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3 | [문화저널]
<제24회 백제기행>법성포구의 전설과 오늘의 풍경
정철성/전북대 강사/영문학
(2005-01-25 14:56:26)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경험이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일상의 터전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여행은 대부분 다시 돌아올 기약이 분명하다. 일상의 밧줄이 우리들의 발목을 죄고 놓아주지 않기에 우리는 오랫동안 멀리 떠나있을 수 없다. 하루, 이틀, 사나흘, 일주일, 아무리 늘려 잡아도 보름 정도에 그치고 마는 여가는 사실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
백제기행은 이제 스물네번이라 는 횟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법성포구의 전설과 오늘의 풍경"이 이번 기행의 표어이다. 수은 강항의 사당인 용계사, 원불교 영산성지, 법성포구, 영광 원자력발전소 등을 돌아보기로 작정한 우리는 하룻길에 이곳들을 모두 돌아보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얼마나 서둘렀는가는 평소 말이 어눌하기로 유명한 박남준씨가 대단히 유려 하게 법성포의 어제와 오늘을 자세히 설명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생각하기 전에 말하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생각한 뒤에 말하는 세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박시인은-그는 시인이 다-분명히 세번째에 속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말하는 사이사이에 또 생각한다. 그런데 그가 달리는 버스 속에서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마이크를 붙잡고 많은 얘기를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바쁜 여정이었는가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가 법성포가 어쩌구 오사리 굴비가 저쩌구 하면서 설명을 하게 된 까닭은 법성포가 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려고 떠난 셈인데 그가 쑥스럽게 여길지 몰라 집에까지 들어가지는 않고 마을 고샅길만 휘둘러 돌아보았다. 마침 장날이었던 그날 나는 법성포 거리에서 그가, 저쪽에 지나가는 사내가 만화가게 아들이었던 어릴적 친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윤회숙씨가 나누어 준 자료집에는 그의 첫 시집에서 뽑은 시 한편이 실려 있었다. "사람은 이제 뱃일을 그만 두었다/ 포구의 뒷산에는 아름드리 팽나무가 뽑혀지고/아스팔트의 큰 길이 뚫렸다. / 철근과 시멘트를 실은 차량이 매연에 감겨 질주하고/포구는 술렁이고 있었다..." 그의 시가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에 싸여 있듯이 영광굴비와 원자력발전소의 두가지로 상징되는 법성포를 돌아보는 심경도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굴비가 올라온 점심을 먹으면서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영산성지는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태어나서 살다가 도를 깨친 곳이다. 버스에 흔들리면서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를 찾아가는 길에 이 척박한 시골에 무슨 기운이 서려있을까 궁금하던 것이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영산 들어가는 길에 갑자 기 산세가 일어나며 바위벽이 웅장하게 나타난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원불교의 상징인 일원상이 앞산 꼭대기에 커다랗게 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우리 일행을 맞은 분은 영산대학에 계신 박맹수선 생이다. 영산대학은 말하자면 원불교대학이다. 박 선생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분답게 민족 정기가 강하게 실린 이 지역의 특성을 설명하였다. 우리를 안내한 또 한 분은 김현 성지사무소장 이었다. 김 소장은 교역자답게 울림이 좋고 부드러운 음색을 지닌 분이었는데 신도들도 아닌 이 구경꾼의 무리를 친절하게 안내하였다. 우리가 마루에 걸터앉아 설명을 듣던 숙소의 마당에는 매화가 피어 있었다.
원불교의 교리를 전혀 모르는 나에게 특이하게 여겨진 것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 태어난 고장이라는 것이었다. 노루목-정말 목이 진자리이다-대각터에는 지금 만고일월(萬古日月)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있다. 이 자리와 옥녀봉 아래의 탄생지는 건너다 보면 정지 살강에 엎어놓은 주발이 똑똑히 보일 만한 거리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집 안방에서 도를 얻는다.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세해 전의 4월28일 새벽에 이른바 일원대도(-圓大道)가 이루어진 것이다. 원불교는 태어남보다 깨달음의 시기를 중시하여 이 해를 원불교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에 감동이 흘러들어 온때는 정관평(貞觀坪)을 본 순간이었다. 대각 후 교화를 시작하는 한편 저축조합을 결성하여 생활여건의 개선을 모색하던 대종사가 본격적으로 실행한 사업은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든 일이었다. 원기 3년 3월에 시작한 방언공사로 약 일년 후에 이만육천여 평의 논이 생긴다. 여기 참여한 사람은 대종사 자신을 포함하여 아홉 사람의 제자가 전부였다. 이 땅이 정관평이다. 정관평은 초기 원불교의 재정적 기초가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지만 그보다 생활 속에 뿌리박은 원불교 교리의 핵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욱 귀한 자산으로 평가되는 것 같았다. 정관평을 내려다보기 위해 우리는 옥녀봉 기슭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방언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을 기념하여 바위에 새긴 비문이 있었다. 사실 비문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금석문이다. 평평한 바위 표면에 네모지게 각을 뜨고 그 자리를 시멘트로 채운 다음 글씨를 새긴 것이다. 내용은 세로 쓰기를 靈光白岫吉龍,
줄바꿔서 天瀉地雨處防?組合, 이어서 참여자의 이름을 주욱 새긴 다음, 끝에 大正七年四月四日始, 大正八年三月二十六日終이라 하였다. 이는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냇물 양쪽 뻘밭에 제방을 쌓으려는 조합의 아무개가 대정 7년4월 4일에 시작하여 대정 8년 3월 26일에 일을 마쳤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일본왕 다이쇼 시절의 연호인 대정 8년은 서기 1919년이다. 이 비문을 가리키면서 박맹수 선생은 원불교가 촌놈의 종교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였다.
식민지 치고 제대로 된 땅이 있을 리 없지만 절망의 늪에 빠져 제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던 시절에 이러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영광 원자력발전소는 영광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흥농읍에 있다. 원전이 생기면서 덕분에 읍으로 승격해서 그런지 흥농은 읍같지가 않았다. 흥농을 지나 바다 쪽으로 가니 원자로 둥근 콘크리트 지붕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는 전시관에 가서 원자로의 모형을 보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큼지막한 유리액자에 당당하게 걸린 [원자로의 불새]라는 제목의 시를 읽기도 하였다. 전시관 앞에서 바라본 원자로들은 가동중인 1,2호기 외에도 한창 건설중인 3,4호기가 있었다. 5,6호기도 지을 예정으로 부지를 닦아 놓았다고 한다. 망연히 바라보는데 김은정 기자가 참고하라고 홍보물을 한 무더기 건네어준다. 모두 원자력의 효용과 안정성을 선전하는 책자이다. 사실 우리는 원전을 보러가는 길에 반핵운동을 하고 있다는 장주선선생도 만났다. 그는 남도사내의 칼진 사투리에 우스개 소리를 섞어 원전의 득실을 설명하였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주장을 들을 때는 양쪽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판단은 그 다음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기 저집에서 무뇌아가 태어났고, 기형가축이 나왔고 하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기형가축은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영광원전인 인근에서는 방사성 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설명으로도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는다. 홍보만화는 원전과 원폭을 맥주와 공업용 알콜에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안전하다는 얘기일텐데 술에 약한 사람은 맥주 한잔에도 취하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인위적으로 하는 일에는 부작용이 따르는 법인가 보다. 수력발전소는 건설 후 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되고, 유지비도 적게 들 것이다. 그러나 수력발전을 위해 만든 인공호수가 예기치 않았던 생태계의 변화를 초래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수자원의 이용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다른 방안을 찾기는 찾아야 하겠지만 원전이 최선의 방법인가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금정산을 크게 돌아서 원자력 발전소 건너편의 가마미 해수욕장에 갔을 때 자꾸 일어났다. 가마미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에 싸여 있었다. 해안을 따라 가면서 우리는 소가 고양이를 물고, 고양이가 쥐를 모는 형국이라는 소섬, 괭이섬, 쥐섬을 보았다. 섬들은 누군가가 그들의 달음박질을 훔쳐 보았기 때문에 그대로 굳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부동자세로 서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가만가만 발을 저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가마미는 쥐섬이 기어오르려고 애쓰는 언덕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가마미 뒷켠으로는 송림이 울창하였다. 아직은 철이 일러 제빛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름이면 솔잎을 스쳐오는 바람이 감탄의 환영을 받을 만 하였다. 그러나 가마미는 죽어가고 있었다. 원전에서 취수구 확보를 위해 쌓은 제방 때문에 뻘이 밀려드는데다가 제방 아래쪽으로는 모래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눈길을 주면 원전의 둥근 지붕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오는 통에 찾는 사람도 격감했다고 한다.
우리는 용계사를 포기하고 대신 불갑사(佛甲寺)를 보러 갔다. 불갑사는 나주 불회사와 함께 남방불교의 유입 통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세워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백제 최초의 사찰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는 것이다. 법성포(法聖浦)라는지명도 불교문화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명칭이고 보면 마라난타존자가 동진을 거쳐 백제로 왔을때 뱃길을 타고 이곳 법성포로 들어와서 불갑사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럴듯하다. 그때가침류왕(서기 384년)이라면 천육백여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대웅전 벽에 남방불교유입설을 증명하는 코브라 그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있는데 보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이 범부의 눈이었던 모양이다. 대웅전의 문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연꽃무늬를 하나하나 새겨 둔 정성이 손에 잡힐 듯하다. 부처님은 여느 절과는 달리 마당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보아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을 바라보는 형상이었다. 왜 틀어 앉으셨을까? 들어가 보니 닫집의 모양도 섬세하다. 오랫동안 향냄새에 담겨있었던 기둥이며 천정의 묵은 단청의 색조는 숙연하였다. 대웅전 옆의 축대 위에는 간결하게 처리된 거북머리 위에 비문도 없이 각진국사(覺眞國師)라고 해서체로 새겨진 비신이 서 있었다. 그는 또 누구인가? 대웅전의 뒷켠에는 키를 넘겨 잡석을 쌓아올린 축대가 있다. 이끼에 묻혀 사람의 손때가 가셔버린 이런 돌담은 세월의 깊이를 품고 있다. 몇 번씩이나 다시 쌓았겠지만 이중에는 절을 처음 지을 때의 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불갑사에서 나는 새로 세운 두개의 석물을 보았다. 하나는 대웅전 뒤 계단 옆에 세워진 석둥이다. 그 하대석 옆면에는 "친우 고 염동설군의 1주기를 추모하면서"라고 새겨져 있다. 세운 이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았다. 두사람이 누구인지, 교분이 어느 정도였는지 모르지만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석등을 보고 가는 사람들마다 마음에 불을 켜고 저마다 사연을 꾸며볼 것이 아닌가. 또 하나는 입구쪽으로 세워진 탑이다. 기계시대의 작품답게 자른 듯한 선의 처리가 매정한 느낌을 주는 탑이었다. 그래서인지 일행중에는 절에 너무 새것이 있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의 탑이 필요한 법이 아닌가? 나는 정과 망치로 두드려 만든 옛탑의 정취를 우리 시대에 되살리는 방법이 문제인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오면서 보니 작은 시내가 흘러나오는 곳에 연실봉이 서 있었다. 안내판에는 연실봉 기슭에 참식나무 군락이 있다고 적혀 있다.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섭섭하지만 발길이 트였으니 다음에 또 올 수 있을 것이라 위안하며 머뭇거리는데 어서 가자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흐려 해안도로를 따라 돌아오면서 낙조를 보겠다던 다짐은 허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백제기행 스물네번에 비온날은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복이다. 다음에는 서산으로 '백제의 미소'를 보러가자는 얘기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