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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8 | [안영이노의 문화비평]
청년들의 대중음악이 주는 교훈
문화저널(2004-02-19 15:16:56)
대안운동은 낡은 과거에 뿌리를 둔다 중학생 시절 즐겨 듣던 팝송의 흐름 중에 뉴 웨이브(new wave)라는 것이 있었다. 198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나타나 미국까지 상륙한 이 '새로운 물결'은 1970년대까지 서구를 휩쓴 강렬한 하드 록(hard rock)에 대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이전의 음악적 전통과 앞뒤 흐름을 모른 채 팝송을 처음 들을 때 뉴 웨이브를 접한 우리 또래는, 그것을 대안의 맥락에서 보기보다 우리가 벗어 나야할 상투적인 팝송으로 인식하였다. 뉴 웨이브는 사람들 귀를 편하게 하는 음악으로, 상업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강렬한 하드 록의 진지함과 격렬함, 시대적인 반항정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록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 권위마저 받아들였다. 상업적인 팝은 비도덕적이고, '장사를 거부한' 록이야말로 예술성을 지닌 것이라는 철없는 이분법을 배웠다. 어찌 보면 대안은 실천하는 이의 주관과 무관치 않다. 난 대학에 들어가서야 대중음악의 계보를 알게 되었다. 뉴 웨이브는 청년들의 시대적 울분을 전달하는 진지한 록 음악이 변절하여, 사랑 이야기와 사람들 귀에 익숙한 멜로디로 흥행에 편승하는 팝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비록 많은 뉴 웨이브 가수들이 거대한 문화산업에 의도적으로 편입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래의 실험정신은 1970년대 하드 록이 늙어 제도화되고, 특히 헤비 메탈(heavy metal)이 상투적인 틀을 갖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젊고 끊임없이 일탈하고 반항하는 것이 그 존재론인 록 음악이 전형적인 장르처럼 인식되어 창조력이 소진되어 가면서 나름대로 지적이고 획기적인 도전을 한 셈이다. 더구나, 뉴 웨이브가 1970년대 영국의 노동자 계급에서 시작된 거칠고 반항적인 펑크 록에 대한 직접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뉴 웨이브 가수들은 상업적인 연애가와 자본주의 찬미가를 즐겨 부르는 여피족(yuppie)의 전신이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젊은 시절에 펑크 음악을 하면서 젊은 노동자 계급의 체제비판을 의례적일 정도로 받아들이는 저항아 출신들이다. 비록 노동자 계급 출신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뉴 웨이브는 음악계보 상, 반상업주의를 외쳐온 펑크 음악의 직계이기도 하다. 음악적인 면에서 볼 때도, 펑크 음악과 다름없이 전문적 기교나 전통에 얽매이는 연주법을 거부하는 민중지향성과 단순한 가사, 단순한 멜로디, 단순한 주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청년들 특유의 소박주의 태도를 가진다. 단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도시적이므로, 자본주의 문명을 찬미하듯 받아들이는 모순적 측면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어떤 대안이든, 극복하려는 과거의 방식이나 틀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안문화는 완전한 거부보다는 모순이 점철된 퓨전(fusion)의 성격을 갖기 쉽다. 뉴 웨이브의 이면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음악이 사상사로 볼 때, 시대적 대안운동에 대한 회의라고 할까, 어떤 대안도 획일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싫다반'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비록 음반과 상업방송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1960년대 이후 청년문화의 무정부주의적 문화저항과 크게 다름 없다. 하드 록의 토양이 되었던 이상적인 청년 공동체 운동인 미국의 히피 운동에 대한 실망과 식상함, 영국 IMF 시절 청년 노동자들의 반항인 펑크 운동이 변절한 것에 대한 좌절감 등이 그 가수들 가슴마다 얼룩져 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청년들의 기존 대안(대항문화)에 대한 대안운동이다. 대안 문화는 상대성 원리를 지닌다.. 한낱 대중음악에도 운동성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무렵은 미국으로부터 유럽까지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 열풍이 몰아쳤다. 평론가들은 이 음악을 당시 록 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상업지향적 팝 메탈에 대한 대안이라고 해석했다. 얼터너티브 록은 상업성을 취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 방식을 포기하는 상황에 불만을 드러내면서, 소박한 반기계적 기법과 저예산 제작, 다채로운 시도 등을 '비빔밥 버무림'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렉트릭 댄스 주류의 팝송에 대한 불만, 다른 한편으로는 메탈이 가진 정교성과 형식주의에 대한 불만이다. 따라서 얼터너티브 음악은 과거의 펑크 음악이 지닌 청년정신의 부활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느 비평가도 이 음악을 1980년대를 풍미한 뉴 웨이브와 동계의 족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체로 단편적인 이분법 잣대를 가진 사람들은 뉴 웨이브는 상업성에 편승했지만 얼터너티브 음악은 그것을 거부했다는 순결서약적 평가를 내리려고 애썼다.) 그런데 역설적이랄까, 1990년대 파편화된 도시 삶의 혼돈을 드러내고, 개인의 분열과 사회적 부조리를 밝히려는 반항정신으로 충만한 얼터너티브 음악은, 이전의 뉴 웨이브와 마찬가지로 참신성을 잃고 자본주의 산업 속에 편입되어버렸다. 실험정신이 조명되지는 못 했지만 나름대로 실험 정신 충만했던 뉴 웨이브의 신선함이 사라졌듯, 도전적인 것으로만 치부되던 얼터너티브 록은 5~6년의 유행주기 속에서 대안문화적 힘을 임종토록 하였을 따름. 1990년대 중반의 얼터너티브 록의 시도들은 슬플 지경으로, 1970년대 초반 히피운동, 1970년대 후반 펑크, 그리고 1980년대 초반 뉴 웨이브가 자본주의에 편입되었던 과정과 흡사하다. 당시 얼터너티브 록은 영국으로 건너가 모던 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이 또한 대안적 시도들이 얼마나 주관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지를 보여준다. 얼터너티브 록은 근대성이 가진 틀지워진 체계에 대한 비판을 안고 있다. 또한 점차 다양화되고 분열되어 가는 후기근대의(탈근대, post modern) 혼돈을 표현양식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 파편화된 이미지들, 혼란과 세기말적 위기의 분위기, 문명 속에서 좌절하는 개인에 대한 표현 등을 말이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이것을 두고 탈현대(탈근대)가 아니라 '현대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대의 문제와 속성(근대성)을 벗어나자는 시도가 아니라, 이것을 다가오는 현대적 센스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 모던 시대에 나온 '모던' 록은 영국의 음악이 스스로 구성하고자 하는 현대성을 말 속에 잘 드러내고 있다. 전통과 구습을 넘어선 '지금 여기(contemporary)'의 혁신성이라는 뜻에서 모던한 것이다. 대안 문화는 다원적이고 지역적이다. 대안은 작은 데서 시작하여 만천하에 퍼진다 대안 운동은 서로 '통한다'. 음악 매니아였던 나는 얼터너티브 록이 나오기 전까지도 그것이 대안교육 공동체인 섬머힐 운동과, 혹은 최근의 생태학적 대안 운동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안문화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과 결과를 바라보면서, 인간이 만드는 다종다기한 대안문화야말로 인간 본성에 있는 이상주의와 혁신적 기질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분야의 대안적 운동이든, 인간이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진보하려는, 실패하면서도 이를 그치지 않는 이른바 '근대인(현대인)'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하찮은' 대중음악이 대안문화 운동과 무관할까. 천박한 대중음악이 지적인 사조나 근대 정신과 무관할까. 아니다. 모든 대안의 시도는 진보의 열망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 있는 독창성의 실험이다. 더구나 겉으로 다른 장르, 다른 이념으로 보이는 것이 뜻밖에도 큰 정신적 사조나 세계관으로 볼 때에는 같은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은 문화적 상대주의, 다원주의 가치관, 개인주의, 지역주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출발하는 시대이다. 두 사조의 음악은 서로 적대시했지만 똑같이 사회체제를 비판하였고, 이질적으로 보이던 두 음악은 같은 계보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의 시도도 시간을 두고 진행되어 커다란 세계관의 변화를 부른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크다.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인가. 쌓이고 더해지면서 역사가 그리 만들 것이 분명하다! 각각의 시도는 진행 중에 자본주의 문화에 편입되고, 기성질서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더 크게 봐야 한다. 역사의 순환과 축적 말이다. 대안은 당장은 실패하더라도 작은 씨앗처럼 시작하여 그 향기를 만천하에 퍼뜨린다. 맹아가 변질되거나 꽃이 일찍 지지만 꽃은 향기를 남기고 결국 세상을 환하게 하는 것이다. / 문화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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