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문화시평]
흐드러진 꽃, 가볍지 않다
조영철 개인전 '꽃이 있는 풍경'
구혜경 백제예술대 강사
구혜경 / 원광대 한국화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2004-02-19 14:01:03)
화가는 누구를 위해 붓을 잡는가?
화가들은 작업을 하면서 예술성과 대중성에 대해 늘 고민한다. 어느 한 쪽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 자칫 소홀한 한 쪽이 생겨나면 그 효과는 직접적인 체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화가들은 늘 두 가지를 경계하면서 자신의 얘기를 풀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과연 화가들은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많은 전시장을 다니면서 꼬리처럼 따라 다니는 질문은 요즘 현대미술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들으면서 어디까지가 예술성이고, 어디까지가 대중성인지, 또 그 기준은 무엇인지 작품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고민스럽게 만드는 부분이다.
현대미술의 흐름은 점점 더 대중성을 외면하고 작가 자신들만의 충족을 위한 작업들로 나아가고 있다. 마치 예술성은 작가의 내면세계 반영이라는 명분을 세워놓듯이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게 던져 놓는 식이다. 또한 현대미술은 참여하는 미술이라 하여 요즘 작업들 대부분이 작품안으로 대중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정작 작품안으로 들어간 대중들은 이해의 접근이 힘들어 소외받기 일쑤이다. 참여와 소외라는 두 지점에서 현대미술은 이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대중들에게 전문지식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그렇다고 대중성을 위주로 작품을 하기까지는 그 기준이 모호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명력이 들어 있는 작품들은 전문지식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두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영철의 '꽃이 있는 풍경'展은 목마른 갈증이 한줄기 소나기로 시원스레 풀리는 기분이다. 작은 그림 안에 넓은 시각으로 펼쳐진 풍경들이 그런 갈급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다. 계절적으로 봄, 여름이 되면 식상하게 보여지는 여러 꽃이나 자연에 대한 전시들이 치러지고 있다. 조영철의 '꽃이 있는 풍경'도 그 시기성이 적절하게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다른 통과의례처럼 보여지는 꽃에 대한 전시와 조영철의 전시는 분명 다른점이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만족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꽃'이라는 소재는 일상성과 가벼움으로 많은 작가들이 선택해 왔다. 자칫 작품 자체를 예술성을 배제한 상업성으로 몰고 갈 수 있지만 조영철이 바라보는 꽃에 대한 시선은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그런 작가적 의지 속에서 단단한 생명력이 전달된다.
작가에게 있어서 그림 속 생명력은 중요하다. 조영철이 '들꽃 화가'로 대변되면서 들꽃은 평범함에서 결코 평범하지 않음으로 전환된다. 너무나 익숙하고 흔해서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져버릴 들꽃이지만 작가의 눈에 비친 들꽃의 질긴 생명력은 화면(畵面)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작가 자신의 내면을 대변하듯 그렇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조영철이 들꽃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0여년 전부터이다. 도심 속에 살던 그가 전주로 내려와야 했던 개인적인 사정은 흔하디 흔한 들꽃으로 시선이 머물고, 작가 스스로도 지키고 싶었던 화가로서의 질긴 의지를 들꽃으로 이어나갔다. 이것이 들꽃과 인연이 되어 가느다란 인연이던 것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운명으로 이어져 버렸다.
처음 조영철이 바라보던 들꽃은 꽃에서 보여지는 밝고 화사함이라기 보다 단단한 각질에 싸여진 속에서 힘겹게 비집고 나오는 가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손으로 부린 기술적인 재주가 아니라 두 관계가 서로 하나가 되어 마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시선 가득 작은 것들을 내려다 보듯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작가의 작업 태도를 배워야 한다. 작품이 화가의 모든 것을 대변하듯이 진솔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진지하게 작업을 하면 보는 사람에게 까지도 작가의 그런 태도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투명하고 솔직한 것이 그림이다. 세월이 흐르면 작가의 시선이나 시각은 바뀔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태도는 변해서는 안된다. 조영철작품에서 보여지는 진지한 장인정신은 아직도 그대로 살아 있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 가지 이번 전시에서 변한 것이 있다면 고개를 들고 멀리 바라보는 시선 뿐이다. 흔한 들꽃에서 자신을 찾았듯이 이번 전시에서도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익숙한 풍경이다. 그 곳이 어디 인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한 번쯤은 가봄직도 하고 가고싶은 곳이기도 하다. 이것은 구상具象이 가지는 힘이 아닌가 한다. 흔히 구상은 진부한 옛그림의 하나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지만 탄탄하게 전해오는 생생함은 막연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살아있는 삶이다.
우리는 미술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화가는 왜 그림을 그리는 것일까? 작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직업으로서의 행위인 것인지,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누구도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 화가는 무언가를 위해 표현한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것이든 타인을 위한것이든 말이다. 화가의 이런 움직임은 구상일 때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감흥과 전달력이 빨라진다. 구상의 회화라고 해서 전부 상업적인 가벼운 그림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오류이다. 분명 구상적인 평면회화와 실험적인 아이디어 회화들이 같이 공존을 해야하지만 아직은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진 상태이다. 현재 많은 화가들은 더 새롭고 실험적인것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보여주지만 정작 많은 대다수의 감상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럴 때 화가는 정작 누구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두 부분이 동등하게 공존할 때 그 힘들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을까 한다.
조영철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힘은 구상회화의 영역을 확보하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 점이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런 힘이 밖으로 많이 표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작가 자신과 관람자를 위한 붓질 뿐만이 아니라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하는 주변 작가들에게도 적극적인 드러냄이 필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제시될 작품이 기다려진다. 그는 들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품안의 소재로 등장할 것이지만 지금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작가의 작은 바램인 '작품과 비슷한 곳에서 작업을 하면 작품에 더 생동감이 생기지 않을까'라는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