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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9 | 연재 [문화저널]
<제 21회 백제기행>미륵사와 석공의 장인정신
윤희숙/편집기자(2005-01-25 14:53:47)

익산 미륵사를 스물 한번째 기행지로 결정한 것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백제기행'이 꼭 백제의 문화를 되짚는 작업으로 한정되는 일은 아니래도 우리 지역에서 손꼽히는 작업으로 백제시대 유적지인 미륵사를 찾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며칠전부터 날씨가 흐려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9월 8일은 날이 화창했다. 오히려 늦여름의 강렬한 햇볕에 약간 덥기까지 했다. 언제나 복병은 있기 마련이라고 별문제 없이 떠날 줄 알았던 기행이 버스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침 일찍 여행의 기분에 들뜬 참가자들의 마음을 언짢게 했다.
복잡한 시내를 벗어난 차는 확트인 들녘을 신나게 달렸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에서 허리를 숙여 피를 뽑고 머리에 수건쓰고 김매기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차창 뒤로 멀어져 갔다. 그을린 얼굴위에 깊게 패인 주름이 수확의 기쁨으로 확 퍼졌으면 하는 바램은 오히려 내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봉동읍을 지나서 국도를 따라 약 30여분을 달린 후에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에 도착했다.
미륵불이 왕림하여 현세의 고통과 슬픔에서 중생들을 구제하여 영원한 용화세계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미륵신앙을 토대로 창건된 사찰이 미륵사다. 미륵사찰 뒤로 해발 430미터의 용화산을 중심으로 아직도 미륵불의 출현을 기다리는 신앙이 존재하고 있다니,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데. 당시 민중들과 지금의 민중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기대하는 미륵은 어쩌면 영원히 구원을 염원하는 상징으로만 의미가 있는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미륵사가 고고학적으로 어떤 큰 가치가 있고, 백제의 자취를 더듬는 작업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백제 말엽 마를 캐던 마동이 서동요를 퍼뜨려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이 창건했다는 이 절터는 그 규모나 현재 남아있는 석탑의 크기로 보아 굉장히 컸을 것이라는 짐작은 간다.
특히 국보 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석탑은 이 고장의 으뜸가는 유적으로 꼽을 수가 있다. 높이가 14.2미터나 되어 가장 큰 탑인데,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지금은 6층까지 남아있고, 그나마 일제시대 어설프게 시멘트로 보수를 해놓아 탑을 흉하게 만들었다. 미륵사지에서 본 훼손된 석탑과 받침돌만 남은 석등. 추춧돌만 남아있는 절터, 비닐로 덮여있는 발굴지 등으로는 도저히 전주국립 박물관에 모형으로 설치해놓은 미륵사 복원광경을 유추해 낼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황등면에 있는 '석공예 전시관'이었다. 황등면의 산 곳곳은 빛깔이 곱고 단단한 화강암이 매장되어 있다. 황등과 함열을 지나는 도로변 이곳저곳에 돌가공공장이 눈에 띄었다. 이곳의 화강암은 다른 곳의 것보다 철분 함유량이 적어 쉽게 변질되지 않아 건축재료나 정원의 장식품 또는 비석 조각용으로 널리 쓰여진다 한다. 하지만,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채석광경까지 아름다운 건 아니었다. 좋은 돌을 캐내느라 푸른 산들이 뭉뚱 잘라져 없어져 버리는 중이었다. 수십억의 수입을 가져다 주는 석재산업의 그늘에서 사라지는 자연에 대한 적절한 대책은 세워져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전시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리가 되어있지 못했다. 마당에 모아 놓은 커다란 불상과 비석 등은 유난히 이번 기행에 많이 참가한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은 이것 저것을 만져보고, 거북이 등에 올라타보기도 하며, 신기해 했다.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전시관에는 곱돌과 돌판, 두꺼비조각에서 부터, 식탁, 경대, 화장실 세면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조각되어 있는 응접실용 책상은 몇천만원을 호가한다하여, 기행팀들을 놀라게 했다. 이태리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가 몇천만원 한다는 얘기를 그곳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전에 죽물시장이 있는 담양에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파는 물건들의 상당수가 대만이나,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수입한 것들이어서 놀란 일이 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황등의 좋은 돌은 일본등지로 수출하고, 실제 많은 양의 돌이 외국에서 수입해 온 것이라 한다.
지금은 기계가공을 많이 하기 때문에 직접 손으로 돌작업하는 장인들이 흔치는 않다. 석수가 되려면 처음에는 물심부름이나 잡일을 한 후 1년이 지나야 판석다듬질이나 기초습득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야 돌부처를 제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비로소 10년후에 석수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한다. 그러니 험한일 하기 싫어하는 요즘 석수가 적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속공예 작품을 감상한 기행팀은 황등면에 있는 비빔밥 지정식당인 진미식당에 가서 점심식사를 했다. 전주비빔밥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미식가들에게 돠등의 비빔밥은 제법 알려져 있다. 양푼같은 그릇에 나물과 고기 등 갖은 양념을 넣고 고소한 참기름을 듬뿍 넣은 비빔밥은 기행팀들의 시장기와 합쳐져 최고의 맛을 낸다. 시골의 인심만큼 듬뿍친 고소한 참기름 맛을 혀 끝으로 느끼며 다음에 찾은 곳은 익산군 삼기면 연동리에 있는 석불좌상을 모신 절이었다. 보물 45호로 지정된 연동리 석불좌상은 높이가 169센티미터로 백제 7세기 전반부에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머리부분이 없고, 가부&#51367;나 형상이 특이한 것으로 알려진 이 좌상은 철저한 고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절에 모셔 가부좌 틀은 형상을 오히려 가리게 되었다한다.
버스를 도로에 세워두고 약 100여미터를 걸어 금마면 동고도리에 있는 석불입상을 찾았다. 석불주변과 들판 이곳저곳에 강아지풀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의 석불입상은 200미터쯤의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며, 두 개나 나란히 서 있다. 높이는 424센티미터이며, 고려때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며, 부처상이라기 보다는 마음을 지키는 무속의 석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불입상에 대한 설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풀을 한웅큼씩 꺽어 손에 쥐고 깔깔거리며 장난치는 아이들에게 백제기행은 엄마아빠랑 같이하는 소풍쯤으로 생각될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훗날 이곳을 버스로라도 지나치게 된다면, 그것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는지, 백제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더라도 어릴 적 강아지풀 뜯으며, 놀던 기억 속에 석불입상이 어렴풋이 떠오를 것이다.
왕궁면 왕궁리에 있는 왕궁평에는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았다. 5층석탑 주변에 잔디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기행팀은 주최측이 준비한 음료로 더위를 식히고 탑의 왼쪽 잔디밭에 빙 둘러앉아 윤덕향교수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보물 제 44호로 지정되어 있는 왕궁리 5층 석탑은 백제의 석탑양식에 신라의 석탑양식을 곁들여서 고쳐 초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되는데, 1968년 탑을 수리하기 위하여 해체작업을 하던 중 제 1층 옥개석부(지의 지붕에 해당되는 곳)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심초석(탑의 중심에 놓여져 탑의 중심을 받는 돌)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불상이 출토되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단편적으로 신라의 문화는 귀족적이고 화려하며, 백제의 문화는 소박하고 담백했었다는 기계적인 개념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으로 미루어본 것과 이곳의 왕궁리 5층석탑의 모습은 상당히 일치했다. 얇고 평평한 옥개석이 층층히 놓여져 있고, 추녀 끝이 위로 치켜진 점등은 부여의 정림사지석탑이나 앞서 본 미륵사지석탑과 유사하여, 왕궁 5층석탑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넓고 편편한 탑의 지붕모양이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요즘 명승사찰에서도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절에 콘크리트가 들어가는 것이 불교의 찬란한 문화를 파괴하는 첫걸음이라고 염려하던 어떤 화가의 말이 생각났다. 옛날에 목불이나 석불, 석탑을 제작하는 석공들은 손재주가 아닌 불심에 의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한다. 목불상을 만드는 한 조각가는 나무에 부처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무에 있는 부처를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아마 익산에 있는 탑들도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과 정성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이날 기행에는 처음 참가한 분들이 많았다. 우연히 신문에 실린 안내광고를 보고 참가했다는 나이 지긋한 시골학교 교장선생님은 '이런 의미 있는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지 정말 몰랐다고 하시면서, 여건이 허락되면, 계속 참가하고 싶다'고 하셨다. 특히 전북대 영문과 교황교수로 근무하는 미국인 낸시는 이번 기행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가 궁금했다. 출발할 때 언짢았던 참가자들의 마음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말끔히 씻기워졌을 것이다.
항상 실수투성이인 기행을 다녀온 뒤에도 또다시 다음 기행지를 찾는 참가자들이 어렵게 꾸려가는 백제기행의 든든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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