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저널]
내 삶을 바꾸어준 자장면 한 그릇
김동명 / 1969년 계성고등학교 졸업하고 계명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했다. 1977년 영신(2004-08-09 10:30:06)
나라가 온통 포성으로 가득하던 6.25 전쟁 당시, 나는 북미장로교 선교회 대구지부가 있던 동산(東山)에서 태어났다. 제법 큰 병원이 있던 동산은 자연스레 미군지휘부가 주둔하게 되었고, 휴전까지 털끝 하나 전화를 입지 않을 만큼 신의 은총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심었다던 사과나무를 비롯해서 온갖 유실수들이 가득하였다. 어린 시절 밖에서 종일 놀아도 철따라 먹을 것이 많아 배를 곯지 않던 에덴 같던 곳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손위 누나들이 불러대던 미국 노래들을 금방 따라 부르곤 했다. 취학 전 인근에 주둔한 미군들 앞에서 노래를 잘 불러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누나들에게서 듣기도 했다. 청년이 되어서야 그 이름을 알게 되었던 페티페이지의 노래들을 뜻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조잘대던 때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중학교 시절엔 이미 통기타를 배워 꿀맛을 안 벌처럼 동산 라일락 꽃 아래를 무대 삼아 노래를 섭렵했다. 미션계 학교인 계성고등학교 시절엔 개교기념일 같은 뜻 깊은 날 학교의 배려로 접한 테너 스테파노 같은 성악가들을 통해 음악에 대한 각별한 생각을 키워갔다. Sound of Music의 줄리앤드류스에 흠씬 젖어 고3 수험생임을 망각할 정도였다.
베짱이처럼 노래만 좋아한 탓인지 원하던 대학시험에서 쓴맛을 보았고, 고향땅 대구에서 마치 패전자의 심정으로 우울한 대학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3년여의 DJ 경험이 있다는 분의 제안으로 보컬그룹을 조직하여, 오늘 날 랩의 할아버지 원조 격인 Cotton Field로 교내 축제 때 데뷔를 하였다. 출발부터 선풍적 인기를 얻었고 이로 인해 타 대학의 축제니 무슨 행사니 심지어 미군부대 위문공연에다가 방송전파를 타면서 학업은 뒷전이 되었다. 의례히 하루건너 술에 젖을 정도로 장발족의 거친 삶을 살아야 했다. 결국 이런 생활은 집안의 강력한 반대로 더 지속될 수 없었고 2년 만에 다행히(?) 끝이 났다.
제대 후 서울에서 회사를 다닐 때 거래처 접대를 위해 자주 요릿집으로 가는 편이었는데, 별로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유(類)의 사람들과 함께 빨리 취해서 가까워진 척 하려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유행가를 불러야만 했다. 이런 가식의 자리로 인해 몸도 마음도 일그러져 가게 하는 서울이 싫어졌고, 어머니 품 같은 고향 동산에 대한 그리움만 더해갔다. 주저 없이 사표를 썼다.
운이 좋았던지 곧 지금의 직장에 교사로 채용이 되어, 국사를 가르쳤다. 교과 지도도 재미가 있었지만 강당 채플 때마다 옛 솜씨를 발휘하여 학생들에게 노래를 지도할 수 있었던 일로 인해 삶이 즐거웠고, 이듬해에는 결혼으로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기에 나의 앞날에는 행복한 미래만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교직 생활 10년쯤 지나 불혹을 얼마 앞둔 즈음에, 타성에 젖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람쥐 쳇바퀴 같은 직장의 생리 탓일까. 선명한 이유도 없이 정신은 여려져 갔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알 수 없는 질고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재롱부리는 두 아이의 아빠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낙동강은 내가 마지막으로 봐야하는 끊겨진 필름이 되었을 것이다. 흐느적대며 죽음만 못한 삶을 이어가는 처지는 돈으로도 눈물로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되질 않았다.
측은히 인내해주던 아내의 사랑스러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은 그런 나날로 두어 해가 지나갔다. 좋아하던 음악 감상도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천부의 소리라며 자랑스레 부르던 노래들도 내 생활에서 흔적을 감추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회색인 것 같았고 매사에 짜증과 불만이 나의 주인이 되어있었다. 도무지 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왜 사는지, 심각한 회의까지 겹치면서 무아에 빠질 수 있는 곳을 찾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극한의 상태에서 내 삶의 질을 바꾸어 놓을 기회가 주어진다. 예전부터 나의 노래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었던 대학후배인 음악교사로부터 함께 합창활동을 하자고 끈질긴 강요(?)를 받았었다. 다만 만사가 귀찮아진 상황에서 그의 권유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어느 날 그냥 저녁 한 그릇 하자기에 거절치 못하고 약속한 중국집으로 갔었다. 자장면은 계층과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던가! 하지만 황폐한 나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 채 식사가 빨리 끝나고 헤어질 시간만을 기다렸다. 헌데, 그 후배는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대구남성합창단이 바로 옆 건물에 있으니 꼭 한번 함께 가자고 진지하게 부탁을 한다. 그 동안 끈질기게 관심을 가져준 그였기에 거절할 수가 없어서 그를 따라 합창단 연습실로 향했다. 속내로는 그가 말한 “꼭 한번만”이라는 말을 되뇌면서…….
그런데 파트연습을 시키려고 지휘자가 내 주변으로 다가올 때, 군대에서 사격선에 섰을 때나 느껴보던 그런 긴장감이 나를 엄습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음악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던 나로서는 엉터리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에 등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열심히 하였다. 꼭 한번 만이라고 다짐하며 참여한 이 한 시간의 연습이 나로 하여금 합창단의 골수 단원이 되게 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매년 정기 연주회, 자선음악회, 교회 순회 찬양, 타 합창단 발표회 찬조 출연 등 벅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인 화요일 연습에서 이루어내야 하므로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단원들의 열기로 혹한의 겨울에도 연습실은 훈기로 가득하였다. 연습이 끝나면 파김치가 되지만, 곡 하나를 소화하기 위해 열정을 다했기에 모두 함박 미소를 머금고 헤어진다. 이런 합창단에 입단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혀 오던 아픔들이 아침 안개처럼 거두어졌고, 오히려 회복된 의욕으로 인해 가정이나 섬기는 교회나 직장에서 매우 왕성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해는 내가 합창단 활동에 매진한지 15년이 되는 해이다. 그 동안 대구남성합창단이 벌여온 헌안 운동과 가정복지회의 홍보대사 역할에서, 소외 빈곤층을 위해 땀 흘릴 기회를 가졌던 일들로 인해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기도 했다. 한편 제1회 대통령배 전국합창제에서 대통령상을, 2002년 세계합창올림픽에서 1등 없는 은메달의 쾌거를 맛보기도 했는데, 이는 1988년에 서울 올림픽 개최 기념 전국 합창제의 대상을 받은 일과 함께 이웃과 사회를 향해 합창단이 흘린 땀을 위로해 주시는 신의 은혜로 단원들은 믿고 있다.
얼마 전 아주 유용한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음악을 통한 치료 효과에 관한 것이었다. 합창을 통해 주검 같던 형편에서 해방을 경험한 나로서는 한 구절 한 구절을 절감하며 읽을 수 있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자장면 한 그릇으로 내 인생의 새로운 동기를 만들어 준 이태길 선생님을 다시 기려 본다. 의사들도 이해하지 못하던 질고가 완쾌되었으니, 나의 여생은 대구남성합창단을 사랑하며 이를 알리고, 나아가 어둠의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희망의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 동안 2년 임기의 사무국장직을 연임으로 봉사하였었고, 금년에는 단장으로 선출되어 다소 부담을 느끼지만 최선을 다하여 섬기려 한다.
노래는 나를 지탱해주기도, 새로움으로 이끌어 주기도 하면서 나의 일생에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감만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던 노래보다는 남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노래를 부를 때 오히려 나에게까지 양약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대구남성합창단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들을 더욱 초대하고 싶다. 이곳에서 잠시나마 쉬어 가시면서 영혼의 평안을 누리시길 바란다. (http://www.malechoi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