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2 | [문화저널]
<제47회 백제기행><손내골의 숨쉬는 옹기> 진안 백운면 손내마을
서해숙 전남대 대학원 국문과
(2005-01-25 15:17:43)
여기 독 짓는 젊은이를 보시오!
전날 대전까지의 여정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전주를 가야했기에 새벽녘의 잠자리를 설쳤다. 새벽녘 한적하기 그지없는 고속도로를 무리하게 달리며 새로운 기분에 들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들의 웃음과 열정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답사기행이라 하면 지역의 절친하고 안면있는 사람들끼리 여행하며 의견을 교환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전라남도라는 공간을 훌훌 털어버리고 북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짧지만 긴 하루를 그들과 보낼 수 있음은 또 다른 기분일게다. 어느곳이든 그 지역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독특한 정서를 느낄 수 있듯이 그들과 부대끼며 자연에 대한 애착심과 열의를 한층 촉진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기에 나로서는 욕심을 부리며 이 기행에 나섰는지 모른다.
9시경에 전주를 빠져 진안으로 진입해 갈 때 전에 내린 눈으로 선언저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치켜 올려치며 새로운 날을 조용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모래재를 넘어야 진안을 담박에 느낄 수 있다는 손내골 옹기쟁이의 착실한 설명을 실감하며 우리들 일행을 실은 차는 자꾸만 하늘 언저리로 날아가고 있는 착각을 하였다. 이재를 넘어가면서 그동안 찌든 세속의 먼지를 털어내듯 아니면 세속을 떠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험한 산을 건너야만 하는 고행과 같다.
우리는 즐거운 기분으로 서로를 소개하면서 앞으로 함께 할 시간들을 언약하며 들떠있는 동안 허우적 거리며 달리는 차창 밖의 산천은 경이로움이었다. 완만하면서도 굵직한 산의 모습이 그려질 때마다 산이 숨쉬며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는 환영에 빠진다.
그동안 찌들었던 세상 기운을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여기서만은 잠시라도 그 기운을 쇠잔시키려는 듯 몸 속으로 쏟아지는 맑은 기운들에 점령되어 잠시동안 어리둥절 해진다. 이곳 모래재를 언젠가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온 적이 있지만 일행들과 어울려 함께 오르는 기분은 또 다른 것이었다. 앞으로 다시 한번 이곳을 온다해도 또 다른 기분에 들떠 혼자서 횡설수설하게 될는지 모른다.
우리가 가려는곳은 손내골 옹기쟁이집이다. 젊은 옹기쟁이가 세상을 어긋지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도 희한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란다. 말이 그렇지 요즘 세상에 자기 꼬라지 대로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런자, 세상의 스산한 기운에 눌려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이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인데.,.......
광주에도 첨단과학기지가 들어서면서 옹기굽는 옹기쟁이가 그나마 자취를 감추고 다른 생계를 찾아 훌훌 떠나가듯 세상 밖으로 자꾸만 밀려가는 신세가 이니던가?
내가 이다지도 젊은 옹기쟁이에게 감탄하며 탄성을 지르는 게 단지 시집못간 처녀가 젊은 남자를 만나기 때문은 아닐게다. 그 젊은이가 청자 백자를 만든다면 이렇게 가려고 애쓰지도않을텐데 그가 옹기를 만들기 때문에 이렇게 좋아하며 설레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기충적이고 서민적인 모습을 대변하는 대상을 찾는다면 나는 당연히 옹기를 꼽을 것이다. 옹기는 투박하며 거칠은 시골아낙네의 손등을 연상케 한다. 힘겨운 시집살이를 견디는 고운 새색시가 옹기 물동우를 이고 힘겹게 마을 한귀퉁이를 빠져나가는 모습이나 젊은 아낙네가 짚으로 장독대를 닦고 있는 모습에서도 옹기는 쉽게 연상된다. 나에게도 옹기에 대한 기억은 향수와 같다. 어릴적 칫간에 가려면 큰 옹기가 묻혀있는 똥통에 빠질까 두려워하면서 분명 그 옹기에는 칫간 귀신이 숨어있을 거라 믿었던 기억 그리고 집안의 광에 내 키보다 훨신 큰 옹기가 잇어 그 속의 물건을 꺼내려다 그곳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며 엄마를 부르며 야단버석을 떨었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도 옹기는 쉽게 연상된다. 이런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닐게다. 우리들 모두가 가졌던 기억일텐데, 이제는 추억과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의 숨가쁜 흐름에 새로운 물질문명이 쇄도하면서 우리의 것들이 하나하나 편리하고 몸에 맞지 않는 어여쁜 옷들로 치장됨에 따라 이제는 우리들의 기억 속에 점차로 잊혀져 가고 있는 물건이 되어 버린 셈이다.
10시경 쯤 백운면에 있는 손내마을에 도착하였다. 이 마을에 사는 동네 어르신들께 물어보니 풍수적으로 이 마을은 솥 밑에 발이 네 개 달린 형국이라 하여 솔네라 하였다가 손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흙을 발라 지은 집과 한쪽의 가마터 그리고 다른 한쪽의 작업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춥지만 따뜻한 햇쌀이 온통 퍼부어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뜨고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바라다 보이는 곳은 야트막한 산들이 겹겹이 에워싸여 있고 그 사이의 평지에는 듬성듬성 볏짚이 쌓인 논드링 촘촘히 엉켜 있다. 다행히 큰 길이 있어 쉽게도 이곳을 왔건만 옛적에는 호랑이나 늑대들이 문을 두드리며 제법 집안을 기웃거렷을 법하다.
옹기 제조하는 작업실에 들어가니 물레칸과 따뜻한 난로가 먼저 반긴다. 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미 완성된 옹기들과 완성된 예술품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한참을 감격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순간 마다 까닭없는 친숙함에 몇 번을 만지작 거렸다. 사대부 대감집 서재에 장식되어 있는 자기처럼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물리게 위암감을 짓눌리게하고 물리게 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거무틱틱한 색깔에 반한 우직스럽게 버티고 있는 모습은 그대로 우리와 함께 동화된 채 가까이 있는 물건이었다.
이현배씨의 짤막한 옹기강의가 시작되자 모든 일행들은 사뭇 진지하기만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은 자연과 동화되고 자연의 섭리에 파생되어 표현할 때 그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그 반면 인간의 편리함에 압도되어 자연과 상응하는 것은 그 생명력을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있었을 법한 옹기가 오늘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옴은 묵묵히 자연 속에 침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역하지 않은 자연의 원리를 그대로 승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옹기에서 전(숙)은 올라치는 힘을 머금은 것으로 선의 논리를 따른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 이현배씨는 말한다. 그리고 옹기의 중심은 하늘을 치솟는 것처럼 밑에서부터 완만하게 흘러 그 마지막 윗부분으로 그 힘이 뭉쳐져 있으며, 전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인간의 생식기처럼 어느 순간 큰 힘을 발산할 수 있는 원천적이며 잠재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현배씨는 가장 한국적인 선의 논리로 한국인의 정서를 이야기 하였다. 그의 철저한 현장경험에서 우러나온 알곡같은 설명들은 그동안 막연하게 보았던 옹기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하며 머뭇거리게 하였다.
작업실에서 우르르 몰려나오니 마당 한가운데 펼쳐진 솥에서는 맛 좋은 연기들이 우리를 반긴다. 조그만한 뚝배기에 밥을 담고 거기에 멸치로 우려낸 김치국을 담아서 먹는 밥은 일품이었다. 토담집 앞의 양지 바른 곳에 철퍼덕하니 앉아 반찬이라고는 고추버무린 것 밖에 없어도 와그작 씹어먹는 맛에 옆의 김성식 씨의 왈패같은 소리도 들어오지 않는다. 답사라는게 이래서 좋다. 한 곳에 목적을 두고 모인 사람들은 쉽게 자기를 표현하고 웃으며 서로에게 말거리를 제공해준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 태반이건만 한나절도 못되어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 다시금 작업실에 들어가 옹기를 직접 만들어보게 되었다. 욕심껏 자기 흙을 배당받고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주물러 보지만 쉽게 그릇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래서 손재주는 타고나는가배!
한참을 만지작거리니 바가치 모양의 그릇이 나오기는 나오는구나. 들은 풍월이 있어 나중에 전을 살린다고 흙을 한참이나 주물럭거리며 엄청난 기교를 부리지만 역시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내가 만든 게 제일 잘 되었을거라 자탄하며 뒤돌아 보니 웬걸! 모두가 솜씨들이 대단하였다. 화분, 촛대, 그릇, 여러 모양의 컵들, 알지도 못하는 괴상한 물건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모두들 자기 성깔을 보여주는 듯 싶다.
옹기는 우리들에게 가장 친숙한 그릇이고 생활과 아주 밀접하여 밥담는 것에서부터 술을 담거나 오물을 담거나 곡식을 담아 두는 생활용구였다. 그래서 쉽게 구할 수 잇는만큼 천덕구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투박한 남자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그릇일지라도 우리의 문화를 돌이켜보면 옹기에서는 특히 여인네들의 신성함이 베어있는 체취가 느껴진다.
언젠가 전남 구례의 마을 조사를 갔을 때 나이든 아주머니가 우리 집안의 조상단지라 하며 보여준 그릇을 보니 아주 조그만한 옹기그릇이었다. 쌀이 가득 든 채 한지로 덮여 있었다. 말로만 들었지 처음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그 그릇은 일반 생활기구가 아니었다. 신성하고 조심스러워 하며 잘못 만져탈이 날까봐 무서워하기까지 하였다. 신주단지 모시듯이 한다는 말이 이 경우일 것이다. 예부터 집안에서는 가신(家神)을 모시는데, 대부분의 옹기와 같은 단지를 신체(神體)로 모신다. 옹기를 신성한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떤 신인가에 따라 옹기의 크기는 다랄진다. 가령 조상을 모시는 신체는 조그만한 단지이고, 집안의 성주를 모시는 신체는 제법 큰 독과 같은 것으로 성주독, 성주동우라 한다. 그리고 장독대에도 간장, 된장 고추장 등 맛을 좋게 해주는 철륭신이 있어 명절 때 언제나 촛불켜고 음식을 차려 비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행여 부정탈까봐 큰 독에 한지로 버선모양을 만들어 거꾸로 붙여 놓거나 고추와 숫덩이를 끼운 왼새끼의 금줄을 두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집안에서의 옹기는 신성한 영물로 다루지면서거기서 집안의 평안과 가족의 무병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문화는 다수에 의해 향유되지만 진정한 문화의 맥은 한 두 사람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다고 믿는다. 오늘날은 새로운 것들에 의해 가치창조되고 적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산물들이다. 우리것이 세계적이다. 아니면 우리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이런 흔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우리의 자연 속에 잉태되어 무구한 세월동안 존속되어 온 문화만이 그 영속성을 인정받게 되고 가느다란 실처럼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전스오디는 것이다. 이련배씨 밑에서 옹기제작을 배우는 김용태씨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생각들은 실감이 된다.
이런 거창한 생각들을 하면서 논두렁에서 편을 갈라 촉구하는 회원들을 바라보았다. 함께 뛰어도시원찮을 판인데 여기 저기 기웃거리고 다니느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제법 쌀쌀한 날씨지만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이 한패가 되어 뛰어놀며 웃어제끼는 모습을 보니 추워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구나. 다른 한쪽에서는 옹기조각에 불을 지펴 삽겹살을 구워대며 술과 김치를 먹으면서 그곳을 살아가는 노인네들과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참을 먹고 이야기 하다보니 원편집은 정리하고 돌아가자고 야단이다. 서둘러 정리하고 보니 이현배 씨가 선물로 준 옹기에 가방이 제법 무거워진다.
손내마을을 뒤로 하고 빠져나오는 그 길 동안 이제는 소설에서 나오던 힘없고 세상살이에 지친 냐약한 독 짓는 노인의 인상을 떨어져버릴 수 있게 됨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제는 젊고 의기가 넘치며 진정한 우리들의 젊은 독지기를 상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비단 손내골만이 아닌 직접 가보지 못한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것에 현혹되어 신들린 사람처럼 열심히 우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믿어본다.
진안은 어쩌다 마이산이 불거져 다른 산들은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꽤나 첩첩산중이다. 한참동안 마이산 주위를 돌다가 우리가 찾아간 곳은 삼의당이었다. 삼의당부인을 기념하는 시비에는 그녀의 남편 하욱과 함께 첫날 밤 주고 받으며 울었다는 부부창화(夫婦唱和)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부부는 백성의 비롯 군자의 기본이라
공경과 소중함은 오르지 아내의 길
님의 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그녀의 한편의 시를 가지고 그의 훌륭한 문학성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한날 한시에 태어난 부부의 애틋한 애정과 조선의 순종하는 한 여인의 음성을 상상케 하며, 오늘날 부부간의 타락성을 은근히 지적해 주는 것으로, 이 곳 삼의당을 찾는 의미를 이해하였다.
진안을 빠져 전주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주위사람들과 살아가는 이야기에 정신을 팔다보니 어느덧 하루의 해가 어스름해지고 있다. 전주에서의 따뜻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오늘의 자리를 마무리 하며 광주로 서둘러 올라오는 길 동안 전주에서의 훈훈한 열기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래서 답사가 좋은가 보다.