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10 | [문화저널]
<제45회 백제기행><적과 동지, 용서받지 못한 역사>대구 거창 해방 50주년 기념기행
문병학 시인
(2005-01-25 15:15:47)
가을 山寺 그리고 비에 젖은 사색
출판 일정이 못박힌「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사업 자료집」원고를 쓰느라고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거의 한 달 가량을 씨름하고 있었다. 10월 10일이던가 그날따라 문장이 앞뒤가 맞아들지 않고 자꾸만 뒤틀렸다. 그러던 차에 전화벨이 울렸다.
“예 기념사업횝니다”
“알아요 기념사업횐 줄 알고 전화했어요”
“아 예 선배님!”
그 선배는 대뜸 문화저널 제45회 백제기행을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사무실 일정을 머릿속에 휑 돌려보았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영 비울 수가 없다는 답이 나왔다. 그런데 내 마음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이 선배는 대뜸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같이 안갈테면 인연을 끊던가........”
전화를 끊고 맹물을 한 잔 마시면서 45, 45라 자꾸만 그 숫자를 되뇌어보았다. 기행을 45회째 진행해 온 문화저널 식구들이 전에 없이 존경스러워지면서 아닌게 아니라 내가 겁나게 몹쓸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백제기행을 마흔다섯 회째 이어오는 동안 ‘시상에나 단 한번도’그 기행에 참가한 적이 없었으니 여태껏 인연을 끊지 않은 그 선배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괴기도 묵어본 놈이 잘 묵는다’고 했던가? 나는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익숙한 편이 못 된다. 그것은 아직 여행의 진짜 맛을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보다는 근 십 몇 년간을 개인적인 그리고 시대적인 조건 탓에 여행이라는 것을 아예 잊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튼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마는 언제부턴가 나와 여행은 궁합이 영판 잘 안 맞았다.
백제기행을 떠나기로 해놓고 나는 그 일정에 사무실 일거리를 맞추느라고 떠나기 전날도 꼬박 날을 세우면서 원고와 씨름을 했다.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데 드디어 백제기행을 떠나야 할 날이 내 앞에 떠억 버티고 섰다. 서둘러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는 신파조로 ‘도대체 왜 이렇게 살아왔더란 말인가?’ 중얼거리면서 우진문화공간으로 향했다.
버스 한 대가 도착해 있고 그 주위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담소하고 있었다. 한눈에 여행을 가는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옷을 입고 다들 배낭도 메었는데 나만 덜렁 빈몸이었다. 반갑게 내미는 손들을 잡고 인사를 나눈 뒤 나는 버스에 올랐다. 좌석 중간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빌어먹을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기행 일정과 기행지에 대해 꼼꼼하게 적은 자료를 문화저널 기자에게 받아 읽었다. “적과 동지, 용서받지 못한 역사”라는 주제가 걸린 제45회 백제기행은 해방 50년 분단 50년을 맞아 기획된 역사 기행의 하나로 ‘백제’땅이 아닌 대구와 경남 거창을 들르게 되어있었다. 첫날에는 1946년 해방 이듬해 있었던 10․1항쟁은 고장 대구를 들러서 다음날에는 대구의 달성공원의 이상화 시인의 시비를 돌아보고 1951년 자행된 양민 학살의 현장인 경남 거창을 들러서 다시 전주로 되돌아 오는 일정이 적혀있었다. 자료를 읽다가 어느결엔가 나는 잠이 들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눈을 떠보니 차창에 거대한 산들이 연줄연줄 지나갔다. 어는새 기행 차량은 남원을 지나 지리산 겨드랑이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들과 산에는 가을이 사뭇 깊어있었다. ‘으윽 시상에나.......가을이 이처럼 깊어지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나가 뭔 사람이여’ 쉬익 - 하얀 갈대가 바람에 몸을 눕히는가 싶더니 이내 다소곳이 제몸을 추스렸다. 산자락의 단풍잎도 볼따구를 빨갛게 붉힌 채 겹눈질로 겸연쩍게 나를 쳐다보았다. 씁쓸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도시에 몸을 갇혀두고 오가는 계절과 수인사도 못하고 살아온 요 몇 해가 으스스 몸서리쳐 왔다.
지리산은 그냥 지리산이 아니었다. 남원쪽에서 접어들 때는 해가 한참 남아있었는데 그 산을 넘어 대구 근교에 이르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대구로 접어드는 인터체인지에는 차들이 밀려 거북이 운행을 하였다. 쉽게 그 막힘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창 밖에 내리는 어둠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땅거미가 차츰 깊어지고 차창 밖의 사물이 흐릿해졌다. 창밖이 어둠에 덥히자 그곳을 향했던 내 시선에 마침내는 내가 비치지 시작했다.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뒤적뒤적 모닥불 속의 고구마를 찾듯이 지나온 요 몇 해를 찬찬히 되작거렸다. 스스로의 모습을 뒤돌아보는 것이 늘 그렇듯이 사뭇 비장하게 서글퍼졌다. 다행스럽게도 서글픔은 차츰 사라지고 가슴이 훈훈해지면서 새로운 삶의 의욕이 꿈틀꿈틀 살아왔다. 하, 거참 나서길 잘 했네, 그래, 썩을 것, 세상 잡일 내일까지는 아조 빠이빠이여 빠이빠이!
기분이 유쾌해졌다. 도로의 서정도 좋아졌는지 둑 터진 봇물처럼 갑자기 차가 속력을 내었다. 그러더니 이내 차창의 내 모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도심의 밤 풍경이 들어앉았다. 얼마를 달릴 후 우리들은 첫날 숙박지인 ‘갑우정’에 닿았다.
‘갑우정’은 정밀기계를 제작하는 ‘갑우정밀’이라는 회사 사장 소유의 별장인 셈인데 일반적으로도 돈 있는 사람들이 도시 근교에 마련해 두고 가끔 이용(?)하는 별장과는 좀 다른 의미의 것이란다. 사장 개인의 별장이 아니라 회사 직원들의 교육이나 회식 등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도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그 분위기가 돈벼락 맞은 졸부들의 그것과는 아조 분위기가딴판이었다. 대개의 경우 별장하면 그 주위나 뜰에는 의례껏 수입목이나 값비싼 수석들 즉 ‘돈나무’ 나 ‘돈돌’들이 즐비하기 마련인데 이 별장을 그렇지가 않았다. 조선천지 지천에 널려있는 소나무가 입구에 늘어서 있고 뜰과 위안에는 다래넝쿨이 엉클어져 있고 감나무 앵두나무 등등 순 조선 토종들로만 꽉 차 있었다. 또 너른 뜰에는 확독(물을 담아 놓을 수 있는 돌덩이)과 돌탁자가 고인돌처럼 놓여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갑우정’의 주인은 확실히 일반적인 사장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었다.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특별한 사람인데 특히 우리 소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화저널고의 인연도 우리의 소리와 가락이 중매를 하였다고 한다 ‘전북의 춤 전라도의 가락’의 후원자였다는 것이다.
밤 9시 무렵에 우리들은 갑우정에 여장을 풀고 감나무 이파리가 서걱이는 뜰에서 저녁상을 받았다. 저녁상에는 손님대접을 한다고 산양고기와 산양 곰탕이 올라왔는데 누리끼리한 냄새 때문에 여자 참가자들이 음식에 거의 손을 못 대었다. 덕분에 남자들이 날것으로도 먹고 구워서도 먹는 횡재(?)를 했다.
저녁을 먹고나서 갑우정 뜰에서는 때아닌 국악 한마당이 펼쳐졌다. 백제기행에 참가한 남운국립민속국악원에 정정희이 대금연주와 김승정의 해금연주가 있었고. 대구 시립국악원들의 연주가 있었다. 이어서 전북도릭국악원의 소주호 씨가 판소리 한 대목을 하고 이것을 받아서 ‘갑우정’의 주인인 박수관 사장의 민요가 진행되었다. 돌담의 다래넝쿨 아래에서 펼쳐진 이 국악 한마당은 사전에 기획된 것도 아니었는데 아주 뭉클한 감동과 흥겨운 한마당을 이루었다. 그 자리를 통해서 백제기행 참가자들은 물론이요 그곳에 함께한 대구 사람들 모두가 지역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정치놀음인가를 온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역감정이 판소리와 민요, 대금과 아쟁의 선율에 의하여 말끔히 정화된 이날 밤에는 온통 축제 한마당이었다. 이 축제 한마당은 첫닭이 홰를 치고 나서야 맺음되었다.
긴밤의 숙취를 털아내면서 기지개를 켠 둘째 날 아침,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여행길에서 맞는 비는 유쾌한 것이 못 된다. 걱정스런 마음들이 교차되는 상황에서도 계획된 일정 어느 것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주최측의 마음씀이 후더웠다.
빗속에서 아침을 먹고 곧장 대구의 두류공원 이상화 시인의 시비로 향했다. 이 공원에 이르는 차 속에서 문화저널의 발행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천이두 교수의 시인 이상화에 대한 강의가 30여 분동안 진행되었다. 이상화는 1920년대에 활동한 시인인데 <나의 침실로>라는 시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각각 그의 초기 시와 후기 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들 수 있다는 설명고 함께 문학사적인 측면과 이상화 시인 개인사적인 측면에 대한 얘기였다.
얇은 비닐우의를 입고 이상화 시인의 시비를 찾아갔다. 이상화 시비는 여느 시인의 시비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키보다한 두어 뼘 더 큰 돌비 뒷면에 그의 활동내용이 요약되어 있었고 앞면에는 그의 대표 시라 할 수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시작되는 제1연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돌비 앞에는 넓적한 돌의자가 있고 그 돌의자 위에 시인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외발을 오른발 무릎위에 걸친채 바른 손에 만년필을 들고 있었다. 시인의 양 볼에는 눈물인 양 빗물이 주루주룩 흘러내렸으며 그가 들도 있는 만년필 끝에서도 빗물이 뚜욱 뚝 떨어져 내렸다. 왠지 그 빗물이 단순히 빗물이 아니라 통한의 일제치하 시인이 다 못하고 간 한이 아닐까 여겨졌다. 시인의 형상 앞에서 비를 맞으면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참, 이상화 시인은 무지무지 미남형이었다. 나 같은 사람은 질투할 엄두오 못내게
그의 시비는 대구 달성공원과 이곳 두류공원에 각각 그의 시비가 있는데 달성공원에 세워진 시비는 일찍이 세워진 것이고 두류공원에 세워진 시비는 근래에 세워진 것이란다. 그래서 달성공원에 시비를 세울 때에만 해도 서슬퍼런 시절이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새기지 못하고 ‘나의 침실로’라는 초기의 시를 새겼으며 근래에 세운 이곳 시비에 비롯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겼다고 한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우리들은 ‘갑우정밀’회사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날 점심에는 추어탕이 나왔는데 그 추어탕에는 ‘잰피’라는 향료가 들어있었다. 이 향료는 산에서 나는 나무의 열매로서 이와 비슷한 종류로는 ‘산초’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 열매는 한약재료로서 주로‘강장제’로 쓰이며 산간지방에서 김치를 담글 때나 비릿한 음식을 요리할 때 그 비릿함을 없애려고 사용한다. 이 향료는 상당히 독특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어서 안 먹어본 사람은 비위에 상당히 거슬린다. 대개의 경우 고향이 전북인 백제기행 참가자들은 이 날 추어탕을 맛나게 먹지 못하는 눈치였다. 산골 태생인 나는 덕분에 두 그릇씩이나 맛나게 먹었다. 지역의 차이에 따라 음식의 맛과 향이 얼마나 차이 나는가 하는 것을 새삼 느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비 내리는 가을 산사(山寺) 우리들은 대구의 ‘동화사’(桐華寺)엘 들렀다. 절을 중건할 때 절 주변 오동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워 이름을 동화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절은 대구 팔공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 때 세워진 ‘통일재불’로 일반인들에게는 더 잘 알려져 있다. 동화사 본절에는 대응전 천정의 극락조(極樂鳥)그림과 같은 빛나는 문화유산들이 있다.
그런데 절 입구에 자리한 ‘통일대불’(통일약사여래)은 그 공사과정에도 말썽을 일으켰지만 두고두고 말썽을 일으킬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건축이 자연과 인간 생활과의 조화를 중요한 관건으로 여긴다면 통일대불은 뭔가 잘못 되었 단단히 잘 못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기 때문이다. 웅장한 것까지는 좋은데 새로 세운 그 대불이 그 인근의 산세나 본래의 절고 도무지 맞아들지 않았다. 아니 그 산세나 주위의 환경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하여튼 불상 앞에서면 불자이든 아니든 간에 푸근하고 숭엄한 감정이 느껴지는 법인데 웬걸 이 통일대불은 너무 너무나 무식허게 컷 그 앞에 서자 겁부터 더럭 났다 내 지은 되가 많아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없다.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불상에서 돈 냄새가 난다고 입을 모으면서 무식하게 허우대만 큰 모모 前대통령을 닮았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채 새가슴되어 그 불상을 바라보면서 엉뚱하게 그 불상의 손에 슬그머니 ‘람보’의 총을 들려주는 상상을 하였다. 카 아조 기가 막히게 맞아 들었다. 나는 남몰래 낄낄 웃었다.
통일대불 옆 벽면에는 ‘인간들 스스로 만든 이념으로 인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 민족의 아픔과 번뇌를 치유하고자 삼국시대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정신이 깃든 이 곳 팔공산자락에 통일약사여래를 세움으로써 민족통일의 기운을 북돋우고자 한다.’는 요지의 장문이 새겨져 있다. 통일대불을 세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 이 글은 내내 마음에 걸려 내려가질 않았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제 민족을 쳐서 이룩한 통일이라는 것쯤이야 상식에 속하는데 그 삼국통일의 정신을 이어서 남북통일을 이루고자 그 정기가 서린 팔공산에 통일약사여래를 세운다니 영 개운치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 불상을 두고 후세인들이 예술적 감흥이나 자비가 힘으로 대치되었다고 하면서 이것을 군부독재 시절의 상징물로 기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사를 서둘러 빠져나와 절 입구의 상점에서 나는 목걸이 염주를 두 개 샀다. 아이들 목에 각각 걸려줄 심산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손주 두 놈의 이름자가 쎄다고 선암사(전남 승주군 우리 집 자로 코 앞의 절이다)에다 쌀 가져가 주고 벌써 ‘팔아’버렸다. 그런데 내가 불상에다 대고 위와 같은 험악한 생각을 하였으니 은근히 자식 두 놈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비는 여전히 계속 내렸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우리는 동화사를 벗어나와 서둘러 거창으로 향했다. 대구를 빠져나와 오랫동안 산길를 달렸다. 산자락을 접어들 때마다 초목들이 호들짝 놀라곤했다. 우리를 그 해 토벌대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경남 거창군 신원면 과정마을 산자락에 들어서니 봉분이 두 개 있고 그 앞에 비석이 잘려진 채 비스듬히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비문은 누군가에 의해 알아볼 수 없이 패여있었다. 울컥 노여움이 치밀어 하늘을 올려다 보니 어느새 비가 개이고 그 자리에 시퍼런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1951년 전쟁이 발발하여 인민군이 낙동강 어귀에까지 깊숙이 들어오자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인천에 상륙하는 것을 반격을 개시했다. 이에 미처 후퇴를 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으로 찾아들었다. 그리하여 지리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던 마을들은 밤낮으로 국궁과 인민군의 겹치기 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와중에 1951년 2월 국국은 경북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빨치산이 근거를 없앤다는 미명하에 천인골로할 사건을 저지른다. 소위 ‘견벽청야’라 불리는 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 해 2월 10일 국군은 신원면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산자락으로 끌고가서는 총으로 쏘아 몰살을 시켰던 것이다. 거기에는 어린아이와 노약자가 40퍼센트를 차지 한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시체 더미 위에 불을 지르고 매장하여 버린 것이다. 오래지 않아 이 양민학살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자 이승만 정원은 ‘공비와 내통한 자’들에 대한 어쩌고 하는 단서를 붙여 시인하였다. 이 때 사망자로 발표한 숫자가 187이라고 한다.
그 후 유족회가 결성되어 시체 발굴에 나섰는데 이 때 확인된 시신은 성인 남자 109구 여자 183구 어린아이 225명구로 총 517구였다는 것이다. 이 517명의 시신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를 구분하여 신원면 과정마을 산자락에 묘를 정비하고 안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나 계엄군이 총칼 앞세우고 유족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묘지를 파헤져 시신을 각기 분산시켰다고 한다.
이 날 묘지에는「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부회장이 나와서 안내를 해주었는데 농사를 지으면서 아직껏 고향을 지키고 있다는 이 분은 기행단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그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 차가 지리산을 에돌아 빠져나오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그 유족회 부회장의 말이 자꾸만 되살아왔다. ‘인제 누구도 안 믿어요 김영상 대통령이이 문제만큼은 꼭 해결해 준다고 해놓고서 아직까지 해결의 기미가 없어요 여러분, 정말 광주시민이 학살된 것도 그렇고........ 거창 양민학살과 같은 것이 해결되지 못한 채 지나오니까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꼭 이 문제들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차는 어느새 춘향터널을 빠져나와 전주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다.
밖은 어두워 있었다. 창밖을 주시하자 거기에 어제처럼 다시 내가 나타났다. 나는 차창의 나에게 피식 웃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봐 이틀 비워도 세상은 잘 돌아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