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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4 | [문화와사람]
악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김선경 객원기자(2004-04-20 16:25:23)
고악기연구회 조석연 대표 역사는 ‘무언가에 미친’ 한 사람이 만들어간다. 한 사람이 먼저 미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제정신인’ 많은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은 그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기실 제정신이란 가장 보수적이고 현실 답보적인 정신 아닌가? 나는 무언가에 미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 나는 제정신이지만, 나의 제정신을 사정없이 흔들어놓는 그 ‘미친 정신’이 좋다. 조덕연씨(34. 고악기연구회 대표)를 만나자마자 그가 단단히 '미쳐있음'을 나는 단박에 감지할 수 있었다. 미침의 대상은 공후였다. 그는 오로지 공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했다. 공후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고, 공후에 대해 더 많이 알리지 못해 안타까워했고, 공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찾아온 걸 서운해 했다. 그렇다. 나는 공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흰머리의 미친 사나이’가 물에 빠지자 그의 처가 불렀다는 <공무도하가>정도나 귀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노래를 부른 이가 ‘여옥’이라는 사람이고 노래를 부를 때 반주를 했던 악기가 ‘공후’라는 사실은 애써 기억을 되살려서야 겨우 끄집어낼 수 있었다. 천년 전에 한 여자가 탔다는 그 악기를 이제야 복원한다니,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 “또 그 질문인가요?” 그는 고개를 돌리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너무 많이 들어온 질문이리라. 그러나 누군들 묻지 않을 수 있으랴. 왜 공후를 만들었냐고. 이미 사라진 악기를 왜 다시 만드느냐고. “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제 전공이 고대음악인데 벽화나 석상들에 보면 고대악기들의 모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악기들이 어떤 소리를 냈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고대악기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저라도 나서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거지요.” 오랫동안 공후에 관심을 가져왔던 그는 관련자료와 문헌을 모으는 과정에서 방송사에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공후를 소재로 한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제작됐다. 덕분에 공후는 복원됐다. 그러나 방송마감과 함께 공후는 다시 잊혀질 운명에 처했다. 60년대에 국립국악원에서 공후를 복원했으나 한번 연주된 뒤 창고에 처박혔던 것처럼. “형태를 복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소리를 듣기 위해 공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연주회를 열기로 했죠. 그런데 이 연주라는 것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일단 작곡자와 연주자가 있어야 하고 소리를 효과적으로 내기 위해서는 공학적이 연구도 필요했습니다. 문학적, 역사적인 고증은 말할 것도 없구요.” 그런데 의외로 공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뜨거웠다. 2003년 7월 1일에 있었던 첫 연주회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공후에 관심을 가져줬고 그것이 <고악기연구회>라는 단체로 자리를 잡았다. 일일이 거론하기 벅찰 정도로 권위 있는 학자, 교수, 장인, 음악가, 방송인, 연주자들이 고악기연구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러나 권위 있는 사람들이 뭉쳤다고 해서 곧바로 천년 전의 악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제사, 중국사, 일본고대사를 다 뒤져서 공후의 기록을 확인하고, 일본에 ‘백제금’으로 전해진 악기의 파편을 토대로 공후를 만들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끈기와 용기가 필요했다. 상원사 범종, 화엄사 4사자석탑 등에 새겨진 우리나라식 공후(중국과 일본, 미얀마에도 공후가 있으나 소리나 모양 등에서 많이 다르다. 공후는 원래 서역에서 전해진 악기로 우리 고유악기가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백제에 공후가 있었다는 기록만큼은 분명히 존재한다)에 최대한 가깝게 만들었다. 그대로 만들면 연주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옛 모양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가장 큰 비판은 고증에 대한 것이었죠.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복원했는지 이유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대악기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자기나 의복이라면 가능하겠죠. 하지만 악기는 연주가 우선입니다. 연주를 목적으로 만드는 악기인데 옛 형태 그대로를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공후의 소리를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무명줄은 음의 고저가 약했고 가야금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쟁줄도 써봤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개량 가야금줄과 기타줄을 섞어서 써보기도 했지만 불협화음만 날 뿐이었다. 결국 중국에까지 건너가서 은으로 된 양금줄을 가져왔다. 들어본 이들이 그중 제일 낫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악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악기가 만들어지니 이제는 연주법이 문제였다. 공후라는 악기조차 없었으니 그걸 연주해본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중국 돈황 벽화를 뜯어보며(공후 연주 그림은 돈황 벽화에 가장 많이 나온다)연주법을 고안해 냈다. 한 손으로 악기를 들고 한 손으로 연주를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다리 사이에 공후를 끼우고 두 손으로 연주하는 방식을 취했다. 구체적인 연주법은 25현 가야금 주법을 빌어서 했다. 비로소 악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소리는 가야금소리보다 적습니다. 하지만 소리를 크게 하는 것보다 제 소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야금 소리나 거문고 소리와 똑같다면 굳이 공후를 복원한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원형에는 없던 조임쇠를 달았고, 더 좋은 소리를 찾기 위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 실험과정에서 나온 것이 <공후, 그 가능성을 찾아서-두 번째 이야기>(2004.3.30공연)다. 이 기사가 나올 즈음이면 연주회는 끝났겠지만, 그는 연주회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연주되는 악기’를 만들겠다는 마음속의 약속을 실천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옛날엔 지금과 같은 연주는 아니었을 겁니다. 지금처럼 대형 연주회장도 없었고 독주를 위한 음량이 큰 악기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춤에 뒤따르는 반주악기정도였겠죠. 그런데 지금은 모든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에 고유의 음색과 음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악기제작에서부터 연주까지 고악기연주회의 활동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일임이 분명하다. 그는 주문한다. 삐딱하게 보지 말고 애정을 갖고 봐달라고. 공후 하나 살리기 위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고. 국비로 해야 할 일을 민간에서 하고 있는데 격려 좀 해달라고. “애정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의무감이라면 1회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러나 이 일은 끝이 없는 일입니다.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가치 하나만 보고 뛰는 사람들입니다. 많이 도와주세요.” 연주발표회를 앞두고 가족들 얼굴조차 못 보고 지낸다는 조석연씨. 한양대 음악인류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앞으로도 계속 고악기 복원에 몰두할 생각이란다. 일어서며 마지막으로 공후의 가격을 물었다. 없단다. 공후는 가격을 매길 수가 없단다. 이유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 가격도 없고 완성도 보지 못한 악기. 그렇다면 공후는 백수광부의 처에서부터 지금까지, 천 년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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