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12 | [문화저널]
김용택시인의 영화 이야기 / 봄 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에 대한 추억2
김용택시인(2004-02-17 14:12:26)
추운 겨울이 다 갔는갑다 싶어 산천을 둘러보면 제일 먼저 “학실”하게 봄이 왔음을 증거해 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들판의 보리밭이었다. 아니, 보리밭이 아니라 그 보리밭에 봄이 왔음을 진즉 알고 보리밭으로 오줌장군을 지고 나온 농부였다. 보리들은 아직은 시린 땅에서도 온 몸을 통해 봄이 왔음을 느낄 때 농부도 봄이 왔음을 알고 겨울 동안 모아둔 오줌을 똥장군에 담아 지고 들에 나갔던 것이다. 보리들이 그 춥던 겨울 얼어 뜬 땅에서 뿌리를 서서히 땅에 내리고 앞에 생기를 끌어 올릴 때 농부는 그 땅에 땅 힘을 키워주기 위해 거름을 주었다. 햇살이 따스한 봄날에 파랗게 생기가 도는 보리밭에서 거름을 뿌리는 모습은 인간과 자연이 그려낸 가장 아름다운 원초적 그림이었다. 밀레는 일찍이 그 모습에서 엄숙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박수근은 봄날에 그 농부들의 모습에서 이 땅의 단순하고 아름답고 소박한 어깨선과 등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봄 날 그 보리밭을 질러 강변에 나가 영화를 보았다. 강변에서 무슨 영화를 보았냐고? 말마라.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느니.
아, 보리들이 파랗게 자라 발등을 덮을 때 쯤이면 동네 큰애기들은 품앗이로 보리밭들을 매기 시작했다. 검정 치메에다가 하얀 옥양목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터패기 수건을 쓰고 하루 종일 보리밭에 쭈그려 앉아 밭을 매며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까르르 웃음 소리가 파란 봄 하늘로 종달새처럼 날아 오른곤 했다. 보리가 발등을 넘어 발목에 다다를 때 쯤 느닷없이 마이크 소리가 푸른 보리밭을 찾아와 아무 일 없이 보리밭 매는 큰애기들의 맘을 싱숭생숭 달뜨게 만들었으니, 이름하야 가설 극장에서 들려오는 이미자의 ‘동숙의 노래’ , ‘동백아가씨’ 였다. 섬진강변 가설극장에 들려오는 이미자의 노래 소리는 잠잠하던 큰애기들의 맘을 한꺼번에 흔들어 보리밭 매는 큰애기들의 호미 쥔 손을 허둥대게 하기에 충분했다. 해가 넘어갈 즈음이면 가설극장 사람들은 마이크를 ‘리야카’에 싣고 쪼무래기들을 몰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처녀총각들에게 바람을 잔뜩집어넣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덕치면민 여러분, 오늘밤 여러분에게 상영하여 드릴 영화는 눈물 없이는 감상할 수 없는 영화 신영균 김지미 주연의 어쩌고저쩌고, 저녁밥을 일찍 잡수시고 이웃집 총각과 손에 손을 잡고 또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일장연설을 하다가 이미자의 노래를 보리밭을 향해 오래오래 틀어 놓았으니 큰애기들의 마음과 총각들의 마음은 그 얼마나 설레이고 들떳겠는가. 돼지고기 한점 집어먹고 거지 젖 집어 먹듯 거칠거칠 대충대충 얼른얼른 마무리를 짓고 수건 벗어 치맛자락에 머지 털며 웃던 웃음 소리는 왜 그다지도 유난히 크고 흐드러지든지.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극성스러운 말림도 어떻게 어떻게 따돌리고 달뜬 봄밤 달빛을 밟으며 이미자 노래를 따라, 가설 극장의 자가 발전기 소리를 따라 들길 강길을 걸어 하얀 광목 포장이 저만큼 보이는 가설 극장에 갔던 것이다. 강변 넓은 터에 자리잡은 가설 극장 불빛아래 어른 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왜 그리도 사람의 발검을 허둥대게 하던지. 오랜만에 만난 타동네 총각들과 처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서 총각들은 처녀들에게 처녀들은 총각들에게 흘깃흘깃 눈짓들을 보내며 당연하게도 제사 보다는 젯밥에 정신들을 팔며 괜히 달뜬 소리들을 했다. 영화를 곧 시작한다는 소리를 열 번도 더 듣고나서도 한참을 밖에서 서성거리다가 극장 안에 들어가보면 대한 뉴스마저 몇 번씩 필름이 끊어진 다음 본 영화가 시작되었다. 필림은 자주 끊어지고 화면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화면엔 배우 얼굴보다 까만 점이나 까만 줄기가 더 많았다. 그러나 그떡하면 필름은 왜그리도 자주 끊어지는지, 휘파람 소리가 진동을 하고 심하면 ‘논두렁 캉패’들이 들고 일어나 포장을 찢고 환불 소동이 나고, 극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곤했다. 필름이 끊어지고 포장을 세운 서까래가 넘어지고 큰애기들의 광목찢어지는 소리가 밤하늘을 찢어도 중간에 영화를 상영하지 못해도 좋았다. 달이 떠 있고 강물은 달빛아래 흐르고 어디 어덕이 없어 못비비는 더운 피가 끓는 새파란 젊음이 있었으니 우리들이 바로 영화 속의 살아 있는 주인공이었다. 영화가 어영부영 끝나고 동네사람들끼리 돌아가면 가설 극장에서는 또 내일 저녁 영화프로를 소개 하느라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던 우리 청춘들의 가설 극장은 텔레비죤이 나오고 연속극 <여로> 가 나오면서 그 막을 내렸다. 나는 잊을 수 가 없는 한 장면을 여기에 기록해 놓을 필요를 느낀다. 그 역사적인 장면은 이렇다. 어느날이었다. 가설 극장이 떠 그 강변에 들어 왔다. 나는 그 때 선생이었는데, 그 날은 왠지 늦게 퇴근을 했다. 어둑어둑 신작로 길을 가고 있는데 가설 극장이 보였다. 사람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가설 극장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가설극장 불빛 아래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고 영화를 가져온 부부만 썰렁한 극장 앞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여깃저기서 극장을 향해 오던 사람들은 가설 극장에 즐지 않고 가설극장 바로 앞에 있는 텔레비죤이 있는 가게로 장욱제 태현실 주연의 연속극 여로를 보러 갔던 것이다. 그날밤 그 가설 극장엔 눈물겹게도 단 한사람의 관객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 그리하여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가설 극장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위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던 것이었으니, 아 애닯 애달프고나 문화여 예술이여 영화여 강변의 가설극장이여 돌아오지 않을 우리들의 청춘이여, 따라서 그 무렵 농촌사회도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던 것이다.
가설 극장에서 변사가 함께 오는 때부터 그리고 공보원에서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는 공짜 홍보영화, 면사무소 창고에서 보았던 지금의 예총회장인 신영균 주연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김진균 주연의 <시집가는 날> 등을 나는 그 때 보았다.
오늘 영화 이야기 끝에 독자여러분에게 양해를 구해두고 싶다. 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 영화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또 영화가 사회적인 반응과 사회적인 현상의 하나임이 분명한데 왜 고리타분한 냄새만 폴폴 풍기고 있는가. 저도 압니다. <넘버3>의 주인공들 만큼도 재미없는 인간들이 넘버 원을 향해 가고 있는 저 쩨쩨하고 추잡한 놀음도 다 보고 있으며, <할렐루야>도 보았고, <에어포스 원>도 보았고 <노는 계집 창> , <페이스 오프>도 보았습니다. 다만 제가 죄송한 것은 무주도 가보지 못했고, 영상축제도 가보지 못했고, 부산도 가보지 못했고, 더군다나 인권영화제를 하는데 아무런 힘도 되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또 나오고 나올 것이고 저는 영화가 없으면 세상이 허무해서 못살정도로 영화를 사랑합니다. 아 참, <접속>은 어떻게 접속을 했냐구요? 예, 죄송하지만 아직 접속도 접속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