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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5 | [교사일기]
나를 가르치는 아이들
장정숙 전주반월초등학교 교장(2004-05-23 14:24:17)
나를 가르치는 아이들 전주반월초등학교 교감 장 정 숙 교직 경력 30년을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 우는 산골 학교만 다녔었다. 그 곳 아이들은 나를 정말 선생으로 만들었다. 마지막 담임을 맡게 된 12명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나의 제 자들과 인연은 더욱 질기고 끈끈했다. 「시골 어린이」하면 얼핏 순박하리라 여겨지지만 그 아이들은 어쩌면 한결같이 슬프고 외 로운 집단이란 말인가? 열아홉 철부지 시절 옆집 총각과 눈 맞아 대책 없이 아이만 낳아 놓고 떠나버린 엄마를 그 리워하는 S. 청각장애 아빠에 팔려오다시피 결혼했다 뛰쳐나가 별로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으며 할머니 속을 썩이는 B. 서울서 살다 지치고 병들어 고향 찾아 내려왔다는 D네. 전 주에서 회사를 다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우두거니가 된 아빠와 아이들을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를 미워하는 H. 늦도록 장가를 못 가던 노총각 정이 (가명)아빠는 지능이 떨어지는 엄마와 만나 아이 둘 정이와 식이를 낳고 결국 쫓겨나고 할머니와 사는 정이는 엄마를 닮아서인지 2학년이 되도록 「아」자 하나 제대로 소리 내어 읽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나에게 천직이라는 커다란 사명감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도대체 슬픔을 가슴속에 담고 있지 않은 아이가 누구란 말인가? 도시의 스스럼없고 피자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들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래도 꿈을 가꾸어 가고 있으니 얼마나 나의 역할이 중요하겠는가? 도시 아이들이 두서너 군대씩 다닌다는 학원은커녕, 그 누구에게도 문화혜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산골마을, 학교 운동장, 학 교생활이 전부요 희망이요 꿈 밭이었다. 하고 싶은 것 부러운 것들을 하지 못하고 자칫 욕구불만에 쌓여 비뚤어져서는 안 된다. 이 아이들의 마음속 깊이 진정한 「자기 사랑」의 씨앗을 심어 주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어린 시절 가슴속 깊이 심어진 인성이 탈선과 사회악에서 벗어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취지에서 인성교육에 힘쓰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즐거운 학교」「자신감 넘치는 생활」을 갖게 해주기 위해 시작한 것이 우리 전통악 기 지도였다. 처음에는 우리 반 12명부터 시작했다. 처음 악기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각자 집에서 두드릴 수 있는 것들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학교 창고를 뒤져 찌 그러진 양동이, 깨진 플라스틱 수대, 다 쓰고 버린 페인트 통 등 있는 대로 12가지를 모았다 . 두드려서 소리 나는 것은 모두가 훌륭한 악기가 되었다. ‘아?자도 모르는 정이가 제일 신이 났다. 쳐야 할 때 안쳐야 할 때 구분 없이 혼자 신이 나서 두드리고 정말 신나서 환하게 웃는 얼굴이 그렇게 천진하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조 용하던 시골 학교 교정이 무당굿 집으로 변했으니 차마 말은 못하고 제발 안보이고 안 들리 는 곳에 가서 했으면 하는 눈초리의 동료 교사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운동장 귀퉁 이에 비료포대를 깔아 놓고 하다 창고 속에 들어가서 하다 심지어 귀신 나올듯한 빈 관사에 서 비 오는 날 미친 아이들처럼 두드려대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등골이 오싹했다. 방과 후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학교가 파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가 어른들처럼 고추모 심고, 인삼밭 담배 밭에 나가 일해야 하는 아이들, 할머니가 들에서 오시기전에 청소하고 밥해 놓아야 하는 아이들, 할머니가 세탁기도 없이 손빨래 하시는 것이 안타까워 옷을 자 주 못 갈아입고 양말도 신지 않고 다니는 아이들에게 여간 신나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우리가락을 조금씩 익혀 나갔다. 악기를 치기 전에 정좌하고 눈을 감게 하였다. 그 리고 나 자신을 생각하고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고마운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를 머 릿속에 떠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악기를 치는 중간 중간에 사람답게 사는 법을 하나하나 가르쳐 나갔다. 고사성어도 들려주고 예화와 실화도 들려주는 등 예절교육을 병행했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마음이 차츰 하나가 되어갔다. 이러는 사이 학교에서도 필요한 악기를 모두 구입해 주었다. 맨손으로 어느 정도 가락을 익혀가던 아이들은 물론 나도 가슴이 설레고 벅찼다. 주전자 뚜껑대신 꽹과리를 손에 쥐고 기뻐하는 아이, 장구대신 헌 양동이와 페인트 통을 치던 아이들, 멋 대로 두드려대는 북을 맡은 석이(가명)와 정이, 징을 치겠다고 달려든 슬이(가명)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기는 쉬웠다. 이렇게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 졌다. 아이들은 조금씩 변해갔다. 자신감이 생기고 얼굴 표정이 무척이나 밝아졌다. 누구라도 외부 사람이 보면 보란 듯이 더 신나게 두드렸고 몸을 흔들어 대었다. 교실 안에서의 생활도 더욱 활기차고 학습력도 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이 할머니가 화가 나서 논에서 일하다 말고 흙이 묻고 땀이 범벅이 된 모습으로 학교에 와 선생을 찾았다. “상급반 아이들이 우리 정이 치마를 벗으라고 시켰다는데 어찌된 일이냐??고 항의했다. 순간 나는 한 대 얻 어맞은 듯 정신이 아찔했다. ‘내가 정이에게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 왔다는 말인가. 정이는 「아」자도 모를 정도로 분별력이 없는데...? 사실 그 동안 글자를 가르쳐 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아예 소리조차 내지 않아 포기한 상태였었다. 그날 이후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다 같이 정이를 가르쳐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선행을 하자고. 그것은 아침에 등교하여 송이를 만나자 마자 어제 배운 글자를 소리 내어 읽어 보게 하는 반복의 시작이었다. 칠판에「아」자를 커다랗게 쓰고 입을 있는 대로 크게 벌려 소리 내게 하기위해 아프게 꼬집기를 일주일, 드디어 꼬집으러 가려는 시늉만 해도 「아!」하고 소 리 질러 아자는 읽고 쓰게 되었다. 「우」자 지도는 간식 때 우유를 마시면서 일부러 입 가에 흘리며 마시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반복하면서 ㅇ와 ㅜ를 기억시키는데 성공했다. 「가」와「기」자의 구분을 위해 칠판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가의 ㅏ― 를 길게 쓰면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걸어가기를 반복해 익히게 했다. 이처럼 정이가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자 아이들도 처음에는 선생님의 행동에 킥킥댔지만 점차 정이를 가르치는데 협조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아직 읽기 쓰기가 불완전하던 몇몇 아이들도 한글을 확실히 익히는 성과도 거두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정이는 더듬거리며 한글을 읽게 되었고, 정이 할머니는 고마움의 표시로 상추도 뜯어 오시고 감자도 삶아 오시는 성의를 보이셨다. 이제 정이도 진안 가는 버스인지 전주 가는 버스 인지 가려 탈 수 있게 되었고 할머니에게 눈물겨운 감사편지도 썼다. 이듬해 12명의 사랑스런 제자들 을 내가 그대로 담임을 했고 정이의 북소리와 함께 12명의 아이들은 각종 군민잔치에 협조 출연했고 큰 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이들이 이제는 중학생이 되어 가끔씩 전화로 소식을 전해준다. 모두들 의젓하고 예쁘게 자라고 있다고... 지금도 내 곁에는 가는 곳마다 또 다른 정이가 있고 또 있다. 나는 이런 아이들에게 선생님이자 엄마 이어야 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에게 인격수양을 시켰고 나 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에게 베풀 줄 아는 진정한 「자기 사랑」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언제 어디를 가든지 내 아이들을 위해 나를 바치겠다고 다짐해 본다. 장정숙 / 서울중앙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해 현재는 전주반월초등학교에 서 교감으로 재직 중이다. 사물놀이부 창단지도, 전주의 생활 3학년 과정 교과서 개발 총괄을 맡는 등 활발한 활동과 함께 현장연구논문도 꾸준히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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