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2 | [문화저널]
조시
문화저널(2004-03-03 20:05:04)
□ 조시 눈부신 길 하나 -우리 모두가 사랑했던 박배엽 시인을 보내며 박두규 저물어 가는 낮은 산들의 어둠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길 하나 눈부시게 떠오른다. 그래, 맨몸으로 홀로 빛나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구나. 어둠 속으로 피어나는 목숨들, 가을 한철을 보낸 구절초 같은 목숨들이 저리도 눈부신 게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며 어둠에 떠 있는 길 하나. 벗이여, 無明의 세월을 흐르는 저 길의 어디쯤에 그대 있더라도 돌아보지는 말게나. 그대 비로소 어둠의 심연에 이르러 지상의 눈부신 길 하나 건너고 있으니. 배엽아, 넌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서 세상을 보았고, 세상에 대한 사랑도, 사람에 대한 사랑도 우리보다 깊었다. 너는 그렇게 우리에게 시를 가르쳐 주었다. 生의 찬란했던 이십대의 어느 날, 우리가 더듬거리며 찾아갔던, 눈부신 어둠의 길 하나가 있었지. 그곳에서 너는 동자꽃이며 투구꽃, 괴불주머니꽃 같은,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자라나던 物像들의 어둠을 열어 주었다. 배엽아,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두고 어찌 가느냐. 네가 보낸 편지들을 읽어 사람들에게 죽기 전 너의 마음을 전해야겠다. 지난밤에는 아파트 경내, 어린 계수나무들 아래서, 혼자 노래를 불러 보았어요. 아프기 시작한 후로 두 번째 불러 본 노래였지요. 내 귀에나 겨우 들릴 정도의 낮은 소리였는데, 어린 계수나무들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령이 한 10년쯤 되었을까요. 장마 전선이 잠시 북상한 사이, 하늘도 청명하고, 풀잎 위론 맑은 이슬이 반짝이고, 달빛도 환하게 쏟아지는, 고요하고 청량한 시간이었어요.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만 여기 다 모였구나‘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기분은 매우 즐거웠습니다. 배엽아, 잠겨버린 목으로도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구나. 이 세상 사랑했던 것들 모두 두고 어찌 가느냐. 젊은 나이로 짊어졌던 어둠의 역사를 이젠 내려놓아야 하겠다. 이제 스스로 힘에 부쳐 다른 누군가가 고쳐 업어야 할 것이고 나는 현재의 나에 맞는 새로운 짐을 지고 싶다. 새로운 옷을 입고 싶다. 배엽아, 그래 네 말처럼 부디 새로운 옷을 입어라. 이 세상의 모든 짐 부려놓고, 새로운 옷 입어라. 날개옷 입고 훨훨 날아라. ‘옥황님 나는 못 가오‘ 노래하지 말고 세상이 내어 논 날개옷 입고 훨훨 날아라. 우리 모두 하나하나의 마음으로 이렇게 너를 보내마. 내 어둠 속에 초파일의 등불처럼 주렁주렁 그대가 있고 그대의 어둠 속에 어둠에 잠긴 꽃으로 내가 숨쉰다. 아름다움은 말해 무엇하리. 강가의 들꽃을 헤적이는 나비의 꿈은 말해 또 무엇하리. 살아온 세월만큼 살아갈 세월만큼 어둠은 끝내 우리의 안을 사니 벗이여, 불을 밝히지 않아도 세상이 그리 밝구나. <2004. 2. 1.>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