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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2 | [문화저널]
곤충이야기 / 그래도 지구는 돈다
글. 김태홍 전북대교수. 농생물학과 (2004-02-17 14:11:37)
곤충을 못 볼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이네들은 곤충을 아예 버러지라 비하하고 마주치기나 하면 외마디를 지르던지 꿰뜨려 죽여야 속이 풀어지는 것으로 안다. 사실 가까이 보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는 종류가 있다. 이는 사람을 생각해 보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도령 같은 얼굴이 있지만 산도깨비 같은 얼굴도 있다. 송충이나 쐐기를 보고 억지를 부려 아름답다고 하지는 말자. 모기의 애앵 소리가 음악이라고도 말고 늦여름이면 극성인 벼멸구가 지겹지않다고도 말자. 산도깨비의 얼굴 안에 산도깨비의 속이 들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외양으로는 별 볼 일 없어도 바다같이 넓은 마음에 똑떨어진 능력을 지닌 사람도 있는 법이다. 많은 곤충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믿기에 오늘은 감추어진 곤충의 실속을 찾아보고 독자들을 설득해 보겠다. 다른 말로 풀어 보면 사람이 잘 살아가려면 모든 생물과 함께 곤충도 우리의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순서도 없이 펼쳐 볼 요량이다. 누가 이 땅의 주인 인가부터 보자. 극장이나 도서관의 자리도 자기 옷이나 가방을 올려놓고 사람이 있다고 하면 뒤에 온 사람은 두 말없이 물러서게 마련이다. 필요야 어떻든 먼저 차지 하기만 하면 임자라는 뜻인가 본데, 학교에서 배운 대로라면 지구 땅덩어리의 나이 45억년, 사람은 이 땅에 산지 잘 해야 300만년, 못하면 100만년이다. 곤충이 언제부터 살아왔냐 하면 3억 5천만년 전부터다. 사람의 말을 않는다 해서 밀어붙일 일은 아닌 것이 사람이 곤충의 말을 해독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언젠가 철이 들어 알아 듣게 된다면 내가 주인인데 할까 무섭다. 늦게 와서 문간방 한 칸 얻어 사는 주제에 안방을 넘보려다 쫒겨날까 두렵다. 도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의 이유는 더 맹랑하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같이 살아온 곤충이 정말 우리 곁을 떠난다면 그리움이 사무치지나 않을는지...봄이 오면 뒷동산에 꽃이 피고 새가 울어야 하듯 뒤영벌과 부전나비도 날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론이다. 연못이 있다고 치자. 물에는 송사리가 놀고 가에는 부들이 자라고 그 위를 스치듯 밀잠자리가 날아야 한다. 만약 이 중에 하나가 빠진 정경은 우리에게 익숙치도 않을뿐더러 평화롭고 아늑하다는 감동이 일가 위문이다. 물웅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을 살아 숨쉬는 연못에다 비하겠는가. 너무 친숙하고 가까이 있기에 잊고 살아서 그렇지 우리의 정서는 알게 모르게 곤충과 끊을 수 없는 연을 맺고 있다. 다음은, 이 것 저 것 다 말고라도 주위를 둘러보시라 권한다. 깜찍한 소녀의 머리 장식에서 청년의 넥타이핀, 심지어는 고대 황제가 쓰던 왕관이나 허리띠에까지 무당벌레, 비단벌레, 풍뎅이 같은 문양이나 실체가 올라앉아 있다. 하는 일이 부러워서도 좋고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탄복할 만큼 색상이나 형태가 멋진 곤충이 부지기수다. 있는 것 자체로 고운 나비를 연상해 보라. 왕오색나비, 큰멋쟁이나비, 애호랑나비, 아니면 봄의 들판 어디에서나 보는 그냥 노랑나비까지. 생긴 것 당당하기로는 사슴벌레나 뽕나무하늘소도 대단하고 장수말벌은 또 어떠한가. 한 여름밤 애반딧불이가 연출하는 장관은 어떠하며 초가을 도롱대는 베짱이 붙이는 어떠한가. 삶의 지혜에 관한 예로는 이런 것이 있다. 사람이 게으르거나 독불장군이면 으레 개미를 본받아 열심히, 협동하여 살라한다. 모성의 본보기는 굶어 가며 죽기로 알을 지키는 집게벌레의, 부성으로는 부화랄 때까지 아예 알을 등에 없고 다니는 큰물자라나 산란에 필요한 영양에 보탬이 되려고 짝짓기 과정이 끝나면서 스스로 암컷의 먹이로 자원하는 수사마귀를 이야기한다. 친구 곤충과 적 곤충이 따로 없기에 이들을 가르지 말고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슴이 좋다고 늑대를 모두 솎아낸 섬에는 세월이 흐르면서 사슴조차 사라져간다고 하지 않는가. 억겁의 세월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자연이 이루는 균형과 조화이다. 맑은 날은 좋고 비오는 날은 싫은 것이 아니라 일기의 다른 종류로 받아들이면 두 날이 모두 즐거운 것과 같이. 이상은 모두 사람을 기준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핑계를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입장에서도 곤충의 위치와 역할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곤충을 이웃으로 삼아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나, 식물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한다면 언뜻 곤충을 떠올리면 된다. 뿌리와 잎에는 곤충의 애벌레, 꽃과 열매에는 성충이 기생, 공생과 경쟁을 거듭하면서 고생대이래 상호 진화를 거친 결과로 우리가 보는 만큼의 다양한 종이 탄생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다. 민꽃식물도 있고 꽃식물도 있고, 겉씨식물도 있고 속씨식물도 있고, 외떡잎식물도 있고 쌍떡잎식물도 있고, 색만 예쁜 꽃도 있고 향기가 그윽한 꽃도 있는 것 말이다. 식물을 먹이로 하는 곤충이 없었다면 있는 대로 안주하여 어쩌면 우리 주변에 한 두 가지의 풀과 나무로 만족해야 할 뻔했다. 둘, 지구상에 존재하는 30만종의 꽃식물 중 60%이상이 타화수정을 하고 수분을 매개하는 주체가 곤충이다. 곤충 없이 시간을 두면 이들의 종자, 열매, 사람의 입장에서는 식량, 의약품, 공업원료 등등이 사라지는 사실을 꿈에도 잊지 말자. 배추밭의 청벌레는 잎을 결단내기에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성충이 바로 배추흰나비이며 이들 없이는 십자화과 식물이 결실 하지 못한다. 셋, 곤충보다 더 열심인 청소부가, 물질 유전에 헌신하는 또 다른 생명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열대 사막에서는 흰개미가, 온대 경작지에서는 톡토기와 반날개가, 추운 침엽수림에서는 금풍뎅이와 나무좀이 명을 다한 동물이나 식물을 말끔히 치우고 유기물을 생태계 내에 순환시킨다. 땅에서 태어난 생명을 다시 땅으로 돌리고 새 생명의 탄생을 돕고 있다. 넷, 먹이사슬 또는 먹이연쇄라는 이야기 들어 보셨지요. 곤충이 하도 여러 종류이고 하도 많다 보니까, 기재되어 있는 종 100만종, 현존 추정치로는 3,000만종,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생명체도 많다. 정원을 멋있게 꾸미신 분이 있다 하자. 기대에는 아름다운 새가 와 주었으면 하는 것도 포함한다. 바로 새의 먹이가 곤충으로 징그럽다고 모두 없애 버리면 새의 지저귐은 없다. 낚시가 취미인 분은 특히 무늬 하루살이나 큰강도래의 약충이 물에서 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이 이슬만 먹고 살 수 없듯이 물만 먹고 사는 물고기는 없으니까. 그리고 아래 굄돌이 빠진 꼴이 되어 물고기와 새보다 영양단계의 윗자리에 있는 생명들도 따라서 우르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섯, 여럿이 더 있지만 여기에서는 ....으로 가름. 위 이야기로 설득이 되지않아 아직도 곤충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께는 김태홍이 졌습니다. 제 필력의 한계니까요. 그러나 끝으로 한 마디-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고요 곤충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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