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 | [서평]
감각, 이성을 대신할 새로운 인식의 길잡이?
박 영철(군산대 교수, 사학)(2004-06-12 09:56:13)
본서의 제목 <감각하는 인간(Homo Sensus)>은 참으로 감각적인 제목이다. 이것은 책을 내면서 새로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이 감각적인 제목은 우리 인문학의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근래 유행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 라는 말로 표현되는 우리 인문학의 현주소 말이다. 필자의 직감이지만 이런 감각적인 신조어에는 위기를 헤쳐 나가고자 하는 인문학자들의 위기의식이 엿보이는데, 서양에도 없는 ‘Homo Sensus’라는 말을 창조할 정도로 패기 넘치는 집필자들의 용감성에 우리 인문학의 성장조차 느껴지기도 해서 눈에 띠는 책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감각하는 인간>을 열어보니 책은 4부로 편성되어 있고 각각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1부의 제목은 ‘감각, 사유의문’ 으로 영화학(김건, 시각적 재현 이미지: 원근법에서 클로저업까지)과 서양미술학(신방흔, 육체이미지: 아르또의 드로잉과 베이컨의 자화상을 중심으로)에서 집필을 담당하고 있다. 2부는 ‘문학에서 읽는 시각’ 으로 불문학(권희창,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시각: 롱사르와 도비녜의 문학작품을 중심으로)과 한국문학(이대규, 도시,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 「탁류」로 근대 읽기)에서 담당하고 있다. 3부는 ‘감각으로 되돌아가기: 에피쿠로스와 니체의 경우’로 서양고대철학(임성철, 감각이 곧 진리다: 에피쿠로스의 감각주의적 인식론에 대한 고찰)과 서양근대철학(이상엽, 니체의 감성의 복원 시도: 삶의 미학을 위하여)에서 담당하고 있다. 4부는 ‘시각과 섹슈얼리티’로 독일문학(이혜자, 시각은 유혹한다: 독일 근대문화와 시각)과 사회철학(강웅경, 시각의 힘, 그리고 그 무기력: 남근의 디스토피아)에서 담당하고 있다.
이상의 필진을 보면 다양한 부문의 전공자들이 색깔 있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인문학의 위기적인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전선이라고 필자에게는 느껴진다. 그런데 연합전선은 통제가 곤란하여 자칫하면 효율적인 공격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약점이 있다. 이 책에 쏟아 부은 집필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인과인지도 모른다.
우선은 다소 어수선한 책의 편성이 불만으로 느껴진다. 책의 1부는 영상이나 미술을 소재로 삼고, 2부는 문학을, 3부는 철학을, 4부는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삼고 있는데 필자는 이들 간의 불협화음을 감각으로 느낀다. 특히 문학의 경우는 시각 그 자체를 직접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본질적으로 글쓰기와 글 읽기는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이다. 그것은 되새김질, 어슬렁거림 속에서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채만식과 박태원은 주인공의 어슬렁거리기를 통해 식민지적 근대의 어둠을 보인다”(이대규, p.119) 고 말할 때, 이상하게 감각되는 이 ‘어슬렁거리기’는 시각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말인가?
둘째로 감각의 과잉이다. 말하자면 좀 선정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4부에 수록된 ‘시각은 유혹한다: 독일근대문화와 시각’은 글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실망스럽게도) 그다지 유혹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 또 ‘시각의 힘, 그리고 그 무기력: 남근의 디스토피아’ 에는 남근이 글 내용과 무관하게 과잉노출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셋째로 무엇보다 이 책의 약점으로 느껴지는 것인데 글의 내용이 대단히 난해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감각의 과잉과 함께 이성의 상대적 빈곤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싶다. 감각이 이성에 비해 소외당해 왔다고 해서 이제 감각을 끄집어내어 감각으로 하여금 이성을 뒤집어엎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인식의 길잡이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감각과 이성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적어도 이 책의 난해성-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평가이지만-은 필자로 하여금 이 물음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하게 만든다.
거의 이성 중심으로 사물을 생각한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달리 유별나게도 진리의 인식에 있어서 감각의 중요성을 외친 에피쿠로스 또한 이성을 결코 무시하지는 않았다. 감각만이 진위판단의 출발점이자 기준이며, 모든 진리는 감각적 지각에 의해 그 진리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조차 인식이 감각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임성철, p.149, 137) 더구나 감각적 지각을 벗어나는 영역과 내용에 관한 주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경험론적 방법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식론을 전개했다는 설명을 볼 때(임성철, p.150), 에피쿠로스 또한 이성 중심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를 ‘논리의 광신자’ (이상엽, p.167)라고 부르면서 이성중심의 서양철학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던 니체 또한 논리를 거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니체는 논리, 언어, 개념, 의식을 ‘작은 이성’이라 칭하고 그가 예찬해 마지않았던 인간의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감성, 예술을 ‘위대한 이성’이라고 칭했다고 한다.(이상엽, p.180) 이 주장을 그대로 따른다면 니체는 작은 이성인 논리나 개념을 대신하여 더 큰 이성으로서 감성, 예술을 찾았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니체야말로 감각까지도 이성에 포괄할 정도로 이성에 집착한, 이성 중심이라는 이 서양철학사의 전통에 충실했던 철학자는 아니었을까?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전반적으로 감각과 이성의 이분법이라는 지나치게 서양적인 사유방식으로 문제를 보아 온 것이 아닌가? 필자의 직감으로는, 서양에서의 감각 예찬은 결코 이성을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이러한 감각이 타인과 공유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감각과 이성이 아마도 별개의 것으로 있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동양적 전통에서 감각이라는 문제를 탐구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더욱이 집필진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특히 이 점이 아쉬운데 앞으로 이 책의 재판이 나올 때 보완해주기를 바라고 싶다.
지면제한으로 인하여 개개의 글들을 모두 논평하지 못하고 가장 감각적으로 인상에 와 닿는 부분만을 언급해 보았는데 끝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우리 인문학에 있어서 서구적 사유의 과잉, 다시 말해 서구적 어법의 과잉, 충분히 번역되지 않은 생경한 용어들의 과잉이다. 이것은 한국어로 서구적 사유를 이식할 때 일어나는 필연적인 문제라 생각되는데 우리의 인문학이 서양의 압도적 지배 하에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 없이 결코 극복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철 / 서울대학교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하고 일본 교토대학교에서 동양사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주요 연구분야는 중국사회사, 중국법제사, 중국고전학이며, 저서로 <논어>와 <신판 신명재판>이외에 다수의 연구논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