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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문화시평]
삶의 기록, 과거를 재생하다 안승민 개인전
글 이길명 조각가 이길명/1970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004-02-19 14:58:32)
작가 안승민? 사실 그는 전주에 아무런 인연과 연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외지 손님’이었다. 전시장을 찾은 나도 생소한 이름 석자만을 받아 들고 갔던 탓에 그에 대한 궁금증도 컸다. 2000년부터 각 지방을 돌며 매년 3회씩의 개인전을 연거푸 치러낸 걸로 보아 대단한 욕심꾸러기라 생각했다. 올해도 벌써 청주, 대전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된 참이다. 11번째. 프랑스, 광주, 부산, 후쿠호카, 청주, 제주……. 가만! 서울은 없다. 서울에서 외면하는 지방작가일까? 건방지게 동병상련의 반가움이 일었다. 허나 나의 착각일 뿐, 서울에 집중되고 있는 문화현상에 대해 그리 달가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였다. 7년의 프랑스 유학시절을 겪어 낸 소위 ‘헝그리 정신’과 ‘무대포 정신’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경험이나 지식 또는 감수성 등에 영향을 받는 주관적인 것이지만, 인식을 위한 기본 자료는 우리의 오감을 통해 주어진다. 인식의 과정 중에 오감이 받아들이는 양은 80% 이상이 시각을 통해 얻어진다. 시각은 이렇게 오감 중 가장 비중이 큰 정보 취득 수단이지만 오작동 또한 가장 많이 일으킨다. 미술이 시각예술인 만큼 이런 착시현상을 이용한 예술가들은 많았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난 안승민은 그것들과 사뭇 다른 세계가 있었다. 전주 얼화랑(7월 12일~19일)에서 작가 안승민이 내민 화두는 ‘기억-존재(Memory-existence)’다. 우리는 추억이라 말하는 기억들을 사진 내지는 비디오 등의 매체를 통해서 어렴풋한 그것을 확인하고, 보다 생생하게 기억해 내도록 한다. 작가 안승민 또한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확인한다. 안승민의 삶은 예측불허로 점철되고 방황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삶을 사랑했고, ‘기록’과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 무의미한 일상마저 적극적인 삶으로 받아들인다. 작가 안승민의 작업은 이러한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의 ‘생활’-그는 그림을 ‘업’으로 생각지 않는다. 생활의 일부이기에 그림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인 그림 그리기는 삶을 기록하는 하나의 매체로 존재한다. 그의 그림은 기법적인 면에서 3D Painting(Three-dimensional Painting)을 택하고 있다. 특수안경(간섭필터)을 통해 2차원 화면을 3차원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착시현상, 홀로그램이다. 현란한 3D 입체영화관이 즐비해 있고,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3차원 홀로그램의 실용화를 앞둔 이 시대에 2차원 홀로그램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한물 간’(?)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모호한 기억이 만들어낸 흐릿한 기억 그의 그림은 한결같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다. 일단 보기에도 초점이 맞지 않은 다색 판화같이 외곽선은 서로 엇갈려 있으며, 채도 또한 낮아 칙칙하다. 가물거리는 옛 기억처럼 갑갑하다. 그가 생성한 ‘흐릿함’은 그의 두뇌에 저장된 뚜렷하지 않은 과거의 기억이다. 포구에 들어서면 우리의 시선은 곧장 크고 작은 배들을 통과해 바다로 향한다. (짠내음 등 후각과 미각, 청각, 촉각은 거두절미하자.) 갈매기 몇 마리를 따라다니다,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암초를 향하던 시선은 이내 커다란 어선으로 되돌아온다. 갑판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어구들, 선실, 페인트가 벗겨진 선체, 빨갛게 녹슨 프로펠러……. 우리의 기억 속에 그리고 안승민의 기억 속에 있는 쇠락한 포구의 기억은 이렇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배, 꽃, 화구 등 모든 사물들은 시선을 따라 여러 장의 그림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가 경험한 기억의 순서다. 그의 그림은 기억의 순서처럼 시선의 진행과 일치하며 상하좌우, 축소, 확대되어 망막에 맺힌 상과 같다. 하지만 그것에는 실제보다 더 유동적인 공간으로 초대하려는, 치밀하게 계산된 무언가가 있다. 특수안경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세계 이제 특수안경(간섭필터)을 낄 차례다. 특수안경을 통해 본 그의 그림 속 흐릿한 외곽선은 일순간 분명해진다. 칙칙했던 색들도 생기를 되찾고 2차원의 공간은 3차원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맨 눈으로 보이는 갑갑한 색과 선은 결국 의도적으로 계획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을 따라 크기와 형체, 색채와 깊이까지 요동치며 경이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야릇한 기분에 작품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렵다. 좀더 그 변화를 만끽하고 싶다. 이제야 희미했던 기억이 생생해지고 나른하던 일상이 특별하게 재생된 셈이다. 특수안경은 그의 그림을 완성시키고, 관객과 교감을 한 차원 높이는 텔레파시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하찮은 기물이라도 잠재된 변화가 있다. 그때 마주한 꽃들은 시들어 없어 졌을 것이며, 아끼던 화구 역시 열(?)받은 그에 의해 쓰레기통에 내던져 졌을 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이런 변화의 반증을 통해 생명체로 보고 있다. 그래서 사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물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나를 재인식한다는 얘기다. 말이 사물이지 제 3자의 입장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타인이 있음으로 인한 것이라면 당연한 이야기일 터. 그래서 그는 스스럼없이 계몽주의자라 말한다. 작품을 통해 자신을 사랑하고 상대를 사랑할 줄 아는 법을 깨우치기를 원한다. 때문인지 필터안경으로 본 자신의 ‘2차적 회화’를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단순히 볼거리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그의 철칙 때문일 것이다. 현란하고 볼거리 많아지는 세상이다. 다양한 ‘시각적 놀이기구’에 미술이라는 시장이 위축되고, 동시에 동일 매체를 활용해 영역을 넓혀야만 했다. 레이저를 이용한 3차원 홀로그램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미술분야로 자리를 잡았고. 머지않아 2차원의 영상 매체를 활용하는 작가들은 3차원의 영상 매체로의 전환이 불가피해 질 것이다. 더 이상 흑백 TV가 손님을 끌 수 없는 것처럼 2차원의 영상 매체는 미술계에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게 될지 모른다. 3차원 입체 영상물까지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가 이 기법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영상물은 지나가는 순간만을 영위하는 것이지만, 회화라는 매체는 깊은 사고를 줄 수 있으며, 그 이상의 잠재적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희뿌연 그것들을 귀국 후 한 점도 팔지 못했지만 그는 꿋꿋하다. 집안을 꾸밀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는 국내 사정이 씁쓸하지만, ‘업’이 아닌 ‘생활’이기 때문에 계속 ‘이 짓’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척박한 토양이 건실한 씨앗을 시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외국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는 동안 네 살배기 아들녀석이 바지를 잡고 늘어진다. 오늘의 전시가 좋은 양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나 혼자뿐이었나 보다. 오늘도 여전히 이 녀석은 집에 가자고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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