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6 | [문화저널]
【특별꼭지】
우리 가슴에 되살아 나는 현대시조의 거목
이달의 문화인물 가람 이병기
김회경 기자(2004-02-19 11:08:41)
한국인 재발견 운동의 일환으로 90년 7월부터 매월 '이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해온 문화관광
부가 6월의 문화인물로 익산 출신 가람 이병기 선생을 선정했다.
현대 시조의 거목이자, 일제의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학자적 양심을 지켜냈던 가람 이병기.
시조시인이자 국문학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그의 지난했던 삶과 시 세계는 그가 생전 아끼
고 벗삼았던 그윽한 난향처럼 지금까지도 현대인의 가슴에 잔잔한 울림과 감동으로 전해진
다.
가람은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시조시인으로서 현대시조를 이끈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기존
의 고식적인 형식을 깨뜨리는 보다 자유로운 문학장르로서 현대시조를 연구해온 인물이다.
1925년부터 조선문단, 동아일보, 현대공론, 신동아, 조선일보 등에 주옥같은 시들을 발표했으
며, 1939년에 이들을 묶은 『가람시조집』을 펴내 대중적인 시조시인으로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가람은 일제의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단 한편의 친일적인 글을 쓰지 않아 후
학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에 꾸준히 시를 발표했으며,
수많은 기행문과 서간문을 남겼다. 특히 1909년부터 60년에 걸쳐 쓴 2백자 원고지 4천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일기는 훌륭한 산문문학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상 생활의 간결한 기
록 사이에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고뇌에 찬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다.
가람은 평생을 국문학 연구에 투신해온 학자였다. 3·1운동 후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바라
보며 괴로워하는 젊은 이병기의 모습은 그의 일기에 더욱 생생히 드러나 있다. 1922년 당시
에도 사람들이 움집을 지었다는 것은 그의 일기를 통해 알게되는 소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양인들은 뾰죽집에 살고 우리는 움집에 사는 것을 통탄하는 작가의 울분이 잔잔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가람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것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강고해져가던 1921년으로 권덕
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1931년 조선어학회, 1949년 한글학회로 개칭)에 참가하
면서부터다. 이 때부터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시들어가는 우리의 말과 글을 위해 신
명을 바친다.
1930년부터는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으로 삼남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말과 글에
대한 강연과 함께 각지방의 방언·민속·민요·고문헌의 수집에 나섰다. 그가 서지학(書誌
學)에 조예가 깊고 수많은 희귀본을 소장하게 된 것은 이때의 문헌자료 수집활동이 큰 역할
을 했다. 가람은 이때 수집한 국학관련 문헌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기증(1963년), 오늘날
『가람문고』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보관돼 있다.
1934년에는 고유섭, 김두헌, 김상기, 문일평, 이희승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했으며,
1935년에는 조선어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같은 활동을 펴오던중 1942년 10월, 가람은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함흥교도소에서 1
년간의 옥살이를 치렀다. 1943년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보
며 더욱 삼엄해진 일본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고문헌 연구에 전념했다. 해방 후에는 전주와
서울의 대학강단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학문적인 열정을 불태웠다.
대표적인 저술로 『국문학全史』『국문학사』『가람문선』『근조간선(近朝簡選)』등이 있고,
고전의 현대어 번역과 평석으로 『한중록주해(閑中錄註解)』『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가루지기타령』 등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담백하고 호탕한 성격과 술을 좋아했던 그는 풍부한 고전의 해학, 음담패설로 수많은 일화
를 남겼다. 가람 스스로 제자복, 술복, 화초복을 타고났다고 했을 정도로 그의 곁에는 항상
제자와 술과 화초가 떠나지 않았다. 그가 떠난 후 참다운 난향을 맡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난초와 매화를 사랑했던 가람 이병기. 그의 서재에는 고서 사이에 유자와 먹의 향기가
그윽했고 언제나 난초가 있어 후학들에게 진정한 선비의 모습을 각인시켰다.
후학들은 그의 뜻을 이어 사망 1주기에 앞서 69년 유지와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가람 시비
를 전주 다가공원에 세웠으며, 가람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고 현대시조 창작 발전시키기 위
해 가람문학상을 제정, 시상해 오고 있다.
우리 국문학 연구의 초창기에 올과 날을 챙겨 세운 학자요, 쇠퇴해가던 우리 시조시를 부
흥·발전시킨 시인. 이 두 가지 면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가람은 우리 문학사와 더불어 길이
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학자·시인의 지칭만으로 부족한 것은 가람에게 워낙
독보적인 분야가 많았기 때문이다. 교육자·한글운동가·애란가·애주가로서의 가람의 면면
을 살펴보면 그렇다.
가람은 1891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태어나 보성·경복·덕수상 등에서 우리말의 작문
과 습자를 가르쳤으며, 연희전문(1938년)및 보성전문학교(1940년) 강사로 우리말과 글을 통
해 민족정신을 전하는 연구활동을 벌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의 편수관과 편수과장을 지내다, 1946년 나이 56세에 서울대
문리대 교수가 됐으며, 이듬해 단국대·신문학원·예술대학 강사로 출강했고, 1948에는 동국
대·국민대·숙명여대·세종중등교원양성소 등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피난해 있다가 수복후 명륜대학과 전시연합대
학 교수, 원광대학 강사를 거쳐 1952년 새로 건립된 전북대 문리대학장에 취임했다. 이곳에
서 1956년 정년퇴임한 가람은 다시 상경, 중앙대와 서울대 대학원 강사로 활동하다, 1957년
우리말 큰사전 출간기념회에 참석한뒤 귀가 도중 쓰러져 병석에 누웠다. 생가인 수우재에서
10여년의 투병 끝에 78세로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