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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4 | [문화저널]
<제31회 백제기행>저 남쪽 유배의 땅에 간다 _ 한국의 정자문화와 가사문학
윤성환/전주 완산고 교사 (2005-01-25 15:02:57)
양광이 따스하게 어깨를 적시는 토요일 오후, 가벼운 설레임 속에 우진문화공간 앞으로 갔다. 가벼운 복장에 모두들 즐겁게 웃으며 낯익은 얼굴들인 듯 담소를 하다가 차에 올랐다. 이번 31회 백제 기행은 가사문학이 이루어진 전남 담양, 장성일대를 돌아보며 정철, 송순 등 조선시대 일대 문장가의 숨결이 깃든 누각과 정자를 돌아볼 예정이다. 먼저 광주국립민속박물관에 내려서 이내옥 학예연구관으로부터 자세한 안내를 받았다. 1층에는 불교문화와 조선시대의 산수 화가가 있었는데 특히 중흥산성 쌍사자석등과 사리 장치 범종이 볼만 했다. 2층에는 선사 시대의 옹관과 신안에서 출토된 유물이 있었고 고려 청자 분청사기 청화백자 등 우리 선조들의 찬란한 문화재가 있었다. 다만 안타가운 것은 그러한 귀중한 많은 유물이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앞에서는 신혼부부들이 행복하게 사진 찍고 웃으며 세월의 무상함을 봄볕 속으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이어서 장성 전남대 수련원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전남대 국문과 김신중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정자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고 그 곳에서 무엇을 꿈꾸었는지 자세하고 재미있게 들려 주셨다.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고해에 있는 세인(世人)들의 이상향이었다면 유학자들의 이상향은 강호세계(江湖世界)로써 자연의 숨결을 벗삼아 풍류를 아는 것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국악을 감상했다. 영산회상중 상영산과 산조를 거문고와 아쟁 연주로 감상했다. 아쟁 산조는 한서린듯한 애절함으로 감동을 주었다. 다음날 아침 어슴푸레 안개가 깔린 산길로 산보를 나가서 자연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가장 인간답게 되는게 아닐까 할 정도로 자연의 푸르름이 내 가슴을 적시는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 백암산 백양사에 들렀다. 백제무왕 33년 여환선사에 의해 개창된 이 사찰은 지금도 면면히 내려온 禪家의 家風을 계승하고 있었다. 고요한 선방 너머 조사의 안목이 섬광보다 빠르게 비켜가고, 大雄殿에는 그득한 부처님의 미소가 如如히 법당을 감싸고 우리 가슴에도 따스함과 여유로움을 안겨준다. 이어서 담양군 봉산면에 있는 면앙정(&#20443;仰亭)으로 향했다. 풍경 좋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企村 宋純이 1533년 (중종 28년) 은퇴하여 향리에 이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당시의 선비들과 국사를 논했다 한다. 거기에 걸린 편액에 &#20443;有地 仰有天 亭其中 與浩然招風月揖山川 扶錫杖 送百年 (땅은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르며 그 가운데 정자가 있나니, 창창한 그 가슴에 풍월을 부르고, 산천을 벗삼아 석장을 짚으며 백년을 보내노라)라는 시에서 면앙정이란 말이 나왔다 한다. 여기에 나오는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 창창한 이 가슴 부끄러울 바 없노라’하는 말을 맹자가 말은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하나로 거기에서 나온 &#20443;仰을 본따서 이 정자가 세워졌다. 그리고 한국가사문학의 최고인 송강 정철(松江 鄭撤)의 송강정(松江亭)으로 갔다. 담양군 고서면에 있는 이 정자는 정면에 송강정, 측면에 竹 亭이란 현판이 있는데 주위에 대밭이 있으며 정자 앞으로 송강 또는 죽족천으로 불리우는 증암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정철이 선조 18년 (1585년) 대사헌을 지내다 당시의 치열한 당쟁에 휩쓸려 평창(平昌)으로 내려와 있으면서 경치 좋은 이곳에 정자를 세웠다고 했다. 송각은 이곳에 4년 남짓 머물면서 芝谷의 식영정(息影亭)을 왕래하며 시를 지었는데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비롯한 많은 시가가 여기서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55년 후손들에 의하여 중수되었고 사미인곡 시비도 서 있다. 이곳은 지금 지방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식영정(息影亭)으로 향하는 길,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잇는 이 정자 앞으로 거대한 광주호(光州湖)가 있다.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송강 유적으로 일괄하여 지방기념물 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명종 15년(1560년)에 서하당 金成遠이 창건하여 장인인 石川 임억령(林億齡)에게 증여한 것이다. 김성원은 임석천에게 와서 글을 배우며 지냈는데 이때 고경명, 정철 등과 함께 교유했고, 그래서 이들을 식영정 四仙 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식영정 주변 성산의 경승을 주제로 20수씩 80수의 제영(堤泳)을 지었는데 이것이 송강의 「성산별곡(星山別曲)」 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들 외에도 면앙정 송순, 사촌(沙村) 김윤제, 하서(河西) 김인후, 高峯 기대승, 소쇄 양산보, 玉峯 백광훈, 龜峰 송익필, 김덕홍, 덕령, 덕보 형제등 당대의 명사들이 식영정에 출입하였다고 한다. 1972년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當)이 건립되었고, 송강집 「松江集」의 木版을 보존하기 위해 1973년 장서각이 건립되었다.「성산별곡」의 시비도 이곳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광수시 충효동 광수호옆의 환벽당(環碧堂)으로 걸어갔다. 인종때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가 별장으로 지은 것으로 창계천(蒼溪川)을 사이에 두고 약 25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식영정이 있으며 바로 곁에는 취가정(醉歌亭)이 그 동쪽으로 천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獨守亭이 있다. 원래는 창계천에 홍교(虹&#24973;)를 가설하고 종질되는 서하당(捿霞堂) 김성원과 내왕했다고 하나, 지금은 홍교를 볼 수 없다. 이곳은 또 송강 정철이 16세기 사촌을 만나 27세에 관계(官界)에 나아갈 때까지 유숙하면서 수학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촌이 잠을 자다가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용이 내려오는 꿈을 꾸고 기이하게 여겨 하인한테 밑으로 내려가 보라하니, 창계천에 仙童 같은 꼬마 하나가 목욕을 하고 있어서 불러들이니, 그가 바로 송강 정철이었다고 한다. 당시 송강은 一家가 廢家의 시련속에서 부친 정유침(鄭惟沈)을 따라 서울에서 창평으로 내려오던 길목이었다 한다. 송시열의 제액(堤額), 임억령과 조자이의 시만이 현판으로 남아 있다. 다음 찾아간 취가정(醉歌亭)은 광주시 충효동 광주호 옆 산록에 있다. 환벽당, 식영정, 독수정 등과 더불어 유적한 정취를 자아내지만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다. 석주(石州) 권필의 꿈에 선조 때 의병장인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이 나타나자 시로 화합하여 충장공의 원혼을 달랬다는 사연을 기려 1890년(고종27년) 충장공의 후손인 김만식과 旅人들이 충장공의 생장지인 이곳에 세웠다. ‘취가’는 권석주의 꿈에 나타난 충장공의 「醉時歌」에서 따온 것이다. 그 외에 김신중교수님의 충장공에 얽힌 전설과 억울하게 죽게되는 사연이 깃들어 더욱 감회가 깊었다. 이어서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소쇄원(瀟灑園)에 들어갔다. 1530년(중종25년)에 소쇄 양산보(梁山甫)가 만든 것으로 대표적인 조선시대 전통의 민간 원림으로 꼽힌다. 소쇄원 입구를 알리는 조그마한 간판에 유의하지 않으면 하늘을 찌르는 대숲 눈이 파려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죽림사이로 흐르는 조그마한 계류를 보고 대숲 앞에 설 때 비로소 무릉도원의 입구인 양 온 몸을 싸고도는 알 수 없는 흡입력을 체험하게 된다. 작은 길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맞기고 오백년 묵은 대숲에서 풍기는 비린듯한 상큼한 죽순 냄새를 맡으면서 눈을 감으면 눈보라 실은 삭풍이 대숲을 가른 소리며, 빗방울이 댓잎에 구러 듣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시 눈을 뜨면 그 사이에 dddd에 들어서니 이곳이 소쇄원 內園이다. 조선조 중종년간 사대부가 이른바 왕도정치를 표방, 질풍같은 개혁정치를 펼치다가 보수파의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해괴한 무고를 받아 전라도 능주로 유배된 조광조가 있으니, 양산보는 그의 아끼는 제자엿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늘 이곳에 조그마한 모정(募亭)을 하나 가졌으면 했다. 그리하여 처음에 초정(草亭)을 지었다가 마침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해온 외종형 면앙정 송순의 도움으로 소쇄원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소쇄처사로 불리우며 후손에게 말하길 나무 한 그루라도 훼손하면 내 자손이 아니랄 만큼 이곳을 사랑했다고 한다. 전원은 죽림부터 별뫼에서 발원한 계류가 원림공간으로 흘러오는 오곡문까지로 계곡 오른편의 공간이다. 크게 대숲과 도로, 단방을 중심으로 한 시설물 일체인데 주공간인 광충각과 제월당이란 정각(亭閣)이 있다. 원림의 경계를 이루는 담장은 기와지붕을 이어 애양단(愛陽壇)이라 부르고 계루가 흘러드는 수구는 오곡문(五曲門)이라 이름 붙였다. 흘러든 물이 다섯 번 굽이쳐 폭포로 떨어지기 때문이라는데,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 중 제5곡을 염두에 둔 명명으로 생각된다. 스스로를 주자에 견주고자 하는 뜻이었으리라. 애양단은 이름 그대로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공간인데 이곳 흙담에 김하서가 소쇄원 경치를 읊은 ‘소쇄원사심팔경’을 적어 놓았었다 한다. 담 아래 계곡은 아직 얼어 붙었는데 담 위에 쌓인 눈은 모두 녹았네 팔베고 햇볕을 쬐고 있자니 한낮 닭 울음 소리 다리까지 들리네. 이처럼 따뜻한 애양단 앞에 대봉대라는 모정을 얽고 옆에 오동과 산죽을 심었다는데, 봉황을 기다리는 배려요, 이는 다름 아닌 태형성대를 기원하는 뜻에서였다. 지금 산죽은 없고 오동나무는 새로 심어 잎이 돋았다. 이어 담양골에선 가장 오랜 정자인 독수정(獨守亭)에 들렀다. 정자는 고려말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세운 것으로 고려가 망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세웠다. 정자의 이름은 이백(李百)의 시에 나오는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서산을 지켜 주려 죽었네(弟劑是何 人獨守西山 食我 )”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의 고절(高節)을 나타낸다. 그리고 5.18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였다. 숱한 고귀하고 젊은 넋이 스려져 묻혀있는 이곳에서 모두들 숙연히 역사를 다시 반성했다. 아직 완전히 해결이 안된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그때 그 함성, 자유의 몸짓이 너무 강하고 처연하게 울려왔다. 누가 역사앞에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엄숙한 질문에 뭇영령들 선포하니 그 눈빛이 지금도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담양죽물 박물관에 들러 민예품, 경진대회제품, 외국에서 만든 대나무제품 등을 구경하면서 훌륭히 전승되어온 죽공예의 솜씨에 감탄했다. 몇가지 죽공예품도 사서 전주로 돌아오는 길목은 마치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빠져나오는 듯 했지만, 선조의 지혜와 숨결, 그 風流의 멋과 가락은 변치 않고 가슴에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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