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7 | [문화칼럼]
종교개혁, 사회개혁의 첫 걸음
글 양진규 목사
양진규/1963년 생. 한신대에서 신학을, 같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2004-02-19 15:00:46)
지난 3월1일은, 현재 한국사회의 수구(守舊)대 개혁세력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날이었다. 서울의 한 복판인 시청 앞 광장에서 해방 후 최대규모의 우익 데모인 ‘반핵·반김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가 있었고, 그 날 오후 7시에는 같은 장소에서 반전·평화 촛불시위가 열렸다. 해방정국 좌·우익 데모의 재판을 확대해서 보는 듯했다.
당일 나는 서울 워커힐에서 남·북공동으로 개최한 ‘3·1민족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행사장으로 가는 도중에 ‘타도 김정일!’ ‘부시 만세’를 외치는 수구세력의 광기(狂氣)를 보았고, 대회장에 도착해서는 남북의 민간대표들의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전쟁을 막자”는 ‘민족공조’의 감격스런 외침을 들었다.
양측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대체로 수구적보수측은 남한이 미국과 힘을 합쳐 북한 정권을 타도하여 흡수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이고, 개혁측은 대체로 남북이 힘을 모아 외세의 전쟁 의도를 막고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이다.
그날 이후 보수 측에서는 ‘반핵·반김 자유통일 4.19 청년대회’와 ‘반핵·반김 한·미동맹강화 6.25 국민대회’를 잇달아 개최하고 ‘멸공(滅共)의 횃불 아래’를 외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인형을 화형시키고 성조기를 흔들어 댔다.
7·80년대 우리 사회를 주도했던 흐름이 ‘민주 : 반민주의 대결구도’이고, 90년대가 수구와 개혁의 대결이었다면, 2000년대에는 ‘수구적 분단’(이는 ‘멸공통일’과 같은 말이다) 세력과 민족공존의 개혁적 평화통일 세력과의 대결이 본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갈등의 현장 맨 앞줄에 한국기독교가 있었다. 반핵·반김 국민대회의 주된 구성인원은 일부 대형교회의 신도들과 목사님들이었고, 해방 후에 처음으로 열린 3·1절 남북공동행사의 남측대표에도 목사님의 비중이 제일 컸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날의 ‘종교의 사회참여 논쟁’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보수든 진보든 자신의 신앙으로 세상을 변화 또는 유지시키는 흐름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일단 종교의 사회참여 여부 논쟁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참여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
기독교 신앙인의 한사람으로, 또한 목회자의 시각으로 작금의 현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종교의 형성이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을 같이한다고 했을 때, 종교와 정치가 무관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본다. 선사시대나 고대는 제정일치(祭政一致)사회였기 때문에 종교자체가 곧 정치였다. 그 후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치와 종교가 상층부 권력을 분점하는 형태가 되어 소위 제정분리가 일어난 것이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고 하는 것도 깊이 들여다보면 상호관련이 없는 분리가 아니라 상층부 권력을 이루는 요소, 즉 물질적 부와 정치권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이념) 중 종교가 이념적인 부분을 담당하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일종의 역할 분담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에도, 권력자의 눈으로 세상의 흐름을 보는 왕정사가 있고, 그 권력에 투쟁하여 민중들의 자유와 풍요가 확대되는 과정으로 그리는 민중사가 있듯이, 종교사의 흐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권력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여 세상의 수구적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종교적 역할이 있었고, 이에 대항하는 민중들에게 이념적·물질적 무기가 되어준 종교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의 역사에서 보면 그 흐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중세에서 근대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일어난 중세 카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사건이다.
아주 단순한 질문으로 논의를 이어가 보자.
중세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킨 역할을 한 큰 사건 중에 산업혁명, 르네상스,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이 있는데, 이들이 상호 연관성이 있다고 전제할 때 일어난 순서는 어떻게 될까? 역사교과서에는, 르네상스(14~16c), 종교개혁(1517, 16c), 시민혁명(영국 1688- 17c, 프랑스 1789-18c), 산업혁명(18c후반~19c초)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르네상스 운동의 출발은 신(神) 중심의 초월적 세계관을 인간 중심의 이성적 세계관으로 바꾸는 운동이었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문예부흥운동은 그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촉구하는 문화운동이었지만, 당시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기독교였기 때문에 르네상스운동을 ‘교회 밖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바탕 위에 교회 안의 목숨 건 개혁운동이 빛을 발하여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200년 쯤 전에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이다.
정치제도와 경제적 시스템을 변혁하기에 앞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난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적 정치(공화정)와 경제제도를 확립한 것을 역사적 진보로 평가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그 진보를 가로막고 봉건제를 유지하는 데 중세 카톨릭이 이념적·문화적 주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확신한다. 종교개혁을 통해 그 엄청난 이념적 둑이 무너짐으로써 민중들의 들끓고 있었던 정치적·사회적 진출 욕구의 물꼬가 트여 공화정과 근세 자본주의가 정착된 것이다.
서양사의 이 역사적 경험을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격변의 현장에 대입해 보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사회의 진보는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좀 조심스런 생각이지만, 사회각계에 퍼지고 있는 안티(反) 기독교적 문화현상-그들이 의도하든 안 하든-을 르네상스 운동과 같이 그것을 ‘교회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회개혁운동’으로 인정해야만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개신교가 ‘반공 이념의 최후 보루’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난 우리 사회의 진보의 내용이, 분단 대신 통일로, 외세의 개입 대신 민족자주로, 그리고 민중들의 생활상의 풍요와 복지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정착으로 향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수구적 보수 기독교는 진보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 민중들이 그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 반(反)기독교정서가 팽배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위기 속에서 기독교권에서도 개혁에 대한 욕구가 분출되고 있다. 그 중에 ‘뉴스엔조이’를 비롯한 언론운동, 각 교단의 교회개혁 모임,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독교시민사회연대회의를 비롯한 기독교 평신도 사회단체의 개혁 노력들이 돋보인다.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의 성장은 친미·반공·개발독재세력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해 왔다. 물질적 부와 정치적 권력을 신(神)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을 복으로 여기는 기복주의 신앙으로, 부와 권력을 쌓는 과정을 불문하고 교회는 부자들과 연합했다. 일부 교회는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형성한 세력과 이미 한 몸이 된 것 같다. (물론 이에 반대하고 사회정치적 개혁과 교회 갱신에 앞장서는 기독교 세력이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종교는 정치와 사회의 밖에 있지 않다. 정치·사회적 개혁을 바라는 선진적 국민들조차 의외로 이 사실에 너무 둔감하다. 종교적 행보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는 묘한 경향이 있다. 정교분리라는 허구적 사고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한국 사회 사회개혁운동가들에게 중세 문예부흥운동가들이 했던 역할을 의식적으로 감당해주기를 촉구한다.
종교개혁운동은 언론개혁운동이나 교육개혁운동처럼 사회변혁운동의 테두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들만의 운동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구나 분단상황에서 반공이념을 유지·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수구적 기독교에 대한 개혁이야말로 이 모든 운동의 출발점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분단과 전쟁의 위협에서 통일과 평화의 방향으로의 진정한 진보를 갈망한다면, 중세에서 근세로 진보하는 과정에 기여한 종교개혁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해야만 한다. 이 땅의 진정한 종교개혁만이 우리의 평화와 민족자주, 민주개혁, 통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종교개혁이야말로 사회개혁의 가장 확실한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