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7 | [문화칼럼]
'화가(畵家)’를 아십니까?
심상용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90(2004-08-09 10:52:28)
‘화가’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빵모자에 곰방대를 문 이미지입니까? 곱은 손으로 원고지를 메우는 랭보 같은, 일테면 세 평 남짓의 아틀리에서 싸구려 포도주를 들이키는 반 고흐입니까? 아니면,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한 대가로 북아프리카산 양탄자가 깔려 있는 사보이호텔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피카소의 모습입니까?
대학시절 저에게 ‘작가’는 정말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단어였습니다. 그 때 전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화가는 제게 부동의 아우라를 지닌, 마음 깊은 곳을 밝히는 등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화가의 자리에 있지 않지만, 당시 그것이 의미했던 것은 여전히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내 시선의 시초이곤 합니다. 하지만, 화가도 시간의 산화를 피할 순 없었다고나 할까요? 오늘 저는 몇몇 작가들의 이름을 들어 ‘작가의 산화’에 관한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1863년 파리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이 살롱에서 낙선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당대의 무수한 도덕적 비난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젊은 화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촉망받는 젊은이였으며, 인상주의의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가 바로 그입니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 Le dejeuner sur l'herbe>라는 제목을 가진, 이 문제의 출품작에는 정장 차림의 두 남자와 그 사이에 옷을 벗은 채 앉아있는 젊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그림으로 마네는 졸지에 퇴폐적이며, 유명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천격의 화가로 평가되었습니다. 추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갖은 비난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화가로서 자신의 싸움을 지속했습니다. 그가 같은 해 그린 작품 <올랭피아, Olympia>는 더 격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저분한 침대 위에 누운 여성은 더 외설적이고 품위란 찾아볼 수 없이 천박해 보였습니다. 마네는 사회와의 예견된 마찰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 자신의 소임에 충실했습니다. 그에게 화가의 소임이란 세상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세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린 것은 외설적인 창녀가 아니라, 사물과 인간의 실제적인 인상이자 그토록 생생하게 빛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광경이었던 것입니다.
마네가 조금 더 비평가들의 평가를 의식했다면, 그래서 눈으로 본 바를 정직하게 따르는 대신 삶을 미화하는데 재능을 할애했다면, 당대의 부르주아들이 선호했던 화려하고 장식적인 아카데미 풍의 그림을 그렸다면 결과는 예의 달랐을 것입니다. 훨씬 쉽게 성공을 허리춤에 꿰어 찰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성공의 수단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0세기의 초반부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그토록 충실하고자 했던 또 한 명의 젊은 작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청년기의 거의 전 기간 동안 변함없이 러시아 전위미술의 중심에 있었으며 시인이자 극작가였고, 1930년 4월 가슴에 총을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iakovski)입니다. 그는 미술관 안에서나 찬양 받는 죽은 걸작들 대신, 거리와 공장, 그리고 노동자들의 숙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살아있는 예술을 꿈꾸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치고자 했습니다. 이 젊은이는 시와 연극과 미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으리라 순수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사회적 합의에 부응하는 예술이 아니라, 스탈린(Stalin) 정권의 권력과 독선으로 가득 찬 변질된 명령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그의 기대감을 좌초시켰고, 그의 열정을 쇠잔하게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던져 일구려했던 꿈이 무참히 파손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생의 마지막으로 내몰렸습니다. 청년 마이야코프스키는 “가장 아름답고 또 더 어려운 것은 이 땅 위에 삶을 세 우는 것”이라고 외치곤 했지만, 결국 그 꿈의 실현을 돕는 이상적인 예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야코프스키에게도 시와 예술을 향한 자신의 봉헌은 결코 헐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세기 초반 경까지만 해도 화가나 조각가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그러니까 꿈꾸는 비용을 톡톡히 지불하면서, 조금 더 유연하고 타협적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과 기꺼이 맞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진정으로 걸어야 할 하나의 절대적인 길을 걸을 때 종종 피해갈 수 없는 상황들이 초래된다는 것, 작가가 된다는 것에는 바로 이러한 진실을 기꺼이 수용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포스트모던한 문화적 광경들 안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따르고 고난을 무릅쓰는 결정들은 점점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후기-현대의 작가들에서 ‘예술’은 한 물 간 신화에 더 가까우며, 하여 이제는 고작 현실상황 안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방식들이 더 관심을 끄는 주제일 뿐입니다. 뭐랄까, ‘예술‘이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전통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술은 이제 인류에게 그만큼의 공백을 시사하는 하나의 서글픈 상징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현대 미술가 중 한 명인 미국의 앤디 와훌(Andy Warhol)은 이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돈을 버는 예술”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현대미술 다음의 과정은 돈을 버는 예술이며, 자신은 돈버는 사업예술가로 생을 마치고 싶다고 ‘진심으로’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이런 류의 고백은 정직하기 때문에 매우 지적이며 세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신념은 이제 부정직한 것으로까지 전락해버렸습니다. 결국 워홀은 <마릴린 먼로>처럼 쉽게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미지들을 차용함으로써 매우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다음 단계의 예술에 대한 이 미국 미술가의 예언은 현재 빠르게 성취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예술은 문화의 한 분과에, 그리고 문화는 산업적으로만 접근되고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기획되고 경영되는 예술만이 생존의 여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림과 사람들의 조촐한 만남들은 정부적 차원의 지원이나 거대한 재정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거대한 산업, 일테면 '비엔날레 프로젝트' 같은 것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사유와 재능과 싸우는 대신, 훨씬 더 ‘정직하게’ 명성과 돈을 맹렬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가 이미지의 변주들을 통해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게 됩니다만, 여전히 ‘화가’ 를 묻는 질문에는 그렇게만 짚고 넘어갈 수 없는, 인간학의 가볍지 않은 부담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예술의 산업화, 작가의 실패 내부로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서 혹 딜레마에 봉착한 근대문명의 축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술마저 시장(市場)이라면...?”의 정신 깊숙이에서 슬며시 치고 올라오는 불안한 의구심 같은 것 말입니다.
어떻든, 자신의 신념을 따라 자신의 예술로 난 길을 따랐던 사람들의, 그 역경을 마다하지 않았던 열정과 자취들이 그리워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겠습니다. 그들에 말을 걸고, 그들로부터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서는 일 또한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