이강오 이강오선생은 학문에 대한 욕심이 많다. 자신의 연국는 물론이거니와 남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정을 보여온 학자다. 부인 국분순 여사는 ‘그분은 글 욕심이 많은 분’이라고 했다. 집에 오면 자료를 정리해 둔 방과 서재를 오고가면 원고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뭘 한다고 두방을 어질러 놓고 다니면서 손도 못대게 하는지 알 수 없는 양반이다”고 말한다. 가정보다는 자신의 학문과 연구를 우선시 하면서 생활을 했다. 학생들 가의 할 때의 모습은 어땠던가. 학생드릐 가르침도 닭 받으면서 강의를 한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는가 하면, 강의시 그의 큰 목소리는 옆 강의실까지 우렁차게 들릴 만큼 크다고 한다. 옆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다가도 소란스러워 귀를 기울이다 보면 ‘아하! 이강오 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고 동년배의 교수는 회고한다. 과거 80년대와 90년대초 학생시위로 인해 수업이 결강되면 여름방학이나 보충강의를 통해 기어이 강의시간을 체우고 마는 그의 옹골진 성격은 다른 교수의 혀를 내둘룰 정도였다. 가르침에 대한 열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학문의 열의가 대단하지 않으면 행하기 어려운 일을 실행한 진정한 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한밤 중에 올라간 당집 학문에 대한 열의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찬기운이 맴도는 한밤 중에 당집에 올라가자고 한다. 누가 올라가겠는가. 그러나 끝까지 옹고집을 부리는 그에게 모두다 두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어째, 두 살 아래인 내가 앞장을 서야지 별수 있어...또 한 번은 비가오는 밤거리를 앞장서라는 거여, 보통사람 같으면 비가 그쳐야 갈텐데 그냥 가잔다. 결국 비맞으며 산속으로 갔지... 그 양반 고집하고는....” 내일의 일정을 앞당겨 하나라도 더 조사를 하고 가기 위해 밤거리를 걷는 그는 보통사람과 사뭇 다르다. 행동이나 언행에서 빈틈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위해서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찾아 다녔던 신흥종교단체, 산간벽지를 헤메고 다니기는 예사고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문전박대는 물론 협밥과 회유 등을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집과 학교 등을 찾아 항의하는 신흥종교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그러나 학자로써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연구해 후손을 위한 업적을 남겼다. 낡은 자전거와 도시락 그는 교수로써 어떠한 권위나 부귀를 생각해 본적이 없는 학자다. 20여년을 넘게 타고 다닌 낡은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고 콩보리밥이 든 도시락과 연구자료 보따리가 전부였다. “ 그냥 놔둬도 가져가지 않는다. 도둑맞을 염려도 없고, 잘나가면 그만이지 새 자전거는 뭐하러 사나” 고향친구인 전북대 김준영 명예교수가 자전거라도 새걸로 바꾸라고 하자 이강오 선생이 건넨말이다. 사치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아 온 그는 술과 담배는 전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해마다 손수 과실주를 PT병에 담궈 절친한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등 소박한 생활속에서 항상 타인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양반 참, 초상치를 때도 술은 그양반이 직접 담근 술로 문상객을 받았지 아마” 부모가 물러준 재산도 ‘그건 부모님의 재산이지 나하고 무관한 재산이다’ 하여 욕심을 부려 본적이 없다. 그의 청렴결백은 향토문화연구회 회장으로 제직시에도 잘 알려져 있다. 비문등 원고를 써주는 대가로 사례비를 받은 경우에도 개인적으로 써 본일이 없다. 글을 쓴다는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며 극구 거절 했으며 어쩔 수 없이 받은 경우에는 연구회의 비품을 구입하는 등 재물에 관해 사욕은 부려 본적이 없다. 전북의 살아있는 역사, 한국 신흥종교와 전북 향토사 연구등으로 명성을 떨혔던 이강오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슬퍼했다. 그의 청렴결백한 생활이나 선비로서 학문과 연구에 정진하면서 생활해 온 학자적인 면모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업적은 우리의 밑거름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학자를 잃었지만 그의 정신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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