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4 | [문화저널]
<제37회 백제기행>봄의 소리 들노래를 찾아서_
(옥구 익산 민요기행, 마한 백제시대 유적지 발굴현장)
박난준 군산개정 간호전문대교수
(2005-01-25 15:08:16)
지난번 고부들판을 찾는 백제기행 때는 시간이 너무 늦게 되어 군산으로 되돌아 왔었다. 그런데 나를 위해 여러분이 기다렸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이번 기행에는 마음먹고 일찍 전주로 향했다. 기행 때마다 느끼는 약간의 설레임을 만끽하면서...
고백 하건데 노래라면 당연히 서양노래, 그것도 유행가는 잘 부르지도 못하는 터에 농요인 들노래라니! 사실 우리나라 고유노래도 아리랑 외에 아는 것이 무엇이 있던가! 그래서 이번 기행을 계기로 관심이라도 가져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했는데 무겁게도 기행문을 쓰게 되어 있는 그대로 무식함을 드러내놓게 되었다.
30명이 넘는 듯한 우리는 김익두 선생님의 노동요에 대한 전반적인 강의를 들으며 익산지역으로 향했다. 익산은 부여지방과 함께 마한-백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기름진 당과 나지막한 구름이 조화를 이룬 사람살기 좋은 곳답게 푸릇한 연초록에 덮힌 들판은 편안함을 선사했다.
왕궁면 왕궁리 5층석탑은 백제석탑을 모방한 고려 초의 것으로 보물이란다. 썰렁하게 투박한 모습으로만 보였던 그 탑이 오늘은 듬직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며 혹시 왕족의 품위라도 묻어나지 않을까 살피게 됨은 윤덕향 교수님의 설명 덕분이다.
금마면엔 미륵사지 석탑이 있었다.
아주 드라마틱하게 시멘트에 기대어 있는 이 탑은 서기 600년 경에 백제 무왕에 의해 세워졌고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석탑으로 걸작이다. 현재 반파된 형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은 것은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벼락을 맞았기 때문이고 그 흉측한 시멘트 존재는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한 결과 때문이다. 이 탑을 보고 있으면 백제의 멸망부터 그 이후 시대가 차례로 지나가는 듯 하다. 눈을 돌려 서탑과 똑같이 복원되었다는 동탑을 바라보면 오늘의 전라도 현실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황등석 가운데 최우량 화강암이고 9층 네 모서리마다 달린 풍탁도 황금색을 번쩍이는데 바람에 흔들려 오는 소리는 예사스럽지 못하고 어색하기만 하다. 문화재 복원에는 한계가 있고 말 못할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미륵사는 미륵상존이 나타났다는 연못을 메우고 그 위에 세운 백제 말기의 가장 큰 사찰로 3원3탑의 특수구조를 가졌다는데 동, 서탑보다 크고 더 먼저 세워졌을 가운데 목탑은 또 얼마나 크고 화려했을까? 석가불이 못다 구제한 중생들을 모두 구제한다는 미륵불은 지금 도솔천에 계시면 오늘의 우리와 옛날의 백제인을 다르게 평가하고 계실까? 상상 속에 목탑을 그리며 미륵불께 간절히 기원하건데 아픈 역사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소서!
저녁해를 바라보며 우리는 익산군 삼기면 농요전수관에 도착했다. 많은 대학생이 소리를 배우기 위해 수시로 찾아온다는 이 마음엔 익산 농요보존회 회장 박갑근(77세)씨가 계신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 그는 최고의 노래꾼이지만 우리가 방문한 그 날엔 피로함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삼기농요회 회원인 남궁홍(63세)노인이 소리를 대신하였다. 그것은 김성식씨의 끈질기고 능청맞은 진행 솜씨 덕분이었다.
이 마을 노래에는 모심을 때 부르는 「농부가」 김맬 때 부르는 「만물산야」 벼를 벨 때 부르는 「벼베는 산야」 볏단 나를 때 부르는 「등짐 노래」 타작할 때 부르는 「방아찧기 노래」가 있다. 특히 익산 고유의 「지게 목발노래」는 휴식시나 오락할 때 부르는데 1977년에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고 1973년 전북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우린 전수관에서 「만물산야」를 다같이 배웠다. 엇중모리 장단인 6박자 노래는 “합쿵짝 쿵척쿵”이라는 설명을 곁들인 유장영씨의 노래지도로. 만물은 끝물이란 뜻의 마지막 논메는 것을 말하며 산야는 백제가곡인 산유화 즉 가요를 한데 묶은 것을 가르킴으로 「만물산야」는 끝물 논메기 노래이다. 이 노래는 가사가 어이없어 재미있고 특히 받는 소리의 마지막 부분인 “오호-옹 하고”는 너무도 설명적이어서 글을 읽는 것 같아 우습다.
우리가 들은 들노래들은 주거나 받거니 한데 어우러지는 멋이 있고 실제로 일하는 흉내를 곁들여 들으니 이해하기 쉬웠다. 이 마을엔 1972년 삼기농요회를 구성했는데 그 때 회원40명이 현재 26명으로 줄었고 논을 메는 일도 제초제 때문에 없어져 노래도 안 불린지 오래라고 걱정하는 것을 보니 삶이 곧 문화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황등에서 지낸 하룻밤은 들노래 이해를 많이 도와주었을 텐데 나는 그 융통성 없는 습관-10시엔 취침- 때문에 중요한 순간을 놓친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맑은 햇살을 듬뿍 받으며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탑골마을로 고판덕(95세)씨를 찾았다.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동리로 제주 고씨와 남원 양씨가 모여 사는 130호의 동족마을이다. 마을이 생긴지는 약 350년으로 추정되며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11대째가 된다고 한다. 뒤쪽의 얕은 산은 마을을 감싸는 듯하여 앞쪽엔 넓은 들판으로 터져있는 이 마을은 부촌이라기보다는 알뜰하고 소박한 마을이란 느낌을 주었다. 마을 어귀엔 튼튼하게 생긴 모정이 있고 조금 떨어진 앞쪽엔 검소한 모습의 노인회관이 있었다. 우리는 노인회관의 좁지만 아늑한 방에 들어가 모두 앉았다. 이 노인회관은 197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때 3등 상금을 타서 지은 건물이라고 자랑했다. 상을 탔다는 노래가 「옥구 들노래」라 한다. 조금 후 고성락(77세)씨를 비롯하여 5명의 노인이 모였다. 고판덕(95세)씨를 찾는 우리에게 그 분은 작년(93년)에 작고하셨다고 설명하시며 고성락씨는 본인이 소리를 이끄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동네 노인들은 옥구 들노래를 차례로 하나씩 들려주었다. 「분무타령」은 대장간에서 바람내어 불붙을 때 부르는 노래이고 「만경산 타령」은 넓은 논을 호미로 천천히 매면서 부르며, 「오호타령」은 논을 빠르게 호미로 멜 때, 「자진산 타령」은 밭일을 빨리 호미질할 때, 「예이싸호」는 둥그렇게 모여 일을 마무리지을 때 부르는 노래란다. 고성락 노인은 그 외에도 몇 개의 잡가를 기억을 더듬어 들려주었고 마지막엔 자작가요라며 「화초타령」을 소개했다. 거의 20개가 넘는 화초의 이름을 작은 창호지에 써서 열심히 갖고 다니시는 모습에서 우리 소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보여졌다. 지금 탑골마을에서 들은 노래들은 앞서 검지마을에서 들은 노래보다는 따라 부르기가 조금 쉽고 재미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미리 나누어준 악보를 보아가며 노인을 따라 「만경산 타령」을 배웠다. 처음에 나는 이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보고 「만경산 타령」은 만경산에서 부르는 노래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만경은 넓은 논이란다. 그럼 산타령은 무엇인가 했는데 지금 고씨 노인의 말은 ‘음표가 있나 콩나물이 있나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이 산타령이여“한다. 그래서 산타령은 쉽게 부를 수 있나보나 했더니 만경산 타령은 설명처럼 쉽게 배워지는 노래는 결코 아니었다. 하여튼 들노래들은 듣기는 음악성이 꽤 있는 것 같이 들리는데 영 똑같이 따라 부르기는 어지간히 어려운가 보다.
대야로 나와 점심을 먹고 군장국가공단 조성 지역 내 유적을 보기 위해서 해안 섬으로 향했다. 가도에 도착하여 유적 발굴조사에 열중하고 있는 충남대 박순발교수와 학생팀을 볼 수 있었다. 박 교수는 이 조개무덤은 계절적인 주거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영지로 추정된다며 신석기 시대부터 백제시대에 걸친 여러 가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5C 무렵 백제인으로 보이는 30대 청년의 인골도 보았는데 사람의 인골이 그 오랜 세월을 지내고도 이렇게 양호한 상태로 남은 것은 조개껍질 속에 있는 석회질 때문이란다. 호화롭게 죽지 못하고 겨우 조개껍질에 묻혀 죽은 것이 15C가 지난 지금 국립 중앙박물관에 모셔지는 영광이 될 줄은 고인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삼가 명복을 빈다.
오식도에서는 아직 남아있는 당집을 보았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용왕산을 모시는 집이라는데 외견상, 분위기상 인디언 추장집을 연상시켰다. 울창한 대나무 숲 속에 아늑한 마당이 잇고 당집은 성황당과는 달리 아주 편안하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코스로 들른 조촌동 발굴조사 지역에서 여러 종류의 무덤들을 보았다. 이름도 생소한 토광묘, 석곽묘, 석실분, 회곽묘 등은 생각보다 묘라는 것이 종류도 다양하고 사치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이 곳이 군산지역의 마한, 백제 조선시대의 무덤유적으로 무덤제도의 변천을 보여주는 곳인가 보다. 군산대 박물관 곽장근씨는 군산은 발이 닿는 곳마다 유적이 깔린 곳이라 설명한다. 이 바람 많고 을씨년스러운 군산이 그렇게 멋이 숨어있는 곳인줄은 미처 몰랐다.
살아있는 동안 내내 노래 부르고 죽어서 누워있는 동안 사치스러운 집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도 행운에 혹하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